이어령 교수가 백락 역할을 자처한 천재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무용인 국수호, 국악인 김덕수, 건축가 김수근, 소설가 박완서,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기업인 이찬진, 소설가 황석영, 바이올리니스트 장유진, 소설가 최인호, 화가 이우환, 국악인 안숙선,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이어령 교수가 백락 역할을 자처한 천재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무용인 국수호, 국악인 김덕수, 건축가 김수근, 소설가 박완서,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기업인 이찬진, 소설가 황석영, 바이올리니스트 장유진, 소설가 최인호, 화가 이우환, 국악인 안숙선,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나는 천리마가 아니라 백락(佰樂)이야.”

‘이어령의 창조이력서’ 마지막회 인터뷰의 첫마디다. 마지막에는 늘 슬픔이 따른다. 무언가 아련하고 가슴 조이는 저녁노을 같은 언어를 기대했던 기자에게는 너무나 삭막한 선언이었다.

“겸손으로 하는 말이 아니에요. 나는 하루에 십 리도 못 달리는 노마(駑馬)지만 천리마(千里馬)를 알아보는 눈은 있지.”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처 몰랐던 이어령의 또 다른 얼굴. 그의 문화적 공적은 안팎으로 뻗어 있다. 그는 ‘문화 창조자’이기도 하지만, 숨어 있던 천재를 세상에 알리고 추임새를 하고 손뼉을 쳐 바람을 일으킨 ‘문화 선동가’이기도 했다.

백락(佰樂). 천리마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춘추시대 사람으로, 훗날 인재를 감별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백락과 천리마 사이에는 슬픈 이야기도 깃들어 있다. 천 리를 달려야 할 천리마가 소금수레를 지고 언덕길을 오르는 것을 본 백락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이에 천리마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눈물에는 자신의 남다른 재능을 몰라보고 소금수레나 지게 하는 현실에 대한 서글픔, 한편으로는 뒤늦게 재능을 알아봐준 이에 대한 고마움이 뒤섞여 있다. 이어령 교수가 한국의 백락을 자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그래서 기자는 대놓고 물었다. “세상이 선생님을 몰라본 것에 대한 서글픔에서 한국의 백락을 자처한 것 아닌지요?” 하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피하면서 “천리마에게 소금수레를 지게 하기는커녕 몽둥이로 때려 내쫓는 사회”라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세계에서 아이큐 제일 높은 나라가 한국이잖아. 그런데 한국의 문화풍토와 사회환경, 그리고 톱다운식 교육체계 때문에 천 리는커녕 백 리도 달려 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 천리마들, 한국의 숨은 피카소, 아인슈타인이 얼마나 많을까?” 그는 미국판 천리마와 백락 이야기를 꺼냈다. 왕따였던 스티브 잡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용기와 힘을 준 고등학교 교사 이야기부터 시작해 미국판 백락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아직도 기회의 땅인 것은 천리마를 알아보고 천리마를 맘껏 달리게 해주는 사회이기 때문이지.”

백남준, 이우환, 김수근, 사라 장, 장유진…

이런 생각은 조선일보 1984년 1월 21일자에 ‘귤이 탱자가 되는 사회’라는 제목으로 쓴 백남준론에 자세히 밝힌 바 있다. 이후 이어령은 백남준의 예술활동을 국내에 끌어들여 그의 문화적 뿌리를 찾아주는 일에 팔을 걷어붙인다. 2008년 한국의 관문인 인천공항 로비에 백남준의 대표작 ‘거북’을 설치 전시한 것도 이어령의 제안과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가 경기도 용인의 백남준기념관 건립에 참여하고 후원회를 발족해 후원회장직까지 맡은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화가 이우환의 경우도 비슷하다. 두 사람의 친분은 이우환이 세계적 화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어느날 생면부지의 이우환은 이 교수를 찾아와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중국과 일본은 문장 띄어쓰기를 안 하는데 왜 한국만 서양식으로 띄어쓰기를 하는가?” 이 교수는 질문을 듣자마자 무릎을 치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이어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의 폭포수가 쏟아졌다. 이후 이어령은 이우환의 후원자를 자처한다. 이우환은 ‘64가지 만남의 방식’에서 자신이 서울을 방문할 때마다 이어령 교수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고 말했다. 이우환은 이어령과의 만남을 앞두고 긴자(銀座)의 단골 부티크에서 그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고르곤 했다.

