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it

열정적 끈기의 힘.

영영사전은 ‘determination and courage(결단력과 용기)’.

우리말 어학사전은 ‘투지, 기개’로 정의한다.

‘그릿(grit)’이라는 성공방정식이 주목받고 있다. ‘열정적 끈기의 힘’을 의미하는 ‘그릿’은 재능보다 노력의 힘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지난해 10월 말에 출간된 한국어판 ‘그릿’(비즈니스북스)은 불과 2개월 만에 10만부를 돌파했다. 지난해 발간된 자기개발 분야 서적 중 최단기간에 이룬 성적이다. 학원가에서 열광하는 분위기를 보면 20만부 돌파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IQ지수처럼 ‘그릿지수’를 검사하는 연구소도 생겼고, 교육학자와 경영학계에서는 그릿을 흥미롭고 새로운 성공공식처럼 받아들이는 모양새다.

앤젤라 더크워스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의 ‘그릿’은 분명 대단한 책이다. 책 결과물 자체가 ‘그릿’스럽다. 저자는 탁월함을 보이는 사람들의 고유한 특징이 무엇인지를 파헤치기 위해 어마어마한 사례를 모으고 연구와 조사를 거듭했다. 책 말미에 덧붙인 빼곡한 주석만 50쪽에 달한다. 저자의 이력 또한 빵빵하다.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신경생물학 연구로 수석 졸업 후 세계적 컨설팅업체 매킨지에서 고액연봉을 받는 컨설턴트로 일했다. 그랬던 그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공립학교 교사를 자처한다. 수학을 가르치면서 그는 수학을 잘하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차이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인생의 성공에 있어서 IQ와 재능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탁월함의 비밀’을 파헤친다. 그 결과물이 ‘그릿’이다. 이 연구로 그는 ‘천재들의 상’으로 불리는 맥아더상을 받았다.

방대한 연구에 비해 결론은 지극히 단순하다. ‘성취=재능×노력²’이 바로 그것. 아무리 아이큐가 높아도,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도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재능은 두 배로 갖고 있지만 노력은 절반만 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과 같은 기술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릿’은 ‘노력’의 다른 이름이다. ‘그릿’을 우리말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영영사전은 ‘grit’을 ‘determination and courage’로 정의한다. ‘결단력과 용기’ 정도가 될 듯한데, 우리말 어학사전은 ‘투지, 기개’로 정의한다.

이 책에 쏟아지는 찬사는 차고 넘친다. 전 세계 32개국에서 동시출간되어 ‘아마존’과 ‘뉴욕타임스’에서 25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버락 오바마,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등 전 세계 리더들이 극찬했다. 책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없다.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재원답게, 매킨지 출신답게 저자는 방대한 연구를 탄탄한 논리력으로 풀어나간다. 타고난 재능이 없더라도 노력만 하면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는 많은 이들에게 동기부여가 된다. 서평을 봐도 ‘이 책을 보니 재능만 믿고 노력을 덜 했다는 반성이 듭니다’ 식의 자기성찰이 줄을 잇는다.

여기에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문제제기를 해보려 한다. 이 책은 철저하게 ‘탁월성’에 맞춰져 있다. 모두가 탁월해지기를 원하고, 또 모두가 탁월해지기 위해 열정과 투지를 불태워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정작 ‘왜?’가 빠져 있다. 왜 모든 개인이 탁월성을 향해 돌진해야 하는지, 개인의 탁월성이 과연 미래사회의 인재상에 맞는지는 논외(論外)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그릿’에 대해 “노력지상주의의 왜곡된 활용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재능보다 노력을 강조하는 ‘그릿’은 긍정주의 심리학자들을 포함한 노력주의자들에게는 호감을 줄 수 있다. 또 우리나라는 ‘하면 된다’ ‘한강의 기적’ 같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정신이 뿌리 깊이 박혀 있으므로 이런 이론이 반가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시대적 변화다. 지금은 단지 ‘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방향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노력 곱빼기만 강조하는 이론은 아이들에게 통하지 않을 뿐더러 어떤 의미가 있을지 걱정된다. 노력지상주의의 왜곡된 활용은 자칫 아이들에 대한 공부 학대로 귀결될 수도 있고, 노력혐오주의자를 양산할 수도 있다.”

