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 두상
소포클레스 두상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정한 그리스 최고의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96년에 아테네 외곽 콜로누스라는 시골에서 무기와 군장을 만드는 부유한 상인 소필루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80년에 살라미스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아테네인들의 합창단을 이끄는 일을 하면서 그리스 연극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비극작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시점은 기원전 468년, 디오니시아 축제에서 거행된 비극경연대회. 그는 이 대회에서 당시 최고의 작가였던 아이스킬로스를 꺾고 우승했다. 소포클레스는 443년 페리클레스가 등극하여 아테네 르네상스를 일으킬 때 아테네 재정을 책임지는 재정관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441년엔 아테네 군대를 지휘하는 열 명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 아테네 정치에 깊이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이런 아테네의 중요한 관직을 얻게 된 계기는 바로 ‘안티고네’라는 비극 작품을 통해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의 대표작 ‘안티고네’의 배경은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간에 벌어진 갈등이다. 오이디푸스가 죽은 후 두 아들은 테베를 번갈아가면서 통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장남 에테오클레스가 왕좌를 돌려주지 않자 동생 폴리니케스와 그의 군대는 테베를 빼앗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 중 폴리니케스와 에테오클레스 모두 전사한다. 이 틈을 타 이들의 삼촌인 크레온이 테베의 왕이 된다. 그는 에테오클레스는 테베를 사수하다 전사했기 때문에 국장(國葬)으로 그의 시신을 성대하게 매장하지만, 폴리니케스는 반란군이기 때문에 시신을 성 밖에 방치하고 누구든 그를 매장하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때 성 밖에 이들의 여동생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등장한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국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오빠인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스메네는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불의한 일이며 여자로서 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자 안티고네는 화를 내면서 폴리니케스를 홀로 매장하려 한다. 크레온은 조카인 안티고네가 국법을 어기려 시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명령이 “신들의 법을 어기는 행위”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크레온은 더욱 더 화가 나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사형에 처할 것을 명령한다.

왕의 명령을 거역한 안티고네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와 결혼할 참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사형명령을 거둘 것을 요구하지만 실패하자 가출한다. 크레온은 하이몬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면서 두 명 중 이스메네는 살리고 안티고네는 동굴 속에 감금시켜 굶겨 죽이도록 명령을 변경한다. 그때 장님 예언자 티레시아스가 등장하여 크레온에게 “신들이 크레온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아 아들 하이몬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크레온은 티레시아스의 예언에 화가 났지만 아들의 운명을 걱정하여 폴리니케스를 매장하고 안티고네를 동굴에서 풀어준다. 그러나 크레온의 결정이 너무 늦었다. 안티고네는 스스로 목매달아 자살하였고 하이몬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크레온의 부인인 유리디케도 하이몬의 자살 소식을 듣고 크레온을 저주하며 자살한다. 혼자 남은 크레온은 이 모든 비극에 대한 책임을 지고 빨리 죽기만을 원한다. 연극의 마지막에 합창대의 노래가 엄숙하게 울려 퍼진다. ‘오만이 비극적 죽음을 일으켰다.’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에서 질문한다. “국가권력이 개인의 인권보다 중요한가?”, 혹은 “인생에 의미가 있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발견된 소포클레스의 7개 비극은 모두 “인간은 무엇인가?”를 일관되게 묻는다. 이 질문은 ‘테바이 비극’이라고 불리는 소포클레스의 세 비극인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왕’, 그리고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 중에서 특히 ‘안티고네’에서 부각된다. ‘안티고네’는 개인과 국가 간의 정치적 상황에서 ‘개인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안티고네’의 복잡한 사건으로부터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묘사에 소포클레스가 정의하려는 인간이 숨겨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도시 안에 살면서 가장 이성적이며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도시 안에 사는 동물, 축자적 의미에서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 즉 ‘정치적 동물’이다. 도시가 가져다주는 혜택을 수혜하지 못한다면,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다. 문제는 이 필수적 요건이 자신을 위한 최선의 삶을 지향할 때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도시국가나 개인이 최선을 추구하는 삶은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적인 삶이며, 철학적인 삶은 정의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가 ‘안티고네’에서 보여준 비전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시한 비전과는 사뭇 다르다.

