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나처럼 살지 마라’고 말해본 적 있으세요?”

지난 4월 4일 아침 서울 성북구의 한 주민자치센터. 에어로빅을 배우고 있던 60~70대 여성 스무 명에게 물어봤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당연하지” “그럼” “말해 봤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말을 해 봤느냐’는 질문에도 비슷비슷한 답이 나왔다.

“나는 23살에 시집와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모질게 했어. 딸만 셋을 낳았는데 아들 못 낳았다는 서러움에 딸만은 잘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지.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예쁜 옷 입히려고 내 옷은 사 본 적이 없어, 정말로. 아이들 필요하다는 건 다 해줬지만 나를 위해서는 한 번도 돈을 써본 적이 없어.”

일흔셋의 김명진씨가 털어놓은 얘기다. 김씨는 “그렇게 귀하게 키운 딸들이 나처럼 산다는 건 말이 안 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김씨는 아직 미혼인 막내딸까지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즐기며 힘들어도 자신을 잃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전 서울 성북구 대학가의 한 카페. 4명의 엄마가 책을 한 권씩 들고 자리를 잡았다. 이번 모임이 세 번째인 엄마들의 독서 모임이다. 다섯 살 딸을 키우는 박희주씨를 중심으로 동네 친한 주부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읽는 책은 ‘엄마됨을 후회함’이다. 이전 모임에서는 ‘엄마라는 직업’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스라엘 사회학자 오나 도나스가 지은 ‘엄마됨을 후회함’은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는 책이다. 여성이 어떻게 엄마가 되는지, 엄마가 되면서 안팎으로 요구받는 것이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후회하고 힘들어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엄마들이 많다는 것 등을 다룬 책이다.

“엄마는 후회해서는 안 되고 자신을 온전히 가족에 바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우리 사회가 그동안 엄마들에게 요구해온 거예요. 그런 경험을 해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많은 엄마도 후회할 수 있다는 것, 아이를 기르면서 나는 도대체 무언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박희주씨가 책을 읽고 난 감상을 말했다.

2시간 넘는 모임 내내 엄마들은 “우리는 자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초등학교 1학년, 3학년 아들 둘을 키우는 이지영씨는 모임 도중 “하루 종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만 하는 데 지쳤다. 나를 위한 일을 찾고 싶다”고 말해 응원을 받기도 했다. 모임이 마무리될 때쯤 리더인 박씨가 “가끔 후회하는 감정이 들거나 엄마 말고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나는 나쁜 엄마야’라고 자책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 작게 박수 소리가 들렸다.

워킹맘은 과로, 전업주부는 우울증

“아임 낫 맘, 벗 맘.(I’m not ‘Mom’, but ‘Mom’.)” 직역하자면 “나는 ‘엄마’가 아니지만 ‘엄마’다”라는 모순적인 문장이다. 앞의 ‘엄마’는 이전 세대의 엄마를 말하는 것이다.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자신을 억누르며 살아온 엄마들을 말하는 것이다. 뒤의 ‘엄마’는 요즘 엄마를 뜻하는 것이다. 육아에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을 잃지 않는 엄마다. 한혜진씨가 바로 그런 ‘요즘 엄마’다.

한혜진씨는 다섯 살 된 딸을 키우는 워킹맘이다. 그는 방송작가 생활을 하던 2013년 딸을 낳고 나서 “정말 힘든 고비를 넘겼다”고 말했다.

“산후우울증이란 남의 얘기인 줄 알았어요. 아이를 기르고 돌보는 일에 준비가 돼 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아이만 하루 종일 보다 보면 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죠. 좀처럼 우울한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어요.”

생각이라도 정리하자 싶어 블로그에다가 하루하루 있었던 일을 적어 올리기 시작했다. “블로그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도 그것밖에 쓸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제 딸이 어릴 때는 잠시라도 바닥에 내려놓으면 울고 보챌 때가 있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둘러업고 어르면서 뭐라도 써볼 수 있는 게 스마트폰밖에 없었지요.”

그저 덤덤히 있었던 일과 생각을 적었을 뿐인데 한씨의 일기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이 날로 늘어났다. 블로그를 연 지 2년도 되지 않아 누적조회 수가 200만회를 넘어섰다. 3년 만에 팔로어 수는 3만명에 달할 정도가 됐다. 블로그의 글을 책으로 쓰자는 요청,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이어졌고 실제로 한씨는 ‘극한육아 상담소’라는 책을 써내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한창 힘들 때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저 자신만의 삶은 결혼 전, 아이를 낳기 전에 활짝 피었다가 끝나는 거고 아이를 낳고 난 뒤에는 ‘엄마’로서의 정체성만 가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우연히 찾아온 기회 덕분에 알게 됐지요. ‘삶은 계속된다’고요.”

