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미라 ‘산타클로스 뮤지엄’ 벽에 새겨진 산 니콜로 상. 이곳에서 태어난 산 니콜로가 산타클로스의 모델이다.
터키 미라 ‘산타클로스 뮤지엄’ 벽에 새겨진 산 니콜로 상. 이곳에서 태어난 산 니콜로가 산타클로스의 모델이다.

이야기의 출발은 산 니콜로(San Nicolo) 교회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리도섬 한가운데 서 있다. 베니스와 주변 섬의 건물들이 그러하듯, 아득한 수평선을 배경으로 높게 솟아 있다. 교회 첨탑이 푸른 하늘 위로 솟구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성(聖)의 세계다. 8년 전부터 거의 매년 겨울을 베니스 리도에서 보내지만 니콜로 교회는 지난해에 처음 방문했다. 이전에도 서너 번 찾아갔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항상 문이 닫혀 있었다. 베니스영화제로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겨울의 리도는 유령도시 비슷하다. 보트 선착장만 붐빌 뿐 호텔이나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는다. 산 니콜로는 그리스정교 교회다. 예배가 이뤄지는 금요일과 일요일에만 문을 연다고 한다. 헛걸음을 친 것도 이유가 있었다.

베니스 교회들에 비해 산 니콜로 교회는 너무도 심플하다. 틴토레토, 티치아노 같은 베니스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명성이 새겨진 성화는 단 한 점도 없다. 굳이 특이한 것을 찾자면 입구 왼쪽에 걸린 비잔틴풍의 큰 초상화 하나를 꼽을 수 있을 듯하다. 교회의 수호성인이자 한때 베니스 전체를 대표한 성령인 산 니콜로의 얼굴이다.

베니스의 군사요충지인 리도는 십자군 원정 출발지였다. 중세 베니스는 조선 대국이다. 배를 만들어 유럽 각지에 모인 수십만의 기독교 연합군들을 성지 이스라엘로 실어날랐다. 중세 베니스가 축적한 엄청난 부는 바로 십자군 특수 덕분이었다. 산 니콜로 교회 바로 앞은 바다다. 1202년 제4차 십자군 원정대는 수백 척의 대함대와 함께 산 니콜로 교회에 집결한다. 산 니콜로 교회 주교의 축복하에 이교도를 말살하러 떠난다. 13세기 십자군전쟁이 극에 달할 당시 산 니콜로 교회 안은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기사단의 신앙고백 현장이기도 했다. 신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려는 비장한 목소리가 교회 안에 울려퍼졌다. 교회 바로 앞의 바다에 떠 있는 십자가 깃발로 뒤덮인 수백 척의 전함. 30㎏이 넘는 육중한 갑옷을 입은 채 주교의 기도를 받는 유럽 기사단.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장면이지만, 그 같은 어제의 그림자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곳이 21세기 산 니콜로 교회다.

산 니콜로가 크리스마스의 상징인 산타클로스의 모델이란 사실은 리도발 십자군전쟁사를 공부하던 중 알게 된 수확이다. 산 니콜로가 베니스의 수호성인이 된 것은 정확히 말해 1100년경이다. 343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산 니콜로의 유해가 리도에 옮겨진 것은 1099년이다. 757년 만에 유해가 이장된 것은 베니스 교회 추기경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본래 산 니콜로의 유해는 당시 비잔틴제국의 영토였던 현 터키 미라(Miyra)의 교회 안에 있었다. 베니스는 무력을 동원해 큰형님뻘인 비잔틴 교회를 공격해 시신을 훔쳐왔다. 산 니콜로 유해는 도둑질을 통해 얻어온 전리품인 것이다. 십자군 출발 성지인 산 니콜로 교회는 기독교도들 사이의 하극상 무대인 동시에,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도둑질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기독교 국가인 1000년 왕국 비잔틴이 이후 베니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십자군에 능멸된 것은 필연적이고도 당연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종교나 피보다 강한 것도 없지만, 일단 서로가 틀어질 경우 종교나 피를 나눈 관계보다 더 무서운 존재도 없다.

터키 미라에 대한 관심은 산 니콜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 니콜로의 본래 무덤에 대한 흥미보다 3년 전부터 떠오른 필자의 새로운 관심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미라를 공부하게 됐다. 관심사란 지중해와 에게해 문명에 관한 것이다.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터키 동부 아시아 지역 남부 해안에 핀 리디아(Lydia) 문명이다. 동전을 처음으로 발명해 사용한 문명권으로도 유명하다. 믿기 어렵겠지만, 3000년 전 리디아의 흔적이 아직도 터키 동부 에게해와 지중해 연안에 남아 있다. 이후 이어진 그리스 로마 비잔틴 문명과 뒤섞여 독특한 문명을 형성하고 있는, 인류 고대사의 비경에 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문화의 상징으로 통하는 원형극장은 원래 리디아 문명권이 창조해낸 역사적 유물이기도 하다. 산을 깎아 만든 리디아의 원형극장을 평지로 옮긴 곳이 바로 로마다. 리디아 문명은 주로 산속 언덕에서 출발한다. 원형극장, 원형경기장, 신전, 시장(Agora)을 도시의 필수요소로 구축했다. 산 니콜로의 고향인 미라는 그 같은 배경에서 형성되어온 리디아 문명의 중심이자 오랜 역사의 터전이기도 하다. 산 니콜로 이전에, 고대문명사의 현장이 미라이다.