소포클레스는 선의의 경쟁자이나 동반자인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기원전 5세기 아테네가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시대에 등장하여 인간의 본성과 정치의 본질에 대해 숙고했다. 이 비극작가들의 작품들은 역동적이며 혼란스러운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문화를 묘사한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전통적인 삶이 민주주의 도입으로 붕괴되고, 참주와 민중선동가가 등장하여 권력을 농단하고, 새로운 세계관이 수입되고, 해상무역을 통해 부자 상인들이 등장하였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비극작가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아테네 시민들을 위한 도덕과 윤리의 스승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비극경연 작품이 공연되는 ‘디오니시아 축제’는 그들의 교실이 됐다. 소포클레스는 가장 인기 있는 비극작가였다. 고대 로마시대 ‘영웅전’ 작가인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소포클레스의 승리는 극적이었다. 소포클레스가 승리하기 전까지 비극 경쟁의 승리자는 투표를 통해 선택되었다. 그러나 소포클레스가 참가한 비극경연에서는 당시 정치지도자인 키몬과 다른 연극 후원자들이 비극공연을 직접 보고 결정하였다. 그는 27살이 되던 기원전 468년 당시 최고 작가였던 아이스킬로스와 경쟁하여 이겼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패배 이후 시실리로 떠났다. 그 이후 그는 매년 열리는 디오니시아 축제 비극공연 경쟁에서 18번이나 우승하였다. 그는 62년간 비극작가와 정치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아테네인의 스승이자 인생의 의미를 비극을 통해 찾아가는 구도자 역할을 했다. 그는 아테네인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 하나는 “인간은 무엇인가?”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개인의 양심과 행복을 파괴하는 비이성적인 권력으로부터 그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구조는 무엇인가?” 이 역설적인 두 질문은 ‘안티고네’의 주제이기도 하다.

두 인물 사이 정의는 어디에 존재하나

‘안티고네’는 전통적으로 개인의 양심에 관한 드라마로 해석되어 왔다. 극중 인물로 등장하는 테베의 독재자 크레온이 상징하는 무작위적이며 비도덕적인 법에 대항하는, 양심적이며 도덕적이고 용기가 있는 여인 안티고네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안티고네’를 양심대로 행동하는 안티고네가 국가라는 비인간적이며 잔인한 권력 앞에서 투쟁하는 내용으로 간주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에 등장한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였다. 국가는 안전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는 개인들의 집합체다. 그러므로 개인과 국가 간의 ‘사회계약’이 이익집단의 이익을 위해 중요했다. 안티고네를 주인공으로, 크레온을 악당으로 여기는 해석은 지난 300년간 서양에 지속되어온 문학적이며 철학적인 전통이다. 소포클레스가 정말 이런 단순한 이원론적인 주제를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달하려 했을까? 기원전 441년 디오니시아 축제에 와 ‘안티고네’를 감상하던 아테네 시민들은 크레온이 상징하는 국가를 악의 축으로 생각했을까.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극중 대결이 아테네인을 흑백 진영으로 나누었을까? 안티고네의 행위는 자신의 양심보다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고대 관습을 단순히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아닌가? 이 두 인물들 사이에 정의는 어디 있는가?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합창단은 인간보다 놀라운 존재는 없다고 노래한다. 인간은 땅, 바다 심지어 자신의 운명까지 지배한다. 당시 아테네인은 인간은 도시 안에 거주하여 도시의 법을 따르는 존재로, 자신을 도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도시는 가장 이상적인 법이 실현된 장소로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모든 도시국가는 일종의 공동체이며, 모든 공동체는 선(善)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의 실현이다. 모든 공동체가 선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모든 공동체의 으뜸은 국가 또는 국가 공동체(politike koinonia)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 공동체, 국가, 그리고 도시의 이상은 개인의 이상과 동일하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는 선을 파괴하는 부조화, 혹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을 때 죄명이었던 ‘오염’이다. 도시국가 공동체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죽음이 아니라 ‘국가가 사라지는 것’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를 지배했던 국가의 권위와 위치를 인식해야 ‘안티고네’와 소포클레스의 생각을 정확하게 조망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소포클레스를 인간 양심의 상징으로 표현한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인간의 의무를 고취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과 행위가 도시국가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현실과 갈등을 일으킨다. 소포클레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도덕의 상징이다. 안티고네는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인간 운명의 이중성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자신의 양심을 행동으로 옮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가장 숭고한 창조물이지만, 셰익스피어 비극 ‘햄릿’에 등장하는 햄릿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낱 먼지에 불과하다(quintessence of dust)’. 인간은 모든 영광을 누리지만 정작 자신은 벗어날 수 없는 복수의 희생양이 되어 ‘불명예스럽게 산다’.

