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photo 오종찬 조선일보 기자

2011년 인천 모대학 공과대 교수 이모씨가 투신 자살했다. 대학교수 이씨는 처조카이자 입양한 양딸 정모씨를 수년에 걸쳐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씨는 자택과 자동차, 본인 소유 건물, 심지어 대학 연구실에서 어린 정씨를 장난감 같은 것으로 어르며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상습적으로 강간했다. 이씨의 아내이자 정씨의 양모(작은고모)도 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고 묵인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씨의 조부모는 대경실색했고, 손녀 정씨를 이씨 집에서 나오게 해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에 이르렀다.

정씨는 생후 6개월 때 군의관으로 있던 친부를 여의었다. 남편이 죽자 약사였던 친모는 딸을 버리고 가출한 뒤 행방불명됐다. 결국 조부모가 정씨를 맡아 키우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작은딸네 집으로 정식 입양시켰다. 조부모는 젖먹이 때인 생후 6개월에 양친을 잃어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는 어린 정씨에게 “작은고모가 친모이고, 친모가 재혼한 교수님이 미국에서 돌아온 친부”라고 둘러댔다. 결국 ‘친부’로 알던 양부이자 작은고모부로부터 상습 성폭행을 당한 정씨는 성년이 된 2011년, 큰고모와 한국여성민우회의 도움을 받아 양부 이씨를 성폭행범으로 고소하고 파양(罷養) 신청을 냈다. 정씨는 고소장에 ‘작은고모와 피고소인(양부)과 함께한 삶은 생지옥이었다’고 썼다. 그러자 당시 사건 후에도 여전히 법적 양부 행세를 해온 이씨가 교수직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원인제공자인 성폭행범 이씨가 자살했음에도 가족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비록 성폭행범이지만 남편을 잃은 아내 정씨가 남편이 죽은 다음해부터 양딸의 소송을 도운 친언니를 상대로 앙갚음에 나섰기 때문이다. 특히 정씨는 자신의 언니를 상대로 유산 상속 과정에서 문제를 트집 잡아 ‘사문서위조’로 고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모습을 보다가 죽은 부모가 성폭행에 일정 부분 책임 있는 그를 상속 대상에서 배제한 부분을 “언니가 부린 농간”이라며 문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서울중앙지검은 2013년 6월 “고소인의 주장을 믿기 어렵다”며 ‘증거불충분 혐의없음’으로 불기소결정을 내렸다. 검찰의 불기소결정으로 끝날 줄 알았던 문제는 더 확대된다. 2013년 고소인이 항고하고, 서울고검 A검사가 받아들여 서울서부지검에 재(기)수사를 명령하면서다. 1차 재수사는 고소인 주장의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 계좌 거래내역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해 또다시 ‘증거불충분 혐의없음’으로 고검에 통보됐다. 하지만 A검사는 일선 수사검사에게 2차 재수사를 명령했다. 결국 2차 재수사 역시 대질심문까지 벌였으나 결론은 동일하게 ‘혐의없음’으로 고검에 통보됐다.

전후맥락 빠진 공소장

‘혐의없음’으로 끝날 줄 알았던 사건은 재차 지루하게 계속됐다. 2014년 서울고검에서 이 사건에 대한 3차 재수사를 명령하면서다. 심지어 1, 2차 재수사에서 ‘혐의없음’ 처분을 내린 담당검사 역시 다른 검사로 교체됐다. 하지만 “고소인이 앙심을 품은 무고사건으로 보인다”는 입장을 피력했던 이 검사 역시 다른 곳으로 전보발령이 나면서 또다시 수사검사가 교체됐다. 끝내 최종적으로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서부지검의 B검사는 수사지휘자인 A검사의 뜻에 따라, 2015년 정씨의 큰고모를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법조계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같은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어찌 보면 ‘경미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사건에 지검 단계부터 시작해 무려 4명의 검사가 달라붙은 것이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고작 벌금형 정도의 사건에 고등검찰에서 내린 불기소결정이 한번 깨지기도 힘든데 3차례나 재수사 명령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라며 “대놓고 기소하라는 것으로밖에는 안 보인다”고 했다. 해당 사건을 담당한 피고인 측 변호사는 “검사동일체 원칙에 의해 상명하복의 수사지휘 관계가 있는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몇 번이나 일선 수사검사가 불기소의견을 보냈는데 지휘검사가 수사검사의 의견을 무시하는 바람에 수사가 지나치게 길어졌고, 결국 수사검사 교체 끝에 수사도 별로 안 한 검사가 기소를 했다”고 말했다.

실제 B검사가 작성한 공소장에는 모든 사태의 발단이 되는 양부의 성폭행에 관한 내용은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앞서 불기소결정을 내린 검사들이 작성한 불기소결정서에는 ‘성폭행’과 관련한 언급이 있었다. 전후맥락이 빠진 부실 공소장이었다. 결국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대법원은 지난 2월 “1심 판결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정당하다”며 상고를 기각하고 피고인 측 손을 들어줬다. 1심 판결은 유산 상속 처리 과정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인감증명 위임장 대리행사 등 절차적 문제를 근거로 벌금 200만원을 판결하는 데 그쳤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었다.

양부에게 성폭행당한 조카를 돕다 친자매 간에 피말리는 3년 송사(訟事)에 휘말린 피고인 측은 분노하고 있다. 검사의 수사지휘가 합법적 권한행사였다고는 하나 무리한 수사권 남용이란 판단에서다. 심지어 피고인 정씨 측은 “인천 출신의 A검사가 인천에서 약국을 운영한 고소인(양모), 인천에서 교수를 지낸 성폭행범(양부) 또는 고소인 측 변호사와 모종의 유착관계가 있었던 것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해당 검사는 인천 출신으로 인천지검 부장검사를 지내고 한때 인천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가 다시 경력변호사로 검찰에 들어갔다. 이에 국민권익위원회와 대검찰청 감찰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상대로 억울함을 탄원하고 진상조사를 촉구할 계획이다. 주간조선은 A검사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검찰 수사권·기소권 남용 논란

이 사건은 최근 대선 과정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검찰의 수사권ㆍ기소권 독점, 표적ㆍ별건수사 관행과 같은 해묵은 문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검찰이 고소인 측에서 지나치게 법적인 재량권(수사권ㆍ기소권)을 남발해 피고인에게 오랜 기간 심적·물적 피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검경(檢警)수사권 조정’ 문제가 불거지자 김수남 검찰총장은 지난 4월 7일 서울동부지검 신청사 준공식에서 “검찰은 ‘경찰국가’ 시대의 수사권 남용을 통제하기 위한 시민혁명의 산물로 인권옹호 기관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이철성 경찰청장은 4월 10일 “소이부답(笑而不答)”이라며 “헌법에 (검찰의) 영장청구권이 명시된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했다.

실제 한국 검찰은 어떤가. 정치권력의 비리 척결에는 한발 늦는 반면 일반인들에게는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갑(甲) 중 갑’으로 군림해왔다. “송사 3년에 집안이 거덜난다”는 말이 왜 나왔는가. 일반 국민이 검찰을 불신하는 사법불신풍조를 만드는 데 일조한 쪽은 검찰이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단독제 관청에다가 검사동일체 원칙 때문에 수사권 남용, 공소권(기소권) 남용이라고 인정된 판례는 거의 없다. 기소편의주의상 기소할지 말지 검찰 측에 재량권이 있는 것은 맞지만 적절하게 행사해야 한다.”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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