아침형 인간, 마시멜로 이야기, 아웃라이어, 그릿

기시감도 든다. 한때 우리는 ‘마시멜로 이야기’의 성공법칙에 열광했다. 미취학 아동이 있는 집이라면 아이 앞에 달콤한 초코파이 혹은 사탕이나 캐러멜 두 개를 갖다 놓고 “지금 먹으면 한 개를 먹을 수 있지만 꾹 참으면 두 개를 다 먹을 수 있어”라며 시험에 들게 하는 장면이 흔했다. 아이가 당장 두 개를 먹었다면 “우리 애는 절제력이 없으니 성공하긴 글렀다”며 절망했고, 달콤함의 유혹을 이겨냈다면 장차 대성할 아이라며 손뼉치며 좋아했다.

‘아침형 인간’에 열광하던 때도 있었다. 성공하려면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면서 전국 열도는 여기저기에서 새벽 알람 소리가 급증했다. 아침에는 해롱대다가 밤이 되면 극도의 집중력을 보이는 ‘저녁형 인간’, 소위 ‘올빼미족’들은 기가 팍 죽었다. 1인 출판사였던 한스미디어가 ‘인생을 두 배로 사는 아침형 인간’을 100만부 넘게 팔면서 사세를 확장한 사례는 출판계의 유명한 일화다. 이후 엇비슷한 책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아침형 인간 성공기’ ‘아침형 인간의 24시간 활용기’ ‘아침형 인간 10살 전에 끝내라’ ‘어린이를 위한 아침형 인간 되기’ 등도 출간됐다.

몇 해 전에는 ‘아웃라이어’ 열풍으로 들썩였다. 마법의 숫자, ‘1만시간의 법칙’은 매혹적이었다. 누구든 어떤 분야에서든 1만시간을 투자하면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아웃라이어’가 될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인 관점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며 하루에 몇 시간을 투자해야 1만시간이 채워지는지 계산기 두드리면서 살아가는 계량형 노력주의자들을 낳았다.

지금은 어떤가? ‘마시멜로 이야기’는 실험조건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고, ‘아침형 인간’은 저녁형 인간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아침형 인간보다 저녁형 인간이 고액 연봉을 받는 직업에 더 많이 종사한다’는 새로운 연구결과 앞에서 수그러들기도 했다. ‘아웃라이어’도 마찬가지. 연구대상을 바꿔 폭넓은 조사를 한 결과 그렇지 않은 성공 케이스가 더 많다는 것을 밝혀낸 후속연구가 뒤따랐다.

조금 더 들어가보자. ‘마시멜로’ 실험대상자 653명은 모두 스탠퍼드캠퍼스 부설 빙너스스쿨에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동일집단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로 일반화했다는 비판을 면키 힘들다. 또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의 다양한 변인을 무시했다는 비판도 있다. 아이들 중에는 특별히 더 배가 고픈 아이도 있고, 마시멜로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도 있고, “나중에 오면 두 개를 주겠다”는 어른의 말을 믿지 않아서 하나라도 먼저 먹어치운 아이도 있는데 이런 요건은 고려하지 않았다. 2013년 미국의 로체스터대학교 연구팀은 저명한 학술지 ‘인지(Cognition)’에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더 오래 기다리는 경향이 있지만,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마시멜로를 빨리 먹어치운 경향이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참을성’은 성공의 조건이라기보다 수많은 요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침형 인간’의 성공공식은 더 거세게 공격받았다. 저녁형 인간 중에는 아침형 인간 못지않게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토머스 에디슨, 나폴레옹, 어네스트 헤밍웨이 등이 아침형 인간이라면 찰스 다윈, 버락 오바마, 윈스턴 처칠 등은 저녁형 인간이었다. 저녁형 인간이 아침형 인간보다 더 영리하며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더 높다는 몇몇 연구도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대 심리학과 연구팀은 12~16세 청소년 887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저녁형 학생들이 귀납추리능력이 더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성적은 아침형 학생들이 더 높았다. 이 또한 실험변인에 문제가 있다. 저녁형 인간들은 밤에 집중력이 더 높은데, 대부분의 시험은 오전에 치러지므로 아침형 인간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력만능주의에 일조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도 후속 연구의 공격을 받았다. 미국·영국·호주의 공동연구진은 ‘꾸준한 연습만이 전문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피력했다. 체스와 음악 분야를 대상으로 한 기존 연구들을 분석한 결과, 1만시간의 노력으로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은 체스 분야에서 34%, 음악 분야에서 29.9%에 불과했다. 나머지 70% 정도는 1만시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재능 요소를 무시하고 ‘할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무조건 1만시간을 쏟아부었다가는 헛고생이 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명료한 성공방정식들은 대부분 환원주의의 오류가 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의 성공요인은 복잡다단하다. 지능과 성격, 유전자, 환경, 훈육법, 시작 연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자기계발 전문가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특성을 단순화·공식화하는 데 선수들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일부를 추출해 마치 그것이 결정적인 단 하나의 성공방정식인 듯 포장해내는 데 귀재다. 그들의 논리를 잘 보면 ‘상관관계’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독자 등 수용자들은 ‘인과관계’로 받아들이기 일쑤다. 즉 책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은 이러이러한 특성이 있다’고 하지만 수용자들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릿’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연구에서는 탁월성을 발휘한 사람 중 피나는 노력을 발휘한 사람들만 근거로 삼은 경향이 강하다. 또한 그릿은 새로운 용어로 인한 착시현상이지 새로운 이론은 아니다. 김현수 교수는 “기존의 학계 이론에 개념을 하나 추가한 것일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릿은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 마무리를 지을 줄 아는 힘이 성공의 열쇠라는 것을 다른 시각에서 조명한 것뿐이다. 탁월성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재능과 노력이라는 변수가 동시에 작용해야 하고, 그중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강조돼왔다. 그릿은 노력만능주의에 일조하는 퍼즐 한 조각이 될 정도다.”