선한 사람은 정의를 추구한다. 소포클레스의 정의 실천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인간관계에서 조화와 과잉금지다. 두 번째는 신의 조화로운 중용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조하고 그런 자신과 조화롭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처럼 최상의 인간은 저주받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영웅적인 인간은 자신이 처한 운명적인 미로를 벗어날 수 없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오빠의 시신 위에 아테네의 흙 세 줌을 뿌려 아테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땅의 법’을 고의적으로 어긴다. 그녀는 ‘인간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라’는 신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거룩하며 죽음 후에도 불변하다. 그러므로 산 자는 죽은 자에게 정성스러운 의례를 행함으로써 영혼이 불변하다는 진실을 수호해야 한다. 산 자는 죽은 자를 고의적으로 방치하여 이 진실을 폐기할 수 없다. 이것이 정의다. 그러나 크레온은 안티고네의 시민 불복종 전에 왕으로 취임하여 권력을 과시한다. 그는 특히 정의가 아테네의 법과 일치한다고 확신한다. 여기에 서로 다른 정의가 있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정의는 각자에게 절대적이며 압도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존재 이유다.

크레온 왕의 오만과 자기도취

학자들은 고상하고 신적이며 영원한 법과, 일시적이며 문서화된 법률의 갈등으로 ‘안티고네’를 해석한다. 그러나 도시의 법률보다 상위 개념인 자연적이며 신적인 법은 없다. 아테네 법정에 정의의 여신인 ‘디케(Dike)’가 앉아 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 법정에서 ‘디케’의 판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다. 안티고네가 반란을 일으킨 불의한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하는 일은 아테네 디케 입장에서 본다면 ‘불의’ 그 자체다. 크레온이 아테네의 조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불의의 상징인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방치하라는 법률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에 의해 필요하고 정당하다고 여긴 죽은 자를 매장하라는 오래된 법률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우리는 ‘안티고네’에서 양립할 수 없는 두 종류의 정의를 목격한다. 크레온은 점점 자신의 선정(善政)과 ‘모두를 위한 최선’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안티고네는 국가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고 있다. 크레온과 안티고네 사이에서 첨예하게 갈등하는 도덕적·윤리적 모호함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며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선택에 대해 숙고하도록 인도한다.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은 안티고네를 사랑하고 자신의 아버지에 정면 도전한다. 하이몬은 독립적인 인간으로 스스로 사고하여 결정한다. 그는 안티고네가 자신의 오빠에 대한 사랑과 ‘기록되지 않은 신들의 법’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의 시신을 매장하려는 의지를 목격한다. 그는 이 비극을 보는 아테네 시민들과, 이 글을 읽는 우리들처럼 안티고네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인다. 안티고네의 여동생인 이스메네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안티고네에게 아테네 시민에 대항해 행동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그녀는 “우리는 여자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오히려 가부장적인 푸념을 쏟아놓는다. 기록되지 않은 신의 법에 승복하는 것이 영예롭고 자연스럽지만, 신들의 법을 모아 최선을 위해 기록된 도시의 법도 가치가 있다. 하지만 소포클레스에게 아테네의 법은 이기심에 근거한 무작위적인 관습과 전통의 표현일 뿐이다.

크레온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도시와 법의 우월성을 노래한다. “불복종보다 심한 잘못은 없다. 불복종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며 우리의 가정을 무너뜨린다. 만일 사람이 인간답게 산다면, 그 이유는 법이 그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하이몬은 아버지의 말에 허점이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크레온의 주장이 과도하다는 점이다. 크레온은 “국가가 정한 위치에서 사람은 그 명령이 옳거나 심지어 옳지 않을 때도 복종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옳지 않을 때도’에서 풍기는 자기 기만과 도취에 빠진 절대적인 믿음이 신들이 정한 기록되지 않은 법과 도시의 기록된 법을 초월하는 최고의 법으로 군림한다. 크레온은 오만에 빠져 자신만이 지혜롭고 자신의 웅변술과 자신의 생각은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하이몬은 아버지에게 인간은 완벽한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다”라고 말한다. 숙고, 중용, 자기인식,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의식하는 능력이 크레온에게는 없다. 안티고네의 주장은 옳고 그른 것을 떠나 크레온의 주장과는 다른 정의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싸움은 선과 악, 혹은 개인의 양심과 국가권력의 투쟁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에게 매일 아침 지혜의 시작은 자신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이었다. 반면 ‘안티고네’에 담겨진 지혜는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빌리자면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결정은 ‘공포와 전율’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모호하다. ‘안티고네’ 관객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서 만나는 다양한 윤리적·도덕적 책임과 해결방식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

‘안티고네’가 우리에게 질문한다. 개인의 양심에 따른 행동이 자신에겐 최선이지만, 모든 사람들에도 최선인가? 소포클레스가 ‘안티고네’에서 ‘가르치려는 교훈’은 이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최선을 고안해내지만 정의를 위해 필연적인 조건들, 즉 이상·연민·자유와 같은 소중한 가치 때문에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상황이 인생이며 비극이다. 개인과 국가의 이익이 충돌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깊은 생각이며 숙고이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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