전부 30통이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미라로 떠나기 직전 지인들로부터 받은 이메일 편지 숫자다. 이스탄불 축구장 테러로 수십 명이 숨지면서 여정(旅程)을 걱정하는 글이 이어졌다. 연이은 테러 관련 뉴스 때문이겠지만, 터키로 오는 여행객 수도 이전에 비해 70%나 줄었다고 한다. 터키의 아시아 쪽 항구도시 이즈미르(Izmir)에서 차를 빌려 리디아 문명지대로 떠났다. 에페수스(Ephesus), 밀레투스(Miletus), 마그네시아(Magnesia)를 살펴본 뒤 미라 쪽으로 달렸다. 이즈미르에서 자동차로 6시간 거리다. 터키는 자체 내 민족분쟁만이 아니라 인접한 시리아 난민으로도 고통받고 있다. 정부는 200만이라고 말하지만 국민들은 300만 시리아 난민이 터키 내에 들어와 있다고 믿고 있다. 리디아 문명권은 바다를 따라 내륙인 시리아로 이어지는 지역이다. 당연히 곳곳에 터키 군인과 경찰의 검문이 이어진다. 난민도 문제지만 이슬람국가(IS) 테러리스트의 터키 침투를 막기 위한 자구책이다. 언뜻 보면 너무도 허술하게 느껴지지만 같은 이슬람권 사람들끼리는 민감하게 대응한다고 한다. 아시아인의 특혜를 누릴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장소가 터키 동부 아시아 지역이다.

터키에서 고대문명지를 찾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GPS를 통해 찾아가도 지명이 뒤죽박죽이다. 도시 이름이 영어, 그리스어, 터키어로 다양하게 불리기 때문이다. 외국에 잘 알려진 고대문명지 이름의 대부분은 그리스어다. ‘미라’라는 지명도 고대 그리스어다. 터키 이름으로는 ‘뎀레(Demre)’로 불린다. 미라라는 지명을 GPS에 넣으면 안 나온다. 현지 거주자는 알겠지만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그리스 지명을 전혀 모른다. 대략 방향을 잡고 감으로 달려갔다. 미라와 뎀레가 동일 지명이란 사실은 현지 도착 10분 전에야 알았다. 뎀레, 즉 미라는 터키 동부 아시아 지역 해변도시다. 그 유명한 산타클로스의 고향이라고 하지만 현지 터키인들과는 전혀 무관한 곳이다.

‘산타클로스 뮤지엄’은 본래 산 니콜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던 교회였다. 산 니콜로의 유해는 1099년 도시국가 베니스가 군대를 동원해 훔쳐갔다.
‘산타클로스 뮤지엄’은 본래 산 니콜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던 교회였다. 산 니콜로의 유해는 1099년 도시국가 베니스가 군대를 동원해 훔쳐갔다.

썰매·사슴과는 거리가 먼 산 니콜로

산 니콜로의 원래 시신은 자신이 세운 교회 안에 있었다고 한다. 산 니콜로를 기리는 교회 수도원이다. 현재는 ‘노엘 바바 뮤제이(Noel Baba Muzei)’란 이름을 단 건물로 변해 있다. ‘산타클로스 뮤지엄’이란 의미다. 들어가는 입구는 너무도 황량하다. 싸구려 토산품 가게들 한가운데 세워진 검은 산타클로스 입상이 눈에 들어온다. 얼굴을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검은색으로, 산타클로스와 손을 잡은 소녀와 어깨에 올라탄 소년이 함께 조각돼 있다. 입상 주변에는 축구를 하는 터키 어린이들도 볼 수 있었다. 입상은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듯하지만, 서구문명에 익숙한 사람이 보면 어색하게 보인다. 바지, 상의, 모자 전부 철저히 터키 스타일이다. 갓 쓰고 짚신을 신은 산타클로스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입상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산타클로스 뮤지엄이 나온다. 러시아식 발음인 ‘산 니콜라스(St. Nicholas) 뮤지엄’이란 푯말도 눈에 띈다. 들어가는 입구는 첨단 보안기를 통과하느라 사람들로 붐볐다. “기독교 시설이기에 테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뮤지엄 측 설명이다. 뮤지엄 앞쪽에 늘어선 가게들은 크고 작은 산 니콜로 아이콘으로 덮여 있다. 리도 교회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 가로 30㎝ 크기의 산 니콜로 아이콘 가격은 20유로 선이다. 손으로 직접 그린 비잔틴풍 초상화다. 5유로에 파는 작은 성모 마리아 아이콘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아이콘 가게라면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러시아어로 된 각종 설명서를 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산타클로스 뮤지엄을 찾는 관람객의 90% 이상이 러시아권 관광객이라고 한다. 그리스정교에서도 산 니콜로를 특별하게 대하지만 러시아정교를 믿는 러시아권의 방문 열기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터키에 대한 종교적·민족적 반감 때문에 미라에 직접 들르는 그리스인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산 니콜로의 유해를 아예 훔쳐서 리도에 보관하고 있는 이탈리아인들은 터키까지 올 이유도 없을 듯하다.