건축가 김수근과는 또 어떤가. 김수근 야심작 중 하나인 ‘부여박물관’이 일본의 신전 도리이(鳥居) 양식 같다며 집중포화를 맞을 때, 이어령은 현장조사 심사원의 자격으로 참가했다. 일면식 없는 건축가였지만 그는 따가운 여론을 헤치고 그의 탁월한 예술성을 옹호하며 백락 역할을 자처했다. 19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에서 한국관을 설계한 김수근이 또 한 번 여론의 도마에 올랐을 때에도 이어령은 현장조사 심사원으로 파견돼 김수근을 감쌌다.

시각 예술은 전위적 예술가의 편만은 아니다. 백락의 눈은 사라져가는 전통 예술가의 산소마스크 같은 역할도 했다. 김덕수의 사물놀이 하면 그 뒤에 이어령이 있다. 또 안숙선, 국수호 등 한국의 가무악(歌·舞·樂)을 연결, 홀로그램 ‘죽은 나무 꽃피우기’를 통해 현대와 전통을 어우르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훗날 이들은 그가 창설한 경기디지로그창조학교의 멘토들로 활약하게 된다.

백락 이어령의 눈은 어린이들의 천재성 발견 쪽으로 쏠린다. 열 살의 사라 장이 한국 무대에 처음 선 것은 그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한 직후에 열린 ‘신년음악회’를 통해서다. 바렌보임 지휘로 카네기홀에서 연주한 사라 장의 공연실황 비디오를 보고 그가 천리마임을 알아챈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손편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야구를 좋아한다”는 사라 장의 편지글에 이어령 교수는 “너는 손가락을 다치면 안 되니 야구는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고, 한국어를 꾸준히 공부하라면서 한국어로 된 역사 만화책을 사서 미국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문화부 장관을 그만둔 뒤에도 이어령 교수의 천리마 찾기는 계속됐다. ‘열린음악회’에서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장유진의 연주를 본 이어령은 이들 모녀와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교수가 장씨의 어머니에게 “무엇을 도와줄까요?” 물었더니 어머니는 “저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이대로가 좋습니다.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는데, 우리는 시골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대로 그냥 두고 싶습니다. 단 하나, 이 아이가 책을 좋아하니 가능하다면 책을 몇 권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어령은 장유진에게 세계문학전집을 선물했다. 역시 그의 눈은 빗나가지 않았다. 장유진은 2006년 ‘영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올해에는 ‘일본 센다이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의 전공인 문학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사족이다. ‘문학사상’을 만들고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서 후배들을 키운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개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흥미진진한 뒷이야기가 많다. 신인 황석영이 한국일보에 장편소설 ‘장길산’을 연재한 파격 뒤에는 이어령의 숨은 손이 있었다. 황석영의 재능을 갈파한 이어령은 당시 한국일보 이영휘 문화부장에게 황석영을 추천했다. 그러나 장기영 사장의 반대에 부딪힌다. 장 사장은 황석영이 아직 검증이 안 된 신인이니 추천자 이어령의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 이어령은 기꺼이 서약서를 썼다. 전대미문의 일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이어령을 ‘나의 전성시대를 만들어준 분’으로 기억한다. 이어령 교수가 문학사상 주간으로 있을 당시 등단 5년 차 신인 박완서에게 연재를 맡겼다. 박완서는 연재를 승낙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탐낼 만한 지면을 차지하는 것이 과욕인 것 같았고 체력에도 자신이 없었지만 이 주간이 나를 알아봐준 것이 기뻐서 (승낙합니다).” ‘도시의 흉년’ 연재는 그렇게 시작됐고 이후 5년 동안이나 장기 연재했다. 이후 박완서는 1985년 다시 문학사상에 ‘미망’을 연재하는데 이 또한 이어령의 간곡한 권유 때문이었다. 먼 훗날 이상문학상 심사장에서 만난 박완서는 이어령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눈 씻고 찾아봐도 관료적인 냄새가 안 풍기는 것도 고마웠고, 반짝이는 재기와 여전히 귀여움이 남아 있는 것도 반가웠다. 그는 늘쩍지근하게 정체돼 있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가 우리의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한 문화예술가 또한 귀한 활력소 하나 내장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절필한 소설가 김승옥의 붓을 다시 들게 하기 위해 김승옥을 감금까지 한 사건은 문단에서 유명하다. 1977년 이어령은 사직공원 근처의 여관방을 잡고 그 앞에 김승옥이 탈출을 못 하도록 편집부 직원 둘을 감시요원 격으로 배치했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서울의 달빛 0장’이다. 그 이전에 데뷔작 ‘무진기행’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평론가 이어령이었다. 소설가 최인호가 청년문화, 대중문화 등에 깊이 간여하여 문단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도 그의 천재성과 뛰어난 예술적 감성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어령은 생전에 들어주지 못한 최인호의 부탁을 세상을 떠난 뒤 ‘읽고 싶은 이어령’이라는 책 출간으로 들어주었다.

