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반(反)글로벌리즘이 표면화될 것이라고들 한다. 트럼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사실 역사적 흐름으로 판단한다면 트럼프의 등장은 한참 뒤늦은 것인지 모른다.
지구를 하나의 기준으로 묶어 버리려는 글로벌리즘에 대한 반발은 이미 20세기 말 나타났다. 1986년 탄생한 슬로푸드(slow food) 운동도 그중 하나다.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방에서 시작된 새로운 식(食)문화 운동으로, 1950년대부터 미국에서 본격화된 패스트푸드에 대한 대항 논리였다. 슬로푸드는 현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재료로 한 수제요리를 의미한다. 화학재료를 배제하고, 공장에서 만드는 대량생산품이나 냉동음식을 부정하는 식문화다. 냉장고나 전자레인지 사용도 가급적 피한다.
슬로푸드 운동의 기원이 된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은 슬로푸드의 천국인 동시에, 맛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가슴이 설레는 미식의 고장이기도 하다. 슬로푸드의 기점이 된 피에몬테 지방 일부가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다는 얘기는 너무도 당연하게 와닿는다.
구체적으로 슬로푸드 발상지는 피에몬테의 랑게-로에로-몬페라토(Langhe-Roero and Monferrato·이하 LRM)를 잇는 거대한 지역으로, 이탈리아 최고 수준의 와인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이탈리아 최고급 와인의 대명사인 바롤로(Barolo)와 바르바레스코(Barbaresco)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LRM은 2014년 세계문화유산 선정 이전에도 이미 두 차례나 방문했던 곳이다. 당시에는 와인에 빠져들던 시기였기에, 슬로푸드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세계문화유산 선정 소식을 알았을 때 슬로푸드라는 키워드를 통해 LRM을 재음미해 보자는 생각을 굳혔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어떤 안경을 쓰는지에 따라 세상이 달리 보인다.
LRM 방문은 지난해 12월 31일부터 시작된 여정이었다. 1월 1일 신년 첫날 피에몬테 지방의 수도 격인 토리노(Torino)의 두오모(Duomo)에 들러 신년인사를 한 뒤, 곧바로 LRM으로 달려갔다. 토리노 남동쪽에서 50㎞ 떨어진 아스티-바롤로-바르바레스코-카부르(Cavour)-몬페라토-바르베라(Barbera) 등을 돌아봤다. 구석구석 관찰하는 동안 사흘이 흘러갔다. LRM의 전체적인 인상은 조용하다. 겨울이어서 관광객도 거의 없다.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어딜 가나 작은 산이 보인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비슷비슷하지만 넉넉한 풍광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산 사이의 계곡은 하루 종일 옅은 운무(雲霧)로 뒤덮여 있다. 일교차가 심하다는 의미다. 포도가 자라기에 좋은 기후와 지형이다.
레스토랑 ‘라 피오라’
슬로푸드는 ‘슬로 라이프’가 탄생시킨 결과물이기도 하다. LRM의 특징이지만 서두름이나 바쁨과는 거리가 먼 동네들이 이어진다. 시간이 멈춘 곳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LRM 지역의 집들은 대부분 산꼭대기에 들어서 있다. 이탈리아 도시의 풍경은 어디에 가도 비슷하다. 교회를 중심으로 관청·병원·도서관·학교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 LRM 도시들의 또 다른 공통점 중 하나는 동쪽을 향해 서 있는 전사자 기념비다. 동네마다 산꼭대기 한가운데에 기념비가 들어서 있다. 2차대전서 패한 전범국이지만 희생자를 잊지 않고 이름 하나하나를 전부 기록해 마을 한복판에 세워두는 나라가 이탈리아다.
현장 체험은 슬로푸드의 의미를 알기 위한 기본이다. 바로 레스토랑 탐방이다. LRM를 돌아다니면서 슬로푸드의 면면을 하나씩 살펴봤지만, 가장 눈에 띈 곳은 알바(Alba)에서 들른 레스토랑 ‘라 피오라(La Piola)’였다.
라 피오라는 슬로푸드 지역 전체를 통틀어 인기 정상을 달리는 곳이다. 연일 만원이어서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지만, 갑자기 다른 손님의 예약이 취소되면서 운 좋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슬로푸드를 대표하는 음식은 송로버섯인 트러플(이탈리아어로는 타르투포)이다. 트러플은 화이트·블랙 두 종류가 있다. 블랙 트러플만으로도 감지덕지하지만 미식가라면 화이트에 매달린다. 맛이 아니라 향이란 측면에서 화이트는 블랙의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크기에 따라 가격도 대략 5배 정도 차이가 난다. 라 피오라는 1월의 화이트 트러플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레스토랑이다. 필자가 찾은 날, 손님들 대부분도 30유로나 하는 화이트 트러플 파스타를 먹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메뉴를 보면서 주목한 부분은 달팽이 문양과 함께 새겨진 ‘슬로푸드 프레시디아(Presidia)’라는 글귀였다. 피에몬테 브라(Bra)에 본부를 둔 세계 슬로푸드협회(www.fondazioneslowfood.com)가 벌이고 있는 ‘특수농산물 생산자 보호’를 위한 문양이다. 특별한 생산자가 키운 특별 재료로 만들어진 요리라는 의미다. 달팽이 문양이 상징하는 전 세계 특수농산물 생산자는 1만3000여명이라고 한다. 라 피오라 메뉴판에서 달팽이 문양을 발견했다는 것은 이곳이 슬로푸드 협회 소속 레스토랑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 슬로푸드협회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7만8000여명의 회원 레스토랑을 거느리고 있다.(2016년 기준) 슬로푸드는 지역성에 기초한 운동이지만, 참가자는 글로벌 차원이다. 보호 대상인 특수농산물 생산자 역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 농민들도 포함된다.
슬로푸드의 파워는 전위병 역할을 하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 먹거리의 총판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 중이다. 바로 ‘잇탈리(Eataly.com)’다. ‘먹다(Eat)’와 ‘이탈리아(Italy)’를 합성한 잇탈리는 이탈리아산 음식 백화점이자 슬로푸드 운동의 최대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국가의 개입 없이 철저하게 민간 비즈니스 차원에서 발전한 조직으로, 현재 이탈리아를 포함해 전 세계 9개 나라에 34개 매장을 가진 초대형 식품유통회사로 성장한 상태다.(2016년 기준) 한국은 이미 잇탈리가 진출한 9개 나라에 포함돼 있다. 규모가 작은 분점 스타일이지만, 2년 전 한 대형 백화점을 통해 서울에 진출해 있다.
필자가 잇탈리에 주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슬로푸드라는 측면과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소프트파워의 본보기란 점에서다. 음식을 국가 차원의 소프트파워로 활용하는 이탈리아인의 지혜와 전략을 잇탈리를 통해 절감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소프트파워를 느낄 수 있는 잇탈리는 과연 어떤 곳일까? LRM을 돌아본 직후 잇탈리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