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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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 주부 김소영씨는 10여년 만에 시집을 샀다. 필사 시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지난 1월 말 끝난 tvN 드라마 ‘도깨비’에서 촉촉한 장면에 이 시집이 등장한 것을 보고 충동구매하듯 샀다. 김씨는 “필사가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효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 했다. 막상 해보니 놀라운 힘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필사책 쓰기’가 취미생활이 됐다. 자기계발, 영어공부, 고전 관련 필사책을 줄줄이 구입해 틈틈이 필사하고 있다. 지인들에게도 선물용으로 구입하는 등 최근 3개월 동안 그가 사들인 필사책은 10권이 넘는다.

필사책 열풍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해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필사책 열풍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양상이다. 김용택 시인이 엄선한 시 101편을 담은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는 종합베스트셀러 1위를 몇 주째 지키고 있다.(교보문고 1월 4주 기준) 드라마 ‘도깨비’가 종영된 이후에도 열풍은 가라앉지 않는다. 이 열풍에 힘입어 아예 김용택 시인의 필사책 시리즈가 줄지어 출간 중이다. ‘어쩌면 별들이…’는 두 권짜리 세트로 나왔고, 김용택 시인의 어른을 위한 동시 필사책 ‘내가 아주 작았을 때’, 김용택 시인의 태교 필사책 ‘아가야, 너는 나의 햇살이야’도 발간됐다.

지난해 12월 교보문고는 필사코너를 별도로 마련했다. 필사책의 장르도 다양하다. 윤동주 시인을 내세운 필사책 등 시집이 가장 많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공자의 ‘논어’ 등 동서양 고전의 주옥 같은 구절을 쏙쏙 뽑아 만든 필사책도 줄을 잇는다. 사고혁신연구소 김시현 소장의 ‘필사, 쓰는 대로 인생이 된다’, 마인드파워 전문가 조성희씨가 쓴 ‘뜨겁게 나를 응원한다’ 등 자기계발 필사서가 있고,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되는 ‘하루 10분 영어 필사 긍정의 한 줄’, 여성학자이자 자녀 교육전문가 박혜란씨가 쓴 ‘엄마공부’도 필사책으로 출간됐다.

필사책은 책을 사지 않았던 사람들의 지갑을 여는 힘을 지녔다. 서평을 봐도 오랜만에 책을 샀다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 시집을 샀다”는 서평이 있는가 하면 “선물로 주면 너무 좋은 아이템” “시를 멀리하다가 가까워질 기회를 찾았다” 등의 서평도 있다. 책을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대여해서 읽는 도서관 VIP고객도 이 책만은 구입한다.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손으로 쓰면서 읽는 책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의 검색 창에 ‘필사’ 키워드를 치면 100여권이 넘는 필사 관련 책들이 주르르 나타난다.

컬러링북과 닮은꼴

필사책 열풍은 컬러링북 열풍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2년 전쯤 컬러링북 열풍이 대단했다. 어른들을 위한 색칠공부인 컬러링북은 치유의 기능을 톡톡히 했다. 정해진 칸에 색을 칠해 넣는 컬러링북은 뜨개질이나 선 따라 긋기처럼 지극히 단순한 활동이다. 복잡한 사고를 담당하는 좌뇌의 기능은 잠시 쉬고, 감성을 자극하는 우뇌를 활성화함으로써 행복감을 가져다준다는 게 컬러링북 예찬론자들의 말이다.

컬러링북 열풍이 시들해진 자리를 필사책 열풍이 꿰찬 모양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필사책 열풍은 컬러링북 열풍과 닮은꼴”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컬러링과 필사는 잡생각에서 벗어나 행위 자체에 몰입하게 한다. 걱정과 근심, 불안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역할을 하므로 힐링의 효과가 있다. 또한 둘 다 사소한 성취에서 얻는 만족감도 있다. 컬러링북은 선을 따라 알록달록한 색을 채워가면서, 필사책은 나만의 손글씨로 좋은 글귀를 따라 쓰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필사의 효과는 컬러링북보다 한 수 위다. 필사의 효과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각도로 검증됐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지름길이 좋은 글 베껴 쓰기, 소위 ‘명문 필사’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 없다. 타인의 명문장 따라 쓰기는 뇌를 깨우는 행위이자, 타인의 표현을 나의 표현으로 육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하루 일곱 자루의 연필을 해치우면서 필사를 했다고 전해지고 소설가 신경숙, 시인 안도현도 습작시절에 지독한 필사를 통해 글쓰기 훈련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시인 안도현은 “필사는 손가락 끝으로 고추장을 찍어 먹어 보는 맛”이라고 비유했고, 소설가 조정래는 “필사는 열독 중의 열독이다. 소설을 옮겨 쓰는 것은 백 번 읽는 것보다 나은 일이다”라고 말했다.

글쓰기 훈련을 위한 필사책들도 즐비하다. 시인 장석주가 낸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은 시, 소설, 수필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명문장을 뽑아 엮었고, ‘나의 첫 필사노트’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이상의 ‘날개’, 김유정의 ‘봄봄’의 멋진 구절을 묶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필사한 독자는 이런 서평을 남겼다. “내가 생텍쥐페리라고 생각하면서 ‘어린왕자’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썼습니다. 읽고 따라하기를 반복하니 나도 모르게 문장력이 느는 느낌이 듭니다.”

대부분의 텍스트가 디지털로 치환되는 시대, ‘손글씨의 매력’을 강조한 필사책은 분명 시대를 역행하는 기현상이다. 필사책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디지털 세대가 많다. 디지털의 속도와 편리함에 젖은 이들이 왜 느리고 불편한 필사책에 마음을 빼앗길까.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디지털과는 다른 아날로그의 가치와 쾌감”으로 설명한다. “한때 다꾸놀이(다이어리 꾸미기 놀이)가 유행했고, LP판이 다시 각광받고 있다. 종이노트에 손으로 음표를 그려넣어 작곡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형형색색 펜을 이용해 손글씨로 다이어리에 적고, LP판을 일일이 닦아 바늘을 올리는 행위는 분명 불편하다. 그러나 의도된 불편함이다. 약간의 수고로움을 동반한 불편함은 아날로그의 매력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의 가치는 여전하며, 약간의 옷만 갈아입은 채로 변형, 진화된다.”

필사책의 열풍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지식과 정보가 판박이처럼 손쉽게 복제되는 시대일수록 ‘고유성’의 가치는 빛을 발한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손글씨 필사책’이 특별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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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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