산타클로스라고 하면 눈(雪)과 루돌프 사슴이 떠오른다. 하지만 고향에서 보는 산 니콜로는 그 같은 이미지와 한참 떨어져 있다. 먼저 눈의 경우, 미라 주변 바닷가에서 눈을 만난다는 것은 1000년에 한 번 정도 있을 법한 기적에 가깝다. 사실 리디아 문명은 눈과 함께한 문명이기는 하다. 그러나 눈 속에서의 생활이 아니라 눈 덮인 높은 산을 배경으로 한 문명과 문화가 리디아의 특징이다. 그리스에도 해당하지만 지중해와 에게해의 주변은 높은 산으로 막혀 있다. 더불어 사시사철 뜨거운 햇볕으로 불탄다. 눈은 바다에서 내륙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높은 산꼭대기의 풍경일 뿐이다. 리디아인은 설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농업용수와 식수로 활용했다. 미라의 명물이기도 한 오렌지는 높은 산에서 내려온 물을 이용해 만들어진 100% 청정 자연산이다. 굳이 산 니콜로의 이미지를 찾는다면 눈이 아닌 오렌지가 더 적격일 듯하다. 산 니콜로도 식수용으로 눈을 대했을 뿐 썰매를 타고 달릴 정도의 눈, 나아가 뿔이 길게 달린 사슴은 아예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추측건대 썰매나 사슴을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뮤지엄 정면에는 산 니콜로의 또 다른 입상이 하나 더 들어서 있다. 역시 검은색으로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이다. 수염을 기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페르시안 느낌이 든다. 선물로 보이는 포대 자루를 어깨에 메고 있다. 가게 앞에서 본 입상보다는 ‘자선’의 이미지가 강하다. 세계 각국의 깃발이 입상 바로 밑에 빼곡히 꽂혀 있다. 태극기도 보인다.

4세기 기독교 교회의 흔적

‘산타클로스 뮤지엄’ 입구에 세워진 산 니콜로 입상.
‘산타클로스 뮤지엄’ 입구에 세워진 산 니콜로 입상.

뮤지엄 안으로 들어서자 십자가보다 건물 뒤편에 선 이슬람사원의 첨탑이 먼저 보인다. 터키 정부가 운영하는 탓이겠지만 외부에 드러난 십자가는 아예 없다. 바깥쪽 이슬람사원 주변에는 탐스럽게 달린 노란 오렌지 나무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뮤지엄으로 변한 수도원은 예배 본당과 부속시설만으로 이뤄진 단출한 구조다. 산 니콜로 생전의 모습을 재현하려 했지만 4세기 교회가 아닌 10세기 비잔틴 스타일 건물로 비쳐진다. 벽에 그려진 성화 역시 좌우 비대칭 형식의 비잔틴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15세기 비잔틴 대제국 멸망 이후 무슬림에 의해 지배된 탓이겠지만 벽화의 거의 대부분이 훼손돼 있다. 기적적으로 예수의 얼굴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벽을 자세히 보니까 금속체로 긁은 듯한 작은 십자가 문양들이 촘촘히 수없이 새겨져 있다. 십자군으로 미라에 온 기사단들의 흔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창문은 초기 교회 건물을 이해하는 실마리다. 중세 이전의 교회에서 보듯 밖으로 연결된 창문이 하나도 없다. 가로·세로 10㎝ 크기의 외부정찰용 구멍만 몇 개 보인다. 안의 구석구석을 살피는데 갑자기 바깥에서 코란을 읽는 소리와 기도 소리가 울려퍼진다. 4세기 기독교 교회의 흔적 속에서 듣는 절규하는 듯한 코란이다. 터키인들도 모른다는 아랍어로 외치는 코란 기도다. 무슬림들이 하루 다섯 번씩 행하는 코란 기도는 신을 찾아 헤매는 보통 인간들의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평화·희망·사랑을 염원하는 무슬림의 기도 소리는 아직 신에게는 미치지 않은 듯하다. 미라에서 300㎞ 떨어진 시리아에서의 잔인한 참상은 해를 넘겨도 계속될 전망이다. 미라를 찾은 바로 다음 날에는 터키 주재 러시아대사가 22살 현직 터키 경찰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돕는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미술관에서의 대사 암살’이란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비화한 것이다. 현재 터키는 어지러울 정도로 아주 많이 흔들리고 있다. 신이 답을 주는 그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코란 기도를 들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요즘은 산타클로스를 믿는 어린이들이 극소수라고 한다. 필자의 9살 조카딸도 “학교에서 산타클로스가 진짜 있다고 말했다가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필자가 전에 “산타클로스가 진짜 있다”고 말해준 것을 그대로 믿고 친구들에게 힘주어 말했다고 한다.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럴수록 산타클로스가 더 있다고 조카딸에게 우겼다. 뻔뻔스럽고 척박한 현실 때문인지 하늘도 부정하고 천벌도 믿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지금의 허연 수염과 빨간 볼의 산타클로스는 자본주의의 총아 코카콜라가 만들어낸 신기루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산 니콜로, 산 니콜라스, 산타클로스, 노엘 바바. 무엇으로 칭하든지 초등학교 시절 밤새 기다렸던 그의 흔적을 지금도 굳게 믿으며 가슴속 깊이 간직해 둔다.