그릿이 시대의 인재상에 맞을까?

개인의 탁월함을 전제로 한 그릿이 과연 현 시대의, 다음 시대의 인재상에 부합하는지도 의문이 든다. 4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미래 산업 변화의 핵심적 기조는 다양성과 협업(協業)이다. 골방에 갇힌 탁월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내기 힘들다는 얘기다. 또한 우리는 영혼 없는 탁월성을 지닌 개인이 힘을 가졌을 때의 위험을 숱하게 봐왔다. 김현수 교수는 “개인적 탁월성이 집단과의 협업에서 발휘되지 않는다면 집단에는 해악이 될 수도 있다. 타자가 없는 주체만의 성공이론은 이미 충분히 개발되어 있다. 그릿이 집단의 탁월성에도 기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그릿’이 사회적 여건이 배제된 채 소위 ‘노력’만 강요한다는 인상도 지우기 힘들다. 개인의 노력만 강조하는 성공이론은 실패의 귀인을 사회가 아닌 개인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는다. 일자리 부족으로 인해 아무리 노력해도 취업하기 힘든 취준생에게 그릿 이론은 “노력이, 열정이, 투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좋은 근거를 제공한다.

‘그릿’에 특히 열광하는 것은 학원가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 있는 고등학생 대상 M입시학원에서는 학부모 설명회에서 “학원생들에게 그릿 정신을 고취시키겠다” “그릿을 주제로 강연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고, 서울 대치동에 있는 W보습학원에서는 특목고 학생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면서 “동기부여에도 도움이 되고, 추후에 자기소개서에 활용하기에도 용이하다”고 했다. 그릿은 코칭전문가나 학원가 등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하기에 좋은 소재다.

‘그릿’이 훌륭한 성공이론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훌륭해도 끝까지 해내는 힘이 없으면 탁월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는 그릿의 교훈은 각자가 가진 재능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갈 수 있도록 추동하는 동기부여가 된다. 그러나 그릿이 성공방정식의 정답으로 굳어지는 것에는 반대한다. 노력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의 손에 ‘그릿’이라는 퍼즐 조각이 쥐여지면 또 하나의 채찍이 될 수 있다. 한 개인이 탁월성을 발휘하는 데에는 개인의 노력이 전부가 아니다. 그 노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성장환경, 사회적 여건 등의 조건이 맞물려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 길을 무조건 끝까지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길이 내 길이 아닐 때에는 과감히 되돌아 나올 줄 아는 용기와 지혜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

21세기는 집단지성의 시대다. 개인의 탁월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집단과의 협주(協奏)가 가능한 탁월성에 가치부여를 해야 한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탁월함은 협력의 탁월성”이라는 김현수 교수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함은 배제가 아니라 통합, 소외가 아니라 다양성, 독자적인 방식이 아니라 융합적 방식을 필요로 한다. 21세기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많은 일들의 작동방식이 그렇다. 아이들에게 요구해야 할 탁월성은 다양성 속에서의 탁월성이고, 그 탁월성으로 인류에 기여하고 이바지할 수 있는 탁월성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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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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