이어령은 파벌이나 친분을 떠나 작품만 좋으면 백락으로서의 역할을 자처했다. 소설가 조정래는 동아일보 2012년 1월 12일자에서 “건강한 보수와 책임 있는 진보가 함께 가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좌우로부터 함께 존경받는 분들이 없다. 내가 알기에 그런 분이 딱 두 사람인데 하나는 박태준, 다른 하나는 이어령이다”라고 말했다.

“천재? 당연히 질투 나지”

한국의 백락으로서 이어령 교수의 손길은 문화예술계를 넘어선다. 이 교수는 이찬진이 개발한 ‘한글과 컴퓨터’를 처음 접할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1980년대 말 이 교수가 미국 뉴욕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글’ 초판을 접하게 된다. 당시 한국에서는 삼보가 개발한 ‘보석글’을 사용했는데, 이는 미국의 ‘워드스타’와 비교하면 단어별 블록지정도 안 되는 원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글’은 기능이나 편의성 면에서 워드스타에 뒤지지 않았다. 이 교수는 사용설명서에 있는 개발자 이름과 전화번호를 보고 한국으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무작정 걸었지. 이찬진이 공과대학(서울대 기계공학과) 3학년인가 4학년 때였어. 이찬진한테 번들로 대기업에 팔지 말고 독자적으로 키워보라고 당부했지.”

대학생들이 벤처기업 자금이 풍부할 리 만무했다. 이어령 교수는 더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 과학기술처의 이상희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이 장관, 최만리가 되겠소, 아니면 세종대왕이 되겠소?” 이상희 장관은 “최만리가 되겠다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라며 본론을 물었다. 이 교수는 대학생들이 만든 기막힌 프로그램 이야기를 꺼내며 도와달라고 청했다. 얼마 안 있어 대학생 이찬진은 이상희 장관과 식사를 함께하게 된다. 훗날 문화부 장관을 맡게 된 이 교수는 이찬진을 직접 챙겼다. 맞춤법 체크기능이 가미된 프로그램 개발을 지원하는 등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찬진이 배우 김희애와 결혼식을 올릴 때에는 주례를 섰다.

“당시는 이찬진의 전성시대였지. 그런데 이찬진은 정치계에서 유혹하는데도 현혹되지 않고 자기 길을 묵묵히 걸었어. 지하철을 타고 걸어다니는 사장이야. 내가 실질적인 도움을 줬느냐 안 줬느냐를 떠나서 그 사람도 가만히 두면 외로운 늑대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술수를 쓰거나 패거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니까 누군가가 응원해주지 않으면 사회에서 자기 기반을 닦는 게 힘들잖아.”

이어령 교수의 천재 감별법은 단순명료하다. 그에게는 혈연·학연·지연이 통하지 않는다. 딱 하나, 재능만 본다. 무슨 분야든 천재적 재능을 지닌 사람을 보면 금광을 발견한 듯 동공이 넓어지면서 가슴이 설렌다. 그리고 깊은 산골에서 산삼을 발견한 듯 세상을 향해 외친다. “심 봤다!”고. 그런데 그걸로 끝이다. 소위 ‘이어령 사단’ 같은 건 없다. 얼핏 그가 외로워 보이는 이유다.

“나는 (찾아놓고) 인간관계를 맺지 않아요. 찾는 걸로 끝이야. ‘여기 보석이 있네’ ‘천리마가 있네’ ‘산삼이 있네’ 하고 세상에 알리면 그걸로 됐지. 관계를 맺지 않는 이유는 내가 고고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런 걸 잘 못 해. 또 남이 나를 존경한다고 하면 굉장히 부담스러워. 실망을 줄까 봐. 나한테 다가와서 존경한다면서 같이 셀카를 찍고,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와서 ‘한 번만 만져주세요’ 하면 정말 부담스럽다고.”