1931년 코카콜라 광고에 처음 선보인 산타클로스 캐릭터.
1931년 코카콜라 광고에 처음 선보인 산타클로스 캐릭터.

산타클로스의 유래

산타클로스 캐릭터는 코카콜라가 1931년 만들어

산 니콜로가 긴 수염에다 빨간색 코트를 입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변신한 것은 19세기 초반부터다. 정확히 말해 1823년이 산 니콜로가 산타클로스로 데뷔한 기념비적 해이다. 계기는 이때 발표된 단 한 편의 시에서 시작됐다. 미국 어린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산 니콜라스의 방문(A Visit From St. Nicholas)’이란 제목의 시 때문이다. 뉴욕 출신 작가이자 역사가인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Clement Clark Moore)의 작품으로, 원래 자식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든 스토리를 바탕으로 쓴 시이다. 예수 탄생 심야의 분위기를 눈, 사슴, 양말, 굴뚝, 선물 등으로 연결해 어린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시로 쓴 것이다. 21세기 산타클로스의 모든 이미지는 이 무어의 시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왜 무어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주체를 산 니콜로로 잡았을까. 멀고 먼 나라의 성인인 산 니콜로를 선물 천사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무어 자신이 그리스 문명사에 해박하고 더불어 기독교도로서 기독교 연구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는 점이 배경이라 볼 수 있다. 멀고 먼 터키 미라의 성인이 생전에 행한 것으로 알려진 ‘독특한 자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산 니콜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산 니콜로는 원래 부잣집 아들로 신부가 된 사람이다. 교회를 꾸려나가는 동안 주민들에게 돈이나 선물을 자주 줬다. 당시 자존심이 셌던 미라 주민들은 그가 직접 전달하는 공짜 선물을 기피했다고 한다. 산 니콜로는 꾀를 내어 지붕의 굴뚝 속으로 돈이나 물건을 던졌다고 한다. 특히 산 니콜로는 어른보다 어린이를 위한 작은 선물을 많이 구입해 던졌다.

산 니콜로가 생존해 있던 4세기 당시 어린이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어른도 굶어죽는 판국에 어린이 정도는 관심 영역 밖이었다. 예수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특별히 강조한 것도 그 같은 배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예수 사후 300년이 흘렀지만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산 니콜로의 어린이에 대한 선행은 당시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렵던 ‘예수 사랑’의 실천이기도 했다. 그리스·로마 역사와 종교사에 박식한 무어는 산 니콜로만의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 시로 옮긴 것이다.

1931년은 무어의 시가 만들어낸 산타클로스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벗어나 지금과 같은 캐릭터로 탄생한 해이다. 1931년 코카콜라 광고에서 처음 선보인 산타클로스가 21세기까지 이어지는 유명한 캐릭터가 됐다. 빨간 코트와 모자를 쓴 뚱뚱한 몸매의 흰 수염 할아버지, 빨간 빛을 발하는 루돌프 사슴과 썰매, 양말에 담긴 선물…. 코카콜라의 역사는 바로 산타클로스 진화사인 동시에 산타클로스의 글로벌화로 통한다. 호감도 120%의 캐릭터를 통해 코카콜라는 물론 산타클로스가 20세기 초반부터 세계적 상품이 된 것이다. 반미(反美)를 외치는 사람들은 코카콜라를 ‘제국주의의 화신’으로 해석한다. 코카콜라보다 산타클로스를 더 미워하는 것이 반미 논리에는 한층 더 어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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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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