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
[2444호] 2017.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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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130년 전 서양 언론에 비친 비운의 땅 조선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생생한 현장 담은 화보집 출간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史  

조선은 19세기 중엽까지 서구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금단의 나라’(Ernest Oppert·1880), ‘은자의 나라’(William Elliot Griffis·1882)로 불렸다. 함축적인 표현은 “가장 덜 알려지고 가장 적은 사람들이 찾아온 나라”(C.N Curzon·Problems of Far East·1894)였다.
   
   청일전쟁 직후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1894년 8월 4일)는 이렇게 보도했다.
   
   “조선은 동아시아의 큰 반도이며 중국의 황해와 일본열도 사이에 위치한 북태평양 국가로, 몽골리안 종족의 단일민족으로 격리되어 있다. 이들을 야만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현대 문명을 가장 적게 받은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구상에서 이만 한 크기의 지역 가운데 유럽의 진보적인 영향에서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 나라는 과거 수세대 동안 외국과의 모든 상업적 교류를 거부해왔으며 주변 강대국들의 사상과 관습에 대해서도 저항해왔다.”
   
   한반도를 둘러싼 세 강대국 일본·중국·러시아는 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과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으로 대결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서양 언론은 한국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서 전황(戰況) 취재를 위해서 찾아오는 특파원들이 늘어났다. 서양 언론은 당시 한국의 모습을 그림과 사진으로 남겼다.
   
   전쟁은 우리 땅에서 벌어졌지만 주인은 우리가 아니었다. 1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우리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는 달라지지 않았고,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는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전쟁기술과 통신의 발달에 호전적인 북한의 위협까지 더해져서 주변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
   
   
한국인 마을을 약탈하는 러시아군(46쪽) 코사크족 출신의 기마병들이 국경 부근의 한국인 마을을 습격하고 있다. 길거리에는 돼지, 닭들이 놀라 도망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은 목숨을 구걸하는 듯 땅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모습이다. 이 화보가 실린 것은 1904년 3월 27일. 시기적으로는 러일전쟁 초기니까 아마도 코사크족 출신 러시아군들이 식량 약탈을 위해 마을을 습격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르 프티 주르날 1904년 3월 27일

   역사의 엄중한 교훈
   
   이번에 출간된 ‘잊어서는 안 될 구한말의 비운’은 나라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기울던 무렵의 생생한 장면들을 담은 화보집이다. 컬러 화보가 많아서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하는 자료다. 편저자 신용석은 조선일보 프랑스 특파원을 지낸 언론인이다. 특파원 시절에 이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는 19세기 말의 청일전쟁과 20세기 초에 벌어진 러일전쟁 시기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과 당시의 풍물, 전쟁 장면 등을 발굴하여 한·프랑스 수교 100주년이었던 1986년에 조선일보 주최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 100년 전에 서양 특파원들이 화면에 담았던 조선의 풍경을 프랑스 특파원 신용석 기자가 파리에서 찾아내어 공개했던 것이다.
   
   전시회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반응이 좋았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신용석 기자는 언론계를 떠나 인천개항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으면서 새로운 자료를 더 보완하고 판형과 편제를 바꾸어 이 책을 발행하였다. 청일전쟁 때는 청나라와 일본군의 조선 상륙 지점이 제물포, 즉 오늘의 인천이다. 러일전쟁의 발화 지점도 인천이다. 신용석은 인천 출신 언론인이다.
   
   서양 언론에 비친 당시 조선의 모습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외국 군대의 전쟁터가 된 나라, 열강 군대의 구둣발에 짓밟히고 말발굽에 차이면서도 저항할 힘이 없었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우리는 세계사의 큰 흐름을 외면하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다가 저런 수난을 겪어야 했던가. 자기 땅을 남의 전쟁터로 내어주고 주인 행세를 못 하는 처지에 놓였을까. 주민들은 일본군의 짐꾼으로 끌려가고 의병은 총살을 당하는 상황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또다시 같은 사태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이 화보집은 그래서 ‘잊어서는 안 될 구한말의 비운’이라는 제목을 달았을 것이다.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아야 할 그림들이다.
   
   책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청일전쟁 ②러일전쟁(육상전) ③러일전쟁(해상전) ④외국 언론에 비친 한국 ⑤구한말 정세를 풍자한 해외 만평 ⑥구한말의 외국 특파원들이다.
   