그에게 짓궂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천재들을 발견하면 질투는 안 나세요?” 하고. 그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당연히 질투 나지”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야, 질투 나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면 내가 비참해지잖아. 대신 그 사람을 돕는 거지. 그러면 같이하는 거니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대부분은 내가 질투하는 작가들이야. 박완서, 최인호, 김승옥 다 질투하는 작가들이지.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도, 화가 이우환도 내가 못하는 것들을 하니까 질투 나지. 그래도 음악, 미술 분야는 비교적 순수하게 도울 수 있어요. 라이벌이 아니니까.(웃음)”

이어령의 창조이력서 연재는 끝나지만, 창조 이야기는 끝이 아니다. 아직 창조이력서에서 다루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세살마을, 난지도 밀레니엄 타운, 3세대 주택, 1996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 개폐회식, 상암동 DMC(디지털미디어시티) 기획, 하이쿠의 시학 등은 입에도 못 올렸다. 이어령 교수는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생각에서 가천길재단과 손잡고 가천대학에 세살마을 연구소를 냈고(2009년), 난지도에 천년화 사업으로 ‘평화의 열두대문’을 기획했다. 10년마다 문화와 산업의 양 기둥을 세우고 기둥 아래로 박물관을 만들어 100년 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문화산업박물관을 만든다는 복안이다. 또 산업사회가 만든 거대한 쓰레기 터를 아름다운 생태도시, 에코시티로 만들려는 계획도 세웠다. 고건 서울시장 때의 일이다.

하지만 월드컵경기장, DMC 등 몇 군데에만 그 흔적을 남기고 대부분은 현실화하지 못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암 일대를 스마트 그리드로 전력공급을 정보화해서 자동으로 전력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을 내놓기도 했다는 거다. 이미 그때에.

이어령 교수에게 ‘못다 이룬 창조’ 중 아쉬움이 가장 많이 남는 페이지를 물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어린이 교육이지.” 이어령에게 아이들은 창조 그 자체였다.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 “아이들이 놀면서 배우는 창조교실을 만들고 싶었어. 색채교육, 언어교육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학습하게끔 하는 것이지. 몬테소리처럼 말야. 여러 번 시도해 봤는데 교육 시스템을 건드리는 것이라서 잘 안됐어요.” 그래서 쓴 것이 ‘생각에 날개를 달자’(웅진) ‘춤추는 생각학교’(푸른숲) 등 어린이에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우는 이야기책이다.

22회의 창조이력서를 돌이켜본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애초에는 21세기 마지막 르네상스형 지식인의 두뇌를 파헤쳐 보고 싶었다. ‘번쩍’ 하는 창조적 영감이 탄생하는 순간의 비결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그의 뇌에서 이 지식과 저 지식을 융합시키고, 그의 가슴에서 이 감성과 저 감성을 녹여내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뽑아내는 과정을 ‘현재형’으로 지켜봤지만, 뭔가에 홀린 듯 감탄만 하다가 열 달을 흘려버렸다는 반성이 든다. 하지만 소득도 있다. 그의 창조적 소스의 팔 할은 한국인의 유전자에서 길어올렸다는 걸 알았다. 이어령 교수를 통해 한국인의 창조성을 재발견한 측면이 크다. 우리도 모르고 있던 우리 안의 창조 유전자.

이 교수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메시지도 같았다. “한국인은 한국인 스스로를 너무 저평가하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잘 뭉치지도 않고 싸움만 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지. 그게 아니거든. 아이큐도 높은 민족이고, 역사적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어낸 밈(MEME·문화유전자)을 지녔지. 침략을 하지 않고도 큰 대국 속에서 버텨온 거예요. 우리가 군사력이 있었어, 정치력이 있었어? 정치 경제 패러다임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지혜로 버텨온 것이지. 문화의 힘이야. 그 때문에 무(武)를 휘두르는 사람들한테 토끼밥이 된 면도 있지만, 무가 맥을 못 추는 오늘날의 시빌리언 컨트롤(문민지배) 시대에는 큰 힘이 되는 거지. 우리는 머리로 지배해왔잖아. 칼이 아니라 붓으로. 한국인에게 내재된 ‘오래된 미래’의 저력을 느꼈으면 해요.”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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