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소년은 달음박질했다. 장난감 비행기를 줍기 위해서였다. 저 봉우리에 아까 본 비행기가 놓여 있을 터였다. 소년은 흥남철수 때 외삼촌의 손을 잡고 북한을 탈출했다. 거제도 피란민수용소를 거쳐 부산에 살던 소년은 서울에 올라온 후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얼마나 달렸을까. 정상,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건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이날 북한산 보현봉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전경은 소년을 산사람으로 만들었다. ‘악돌이’ 박영래(70) 화백 이야기다.

박 화백은 ‘월간 산’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지금은 월간 산 대기자(객원기자)로 일하며 만화를 연재 중이다. 만화 ‘악돌이’는 이번 5월호로 연재 550회를 맞았다. 한 달에 한 번 실리니 550회면 40년을 훌쩍 넘겨 연재됐다. 정확히는 딱 두 달 모자라는 46년이다.

박 화백과 만화와의 인연은 고교시절 시작됐다. 학생 때부터 만화를 그려 조선일보를 비롯한 신문에 투고를 했는데, 이게 심심치 않게 자주 채택됐다. 받은 돈으론 등산장비를 샀다. 고교 졸업 후 광명인쇄공사에서 일하던 중 만화 연재 제의를 받았다. 1970년 1월 첫 연재를 시작했다.

어떤 일을 반세기 가까이 한다는 건 본인의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악돌이도 한때 잡지에서 퇴장할 뻔했다. 악돌이는 본래 ‘그 어느날’이라는 제목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8개월 후 지금의 이름 악돌이로 개명하며 월간 산의 전신 ‘등산’에 연재됐다. 등산의 발행처가 바뀔 때 휴간했다. ‘악돌이가 없어지면 안 된다’는 등산인들의 응원 덕에 연재가 이어질 수 있었다.

악돌이의 소재는 다양하다. 등산 에티켓부터 올바른 등산법, 등산인들 사이의 에피소드까지 비전문가와 전문가의 관심 분야를 아우른다. 악돌이는 등산 동호인과 프로 등산가 모두 편하게 볼 수 있는 접점인 셈이다. 악돌이에는 과장된 표현으로 독자의 감정을 갖고 놀려는 대목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빙그레 미소 짓게 하는 것이 악돌이의 미덕이다. 박 화백의 말이다. “직접 보고 들은 일에서 소재를 찾는다. 몇 년치 소잿거리는 머릿속에 들어 있다.”

지난 5월 1일 만난 박 화백은 다음 날에 있을 등산 준비에 한창이었다. 취재 산행, 6월호 월간 산 특별부록 코스가이드 취재다. 매달 한 곳의 산(봉우리)을 정해 현재 기준의 최신 등산코스와 소요시간을 알려주는 등산 지도가 ‘코스가이드’다. 코스가이드를 만들기 위해 같은 산에 최소한 4번 오른단다.

“주변 지형지물과 코스별 소요시간을 정확히 체크하려면 4번은 가야 한다. 도심에서 가까운 산은 일고여덟 번 간다. 진입 방향에 따라 코스가 다양해서다. 10년 전에 취재한 산을 또 오르기도 한다. 없던 터널이나 임도가 생기는 등 변화상을 담기 위해서다.”

전문 지도 제작사와 함께 제작해서인지, 코스가이드는 기자 같은 등산 비전문가도 알아보기 쉽게 그려져 있다. 구간별 소요시간도 유용하다. 이 지도들을 매달 수집해 들여다보면 아무런 사전계획 없이도 어느 날 갑자기 전국 어딘가의 산으로 떠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말이 등산가이드이지 사실상 산간 오지 ‘정밀 지도’를 만들다 보니 기존 지도의 오류도 많이 찾아낸다. 박 화백은 국토지리정보원에 할 말이 많다고 운을 뗐다. “한반도의 지도를 가장 처음 만든 게 일본인이다. 흥선대원군 시절에 스님 복장으로 위장하고 측량을 다녔다. 군사작전을 위해서였다. 강원도 원주에 십자봉이라고 유명한 봉우리가 있다. 원래 이름은 촉새봉이다. 일본에서는 촉새를 십자매라고 불렀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십자봉이라고 붙인 거다. 유래를 알았으니 명칭을 고치는 게 맞지 않나. 여러 번 국토지리정보원에 건의했지만 받아들이지 않더라.”