예나 지금이나 엄마들이 자신을 지키면서 살기란 쉽지 않다. 최근에는 경제활동을 하는 엄마들이 많은 만큼 예전보다 더 어려워진 것이 현실이다. 엄마들 삶의 문제가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될 정도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6 일 가정 양립 지표’를 보면 맞벌이 부부 중 가사를 공평하게 분담하는 부부는 20%에 불과하다. 맞벌이 가정의 여성은 주당 근로 38.8시간에 가사 및 육아 38.3시간을 합해 주당 77시간 넘게 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워킹맘은 시간에 쫓기고 일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워킹맘을 도와주는 것은 없다.

시장조사기관 엠브레인이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재직 중인 회사에서 출산과 양육을 배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27.6%에 그쳤다. 기혼자의 63.9%는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77%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전업주부라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가정 문제를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식 때문에 전업주부의 우울 점수와 양육 스트레스는 워킹맘보다 더 높다. 육아정책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업주부의 우울 점수는 1.95점으로 워킹맘에 비해 0.13점 높고, 양육 스트레스도 2.77점으로 0.1점 높았다. “워킹맘이 과로로 쓰러지면 전업주부는 우울증으로 쓰러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시간이 부족하고 할 일은 많은 엄마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엄마다움’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다. ‘엄마는 자녀에게 헌신적이어야 한다’ ‘자녀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진다’ ‘육아를 힘들어할 수는 있지만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렇다 보니 육아보다 다른 것이 우선인 엄마들은 쉽게 손가락질 받는다. 직장생활 12년 차, 7살과 4살 아들 딸을 키우는 황미현씨는 역시 워킹맘인 직장상사를 보면서 “심지어 회사에서조차 워커홀릭 워킹맘은 욕먹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워킹맘 A 부장은 워커홀릭으로 유명해요. 9~10시까지 퇴근 안 할 때도 있는데 그 모습을 두고 남자 부하직원들이 뒷담화를 많이 한대요. ‘애들이 삐뚤어질 거다’ ‘저럴 거면 애를 왜 낳았느냐’ 잊을 만하면 뒷담화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황씨는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는 게 엄마라는 존재인 것 같다”고 말했다.

태교여행 가는 엄마

요즘 엄마들은 SNS에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다. ⓒphoto 인스타그램
요즘 엄마들은 SNS에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다. ⓒphoto 인스타그램

현실적 어려움과 엄마에 대한 변하지 않는 고정관념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은 변하고 있다. 다만 엄마의 변화를 아직 우리 사회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기존의 엄마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보자면 요즘 엄마들의 모습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태교여행’이다. 요즘 임신 중기에 국내외 휴양지를 찾아 ‘태교여행’을 다녀오는 임신부가 많다. 태교여행에 몇백만원을 들여 다녀오는 여성이 많다는 기사에서 가장 추천을 많이 받은 댓글 중 하나를 보자. ‘모든 여자가 저리 멍청하진 않음. 현명한 아이 엄마들도 많음’.

4월 말 일본 오키나와로 태교여행을 갔다 올 예정이라는 신효선씨의 얘기를 들어 보자. “누가 태교여행이라고 이름 붙인 건지 모르겠지만, 태교여행을 갔다 오는 이유는 태교 때문이 아니에요. 힘들었던 임신 초기를 지난 저에게 주는 선물, 앞으로 더 힘들어질 저를 격려해주는 선물의 의미가 커요. 당분간은 여행을 못 갈 테니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도 들고요.”

태교여행은 일종의 쉼표라는 것이 태교여행을 해왔거나 다녀올 ‘요즘 엄마’들의 말이다. “그동안 고생했고 앞으로 고생할 건데 제가 이 정도도 못 누리나요?” 당당하게 되묻기까지 한 신씨의 말처럼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에서도 ‘나’를 함께 생각하는 것이 ‘요즘 엄마’들의 특성이다.

이미 유통업계나 관광업계에서는 ‘나’를 생각하기 시작한 엄마들의 심리를 읽어내고 있다. 명절이면 가족을 겨냥한 호텔 패키지가 출시된다. 곽용덕 밀레니엄힐튼 홍보팀 차장은 “요즘 호텔은 주로 가족들을 노려 패키지를 출시하곤 하는데 ‘고생한 엄마를 쉬게 하기 위해서’ 호텔을 찾는 가족들이 대부분이다”고 설명했다.