   
서울에 진주하는 일본군(29쪽) 제물포에서는 해전이 끝난 후 인천항을 통해서 상륙한 일본군이 남대문을 통과해서 서울로 진입하는 장면을 그린 역사적인 화보로 러일전쟁 초기의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서울로 무혈입성한 일본군은 평양을 거쳐 정주 전투에서도 기선을 잡고 압록강을 건너서 만주로 진출하여 러시아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남대문 묘사가 실제와는 약간 다르게 되어 있지만 일본군을 응시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르 프티 파리지앙 1904년 2월 28일

   종군화가의 활약
   
   20세기로 넘어서는 시점에 사진술은 실용화 단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서양 신문은 보도사진을 지면 구성의 주요 소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사진 저널리즘 역사의 측면에서 유럽과 미국 잡지의 지면을 비교해 보면 기술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미국 잡지는 주로 사진을 실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도 그림을 많이 활용했다. 유럽은 보도용 그림을 그리는 전문 화가들이 많았던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실용화된 이후에도 필사한 책들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던 사정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사진술의 실용화 이전부터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화보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The Illustrated London News·1842년 창간)와 ‘더 그래픽’(The Graphic·1869)이 창간되었고, 프랑스는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1863), ‘르 프티 파리지앙’(Le Petit Parisien·1876) 같은 화보 잡지가 나타났다. 초기의 화보 잡지는 그림으로 보도사진의 역할을 수행하는 편집방식을 활용하여 인기를 끌었다. ‘르 프티 주르날’은 1890년에 100만부 발행이라는 세계 최초의 기록을 세웠고, ‘르 프티 파리지앙’은 1915년에 200만부를 돌파하는 인기를 누렸다.
   
   오늘날은 간편한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도 어디서건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당시의 카메라는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웠다. 필름 현상 시설까지 갖추려면 수레에 끌고 다니면서 운반해야 할 정도였다. 미국 기자는 코닥(Kodak) 필름을 사용했다. 프랑스 종군기자도 전쟁 장면을 촬영하는 장면이 보이지만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그대로 보도할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차라리 사진기 없이 보도용 그림을 그리는 종군화가가 연필과 종이를 들고 전쟁터로 달려가서 스케치한 장면을 본사로 보내면 본사에 있던 화가들이 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더욱 섬세한 기교를 구사하여 보도용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을 거쳤다. 거기에 색채를 더하면 사실성과 현장감이 뛰어난 그림이 완성되었다. 종군화가가 현장에서 스케치한 그림에 본사 전속화가가 협동하여 그린 모사(模寫)의 기술은 사진을 복사한 것만큼, 또는 그 이상 정확했다. 오히려 사진에 비해서 화가의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현장의 분위기까지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는 효과까지 나타났다.
   
   프랑스, 영국, 미국의 주간 화보 잡지가 다루는 소재는 다양했다. 그 가운데도 전쟁터에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소재가 풍부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 장면, 전쟁 영웅의 멋진 모습, 이국적인 풍경 등은 마치 오늘날 올림픽이나 축구경기처럼 역동성을 띤 장면을 많이 제공해주었고, 기자들은 이를 포착하여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한국은 손대지 말라(139쪽)

   코사크족 러시아군의 약탈
   
   이 책에 수록된 조선의 모습은 미개하고 가난에 찌든 불쌍한 모습이다. 일본군은 근대식 장비를 갖추고 규율이 엄격했다. 서양 군대를 모방하여 복장은 간편하고 기동성이 있으며 장교는 권위를 지녔다. 그러한 일본 군대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조선 사람의 모습은 대조적이면서 너무도 처량하다. 윗도리를 벗은 채 땅바닥에 주저앉은 소년, 벌거벗은 모습으로 엄마 곁에 서서 일본군을 바라보는 아이. 흰 도포에 부채 들고 느긋한 자세로 앉아 있는 대신들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보고도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망국의 길로 가는 다음 단계를 상징하는 것 같다.
   
