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 노원지사 ⓒphoto 성형주 조선일보 기자
국민건강보험 노원지사 ⓒphoto 성형주 조선일보 기자

“직장인 자녀는 효자, 자영업자 자녀는 불효자로 만드는 건강보험제도가 정상입니까.”

작년 말 실직한 이모(61)씨는 월 18만원을 내라는 건강보험료 고지서를 들고 건강보험공단에 찾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직장에 다니는 자녀가 있으면 건보료를 면제해주고,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 건보료를 꼬박 내라고 하는 이런 엉터리 제도를 누가 만들었느냐”고 불만을 쏟아냈다. “자녀 직업을 따져 차별하는 ‘21세기 서얼차별법’이 아니냐”고 항의했다.

그의 건보료 불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건보공단 측에서는 지역가입자들은 월급을 받지 않으므로 소득과 재산에 따라 건보료를 매긴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노동부에서 주는 실업급여를 매월 60만원씩 받고 있으므로 거기에서 직장인 월급처럼 건보료를 떼야 공정한 게 아니냐고 했다. ‘소득’이란 기본 개념조차 헛갈리게 하는 제도가 바로 건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복지부는 지난 1월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안을 발표했다. 정부 개편안의 골자는 소득과 재산에 물리는 건보료가 너무 과중하다는 비판을 의식, 재산에 건보료를 물리는 것은 일정액을 공제해 건보료 부담을 낮추는 방식을 도입키로 했다. 그동안 가족 수와 나이 등에 매기던 건보료를 완전히 없애는 한편, 자동차에 물리는 건보료는 고급자동차에 한해서만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이 같은 복지부의 제도개편안에 대해 박수를 보낸 이들은 저소득층들이다. 재산에서 일정액을 공제해주는 덕분에 건보료가 낮춰지기 때문이다. 전체 지역가입자(757만가구)의 77%(583만가구)가 건보료가 낮아지는 혜택을 본다. 연간 소득이 100만원에 미달하거나 재산이 적은 저소득층은 월 1만3100원만 내면 된다. 소득도, 재산도 없는데 월 5만원의 건보료에 억눌렸던 ‘송파 3모녀’ 같은 저소득층들에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나오게 한다. 반면 투잡(two job)으로 월급 이외의 고액 소득이 있는 직장인과 고액 재산가들은 건보료가 오른다. 또 그동안 직장인 가족의 건보증에 얹혀 건보료를 내지 않던 직장인 가족(피부양자)도 연간 3400만원을 넘는 소득이 있으면 새로 건보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저소득층에 박수 받는 개편안이지만, 건보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우선 ‘직장인 자녀는 효자, 자영업자 자녀는 불효자’라는 제도 불만은 여전히 존재한다. 직장인과 지역가입자라는 벽을 허물지 않고 건보료를 ‘소득’ ‘소득+재산’으로 따로따로 물리는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역가입자들에게 ‘소득+재산’으로 물리는 것에 대해 지난 1월 헌재는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지역가입자에게 재산을 고려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합리적 이유가 있다”며 “정부가 재산을 고려해 발생하는 문제점은 보험재정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개선 중이므로 해당조항이 헌법상 평등원칙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5(합헌) 대 4(헌법 불일치) 의견으로 합헌으로 결정해 문제점을 제대로 개선하지 않으면 앞으로 위헌 결정이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

가장 큰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은 실직자와 퇴직자들이다. 복지부에 따르면 작년 2월 직장에서 퇴직하거나 실직한 12만5000가구 중 건보료가 직장에 다닐 때보다 오른 이들은 61%(7만6000가구)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소득 한 푼 없이 아파트와 자동차만 있어도 건보료가 월 10만~30만원이 나오기 일쑤다. 이 때문에 실직자들은 일자리를 잃는 순간, 가장 먼저 피부로 와닿는 공포가 ‘건강보험료 고지서’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복지부 방안대로 개편되더라도 건보료가 오르는 경우는 29%(3만6000가구)나 된다. 열 중 셋은 여전히 건보료가 오른다는 얘기다. 아파트 같은 재산(부동산)에 대해 공제해주는 금액이 너무 낮게 설정됐기 때문이다. 500만원에서 최대 5000만원까지 공제해주겠다고 했지만, 이 정도로는 퇴직자들의 건보료가 별반 낮춰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언 발에 오줌 누기’

가령 3억원 하는 아파트를 갖고 있는 경우에 붙는 건보료는 현재 월 12만2300원이다. 3억원에서 최대 5000만원을 공제받아도 건보료는 11만4400원이나 된다. 건보료 인하 혜택이 고작 1만원도 되지 않는다.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이다. 그러니 반발이 여전할 수밖에 없다. 건보료가 월 20만원이 넘는다는 현이옥(62)씨는 “서울의 아파트 값 시세를 제대로 알고서 만든 정책이냐”며 “비싼 아파트에 사니까 건보료를 더 내야 한다고 하지만 이 집은 내가 죽을 때까지 살 집인데 여기에 고액의 건보료를 마구 매기면 되느냐”고 항변했다. 집을 사느라고 은행에서 빚내 매월 70만원씩의 이자를 내고 있다는 김철호씨는 “은행 빚이 있으면 당연히 빼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모든 사람에게 일정액씩만 빼준다고 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대국민 홍보용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아파트 과표가 3억원이면 건보료가 12만2300원이지만, 6억원이면 15만6790원에 그친다. 재산이 두 배이면 건보료도 그만큼 올라야 하지만 약간 오르는 데 그친다. 가난한 은퇴자보다 재산이 많은 부자 은퇴자에게 유리한 건보료 제도라는 지적을 면할 길 없다.

앞으로 베이비부머(1955~1963년 출생자)들이 대거 퇴직하면 건보료 부담에 민원이 점점 더 쏟아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이 때문에 실제 거주용 재산에 대해선 건보료를 아예 면제하거나, 은행 빚 등은 재산에서 빼주는 게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신현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재산 공제를 대폭 확대해야 국민에게 건보료 개편 동의를 얻기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과 시민단체들도 같은 목소리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은 “기초연금에서 재산을 따질 때도 대도시와 중소도시, 농촌지역의 부동산에 대해 공제금액을 각각 달리 정한다”며 “건보에서도 지역별 수준에 맞춰 공제금액을 따로 정해야 불만이 그나마 사그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경실련도 “실제 소득이 아닌 주거용 재산 중 고액 주택은 아예 제외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복지부 입장은 다르다. 지역가입자들은 소득파악률이 낮아 재산에도 건보료를 매겨야 건보 재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재산 건보료를 아예 빼면 건보 재정에 4조원이나 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건보료 인하 혜택을 남발하면 건보 재정에 치명타”라고 말했다.

결국 문제는 건보 재정이다. 현재 건보는 사상 유례없는 20조원의 흑자 재정을 유지하고 있다. 건보공단 노조 관계자는 “현재 건보 흑자 재정 수준이라면 재산 건보료를 낮추는 데 필요한 3조원을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며 “그런데도 정부가 재산 건보료를 낮추는 데 인색한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김동섭 조선일보 보건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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