한 여행사 홍보팀장도 비슷한 맥락의 분석을 했다. “요즘 엄마들은 고생한 만큼 나 자신에게 선물을 줘야 한다는 생각도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휴가지를 결정할 때도 ‘아이와 가기 좋은 곳’을 우선으로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아이와 함께 가도 괜찮을까’라고 생각의 틀이 조금 바뀐 경향이 있어요.”

흔히 ‘관종 엄마’라고 비판받는 엄마들의 SNS 이용 행태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요즘 많은 엄마가 카카오스토리나 인스타그램을 이용해 자신과 자녀의 일상을 공개하곤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맘스타그램’이라는 단어로 검색하면 437만여개의 게시물이 검색된다. ‘육아스타그램’이라는 해시태그가 붙은 게시물은 그보다 많아 670만여개에 달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게시물들이 아이의 초상권을 침해하는 행동이라거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육아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엄마들의 목소리는 다르다.

“아이를 낳고 백일 넘게 집에만 갇혀 있었어요. 남편은 바쁘고 만나는 사람도 없으니 목소리도 잊어버릴 것 같던 상황에서 저를 유일하게 세상 밖으로 끌어준 게 인스타그램이었어요.” 팔로어 500여명의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19개월 딸 엄마 이소연씨의 말이다. “하루하루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올리면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그러면 저도 쓸모없는 일이 아니라 남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엄마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드러내고 말하는 분위기도 여기서 시작됐다. 얼마 전만 해도 평범한 엄마들의 육아일기는 이야깃거리가 못 되었다. 그러나 요즘 엄마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거침이 없다. 언론 매체마다 워킹맘이 에세이나 칼럼을 기고하고, 육아일기를 모아 출판사에 투고하는 엄마들도 많다.

온라인 카페 ‘엄마방송국’

‘워킹맘의 딸’이라는 책을 낸 김신희씨도 마찬가지다. 김씨는 “워킹맘의 이야기가 사회문제로만 치부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게 여전히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엄마가 참고 버티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만은 아니에요. 육아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실천하며 살고 있죠.”

김씨는 책을 펴내고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며 생기는 적은 수익금을 모두 미혼모 시설에 보내고 있다. “아이를 낳고 기르기 전에는 지극히 평범했던 제가 이제는 제 목소리를 내고, 그걸로 남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죠. 저에게 육아는 기회가 된 거예요.” 김씨의 말에 따르면 아이를 기르는 것은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가 된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엄마도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육아가 성장할 기회다’라고 생각하는 엄마들은 점점 늘고 있다. 작가 한혜진씨는 최근 ‘엄마방송국’라는 이름의 온라인 카페를 개설했다. “엄마들이 많이 모이는 ‘맘카페’는 주로 아이들 얘기, 시댁 얘기, 남편 얘기, 힘들다는 얘기만 올라오잖아요. 육아도 하면서 나도 성장시키는 온라인 모임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 카페를 개설하게 됐어요.”

개설한 지 세 달째 되는 ‘엄마방송국’의 회원은 700여명. 이 중 45명이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작심책읽기’라는 독서 모임의 목표는 100일에 10권 책을 읽는 것이다. 카페 회원 중에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육아일기를 연재할 수도 있다. 이미 육아일기를 연재 중인 회원도 9명이나 된다.

“제가 책을 쓰고 블로그를 운영하며 가장 많이 들은 질문 중의 하나는 ‘나도 내 경험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거예요. 저는 그런 분들에게 판을 마련해주고 싶었어요.” 예전 같으면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면 저절로 사라지는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는 게 한씨의 이야기다.

이런 목적에서 모인 엄마들이어서 그런지 ‘엄마방송국’의 독서 모임에서 많이 읽히는 책은 뜻밖에 인문사회나 문화 분야 책이 많다고 한다. 한씨는 “자신을 성장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이에게 결국 좋은 일이라는 걸 믿게 된 엄마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책 ‘엄마됨을 후회함’을 읽던 요즘 엄마들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좋은 엄마’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모든 것을 바치는 엄마가 아니다. 완벽한 엄마란 없다. 오히려 후회·무력감·우울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그냥 묻어버리지 않고, 자신을 위해 극복하는 엄마가 좋은 엄마라는 게 요즘 엄마들의 얘기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를 기르면서도 아이 없는 다음 삶을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기존의 ‘엄마’ 말고 새로운 엄마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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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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