   제2장과 제3장은 러일전쟁의 여러 장면이다. 청일전쟁 10년 후의 일본군은 편제를 전문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세분하여 포병, 공병, 수병, 헌병, 병참, 의무병 등으로 분화하고 무기는 더 현대화되었다. 군복은 완전히 서구식으로 개량되었으며 군인들의 표정은 자신감에 차 있다. 세종로 큰길에는 러시아 군대, 프랑스 군대, 미국 해병대가 차례로 행진했다. 외국 공사관이 집결한 정동에서 광화문으로 통하는 길 주변은 초가집이 늘어서 있다. 북쪽으로 진군하는 일본군은 평양을 거쳐 평안북도 정주성을 함락하고 압록강으로 전진한다. 일본군을 종군하면서 그린 그림과 러시아군 부대를 종군하면서 보도한 화면은 각기 자신이 속한 군대가 승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코사크족 출신 러시아군 기마병들이 국경 부근 한국인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비참한 장면도 있다. 전투가 아니라 민간인 살해와 약탈이다. 긴 창을 휘두르는 기마병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겁에 질린 한국인들은 목숨을 구걸하는 자세로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맨손으로 본능적인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다. 돼지, 오리와 같은 가축들은 놀라서 우왕좌왕 흩어진다. 평안북도 정주는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육지에서 첫 접전을 벌인 지역이었다. 어린 시절 정주에서 자란 이광수는 러일전쟁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열두 살 되던 해는 계묘년이요, 서력으로는 1903년이었다. 이해 겨울에 러시아 병정이 정주에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는 길로 약탈과 겁간을 자행하여서 성중에 살던 백성들은 늙은이를 몇 남기고는 다 피란을 갔다. 젊은 여자들은 모두 남복을 입었다. 길에서 러시아 마병(馬兵) 십여 명에게 윤간을 당하여서 죽어 넘어진 여인이 생기고, 어린 신랑과 같이 가던 새색시가 러시아 병정에게 겁탈당해 ‘튀기’(혼혈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를 낳고 시집에서 쫓겨나서 자살을 하였다. 소와 돼지가 씨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 어린 나는 우리 민족이 약하고 못난 것을 통분하고 러시아 사람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
   
   
만주에 파견된 특파원(52쪽) 프랑스 신문 특파원이 만주를 이동하는 러시아군을 촬영하는 모습. 타악기를 두드리며 흥겹게 행진하는 군인들이 특파원들의 취재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르 프티 주르날 1904년 6월 5일

   일본군의 의병 처형 장면
   
   일본군은 우리의 의병을 처형했다. 1905년 5월 21일자 ‘라 크로와 일뤼스트레’는 의병 학살 장면을 그린 판화를 게재했다. 일본군은 십자가 형태 나무기둥에 의병 3명을 묶고 눈을 가린 상태로 총살한 뒤에 장교가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제4장 ‘외국 언론에 비친 한국’은 청일·러일 두 전쟁 무렵 서울과 인근의 풍경을 모았다. 청일전쟁 당시 남대문 앞에는 나지막한 초가집들이 불규칙하게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다. 서울에는 몇 개의 넓은 도로를 제외하면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골목에는 오물이 쌓여 있다고 프랑스 신문은 묘사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남대문은 서울을 지키는 출입문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의 위신은 추락한 상태였다. 1896년 9월 26일자 독립신문은 기막힌 이야기를 실었다. 어떤 일본인이 통행금지 시간인데도 닫힌 남대문을 열라고 요구하였으나 지키는 조선 순검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여 군도로 무수히 때리고 남의 나라 남대문을 제 마음대로 열고 짐 실은 말 두 필과 하인 두 명을 들여보냈다고 보도했다.
   
   경복궁의 서쪽 출입문인 영추문과 창덕궁 안에 있던 승화루, 그리고 세검정과 서울의 성곽 풍경도 있다. 제물포(인천)의 한국인 마을, 일본인 거류지와 항구의 세밀한 그림은 개화기 우리의 삶을 찾아가는 시간여행의 느낌을 맛보게 한다. 절도범에게 태형을 가하는 포졸, 병인양요 당시 강화유수의 모습도 그림으로 남아 있다.
   
   널리 알려진 충격적인 장면은 1907년 8월 구한국 군대가 해산하던 당시에 저항하는 한국 군인을 일본군이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찔러 죽이는 장면이다. 태극기 걸린 건물 앞에서 해산당한 한국군은 처참하게 살해되었고, 살아남은 군인들은 의병이 되어 저항을 계속했다.
   
   제5장에는 유럽과 미국의 신문·잡지에 실렸던 구한말 정세를 풍자한 만평이다. 풍자만평은 당시의 정세를 단순화, 축약하여 전달한다. 한반도라는 먹잇감을 놓고 열강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식탁에 스푼과 나이프를 들고 앉아 있거나 총과 무기로 맞서 싸우는 그림들이다. 우리의 운명이 서양 언론의 재밋거리 소재가 되었다. 제6장에는 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왔던 서양 언론인들의 모습이 실려 있다.
   
   이 화보집은 마지막 연표를 포함하여 167쪽 분량에 흑백 사진도 있지만 많은 컬러 그림을 담았다. 30년 전 전시회의 제목 그대로 ‘격동의 구한말 역사의 현장’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편찬한 책이다. 오늘의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할 자료가 담긴 훌륭한 컬러판 역사 교과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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