1970년 1월 ‘그 어느날’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선보인 박영래식 등산 만화.
1970년 1월 ‘그 어느날’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선보인 박영래식 등산 만화.

- 산에서 별별일을 다 겪으셨겠다. “귀신도 만났다. 1985년 12월의 일이다. 경기도 가평 귀목봉으로 후배랑 취재 산행을 갔다. 초겨울이라 첫눈이 내려 1㎝ 정도 눈이 깔려 있었다. 다음 날 청계산을 오르려고 부근 민박집에서 자기로 했다. 민박집이 있는 동네로 가려면 귀목고개를 지나야 한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골짜기에서 어떤 여자가 부르는 거다. ‘같이 가요, 같이 가요.’ 거기는 그 시간에 여자가 혼자 있을 수 없는 깊은 계곡이었다. 게다가 바닥에 그 여자의 발자국이 하나도 없는 거다. 그냥 가려는데 또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발밑에서 사람들 소리가 웅성웅성 들리는 거다.”

- 어떻게 하셨나. “걸음아 날 살려라 죽어라 달렸지. 나중에 이장한테 들었는데, 6·25전쟁 때 거기 화전민들이 살고 있었단다. 인민군이 지나면서 화전민을 전부 몰살하고 갔다더라. 강원도 영월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영월 장릉(단종의 릉)에 산행을 갔을 때였다. 젊었을 때라 치기가 있었다. 담배를 피다가 장릉 상석에 담배꽁초를 비벼 껐다. 산행을 다녀와서 양말을 벗는데 발등에 담배에 덴 상처가 있는 거다. ‘이상하다’ 생각하고 넘어갔다. 다음 날 기사 쓰려고 영월 문화지를 들춰 보다 얼마나 놀랐는지. 예전에 영월 기관장이 바뀌면 꼭 꿈에 단종이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6·25전쟁 직후 단종이 경찰서장 꿈에 나타나 ‘내 주변에 시체가 너무 많다’고 말했는데, 살펴보니 능 부근에 인민군 시체가 많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 좋은 기운이 나오는 산이 있나. 일본에선 ‘파워 스팟’이라며 영험한 장소를 찾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 “과장이다. 유명한 산마다 산장이 있고 그곳을 지키는 산장지기가 있다. 설악산, 지리산이 얼마나 공기 좋고 물 좋겠나. 지리산 노고단 산장의 주인이 70세를 겨우 넘기고 돌아가셨다. 설악산 백담산장 주인의 경우도 똑같다. 오대산 입구에서 산장을 하던 후배도 암으로 죽었다. 법정 스님도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결국 운명이다.”

- 산이 가르쳐준 건 무엇인가. “겸손이다. 산행 몇 회 기념 회고록을 내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 나무에 죄짓는 일이다. 인간이 겸손하면 자연은 해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초가을까지 산에 뱀이 많다. 산에서 누가 뱀에 물렸다고 하지 않나? 많은 경우 뱀에 먼저 해코지한 경우다. 가만히 있는데 뱀이 와서 무는 경우는 없다. 뱀술 담그겠다고 잡으려고 하거나 만지려고 했을 때가 문제다. 뱀을 만나면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나가겠습니다.’ 덫에 걸린 짐승을 봐도 그냥 안 지나간다. 너구리의 경우엔 일단 제압하고 주둥이를 끈으로 묶는다. 그러고 덫에서 빼준다.”

- 멧돼지 같은 짐승은 마주치면 무섭지 않나. “일단 가만히 있어야 한다. 멧돼지는 산에서 사람을 보면 피하지, 쫓아와서 공격은 안 한다. 석 달 전에 경기도 광주에 있는 앵자봉에 갔다. 멧돼지는 가족이 떼로 다닌다. 바닥의 흔적을 보고 전방에 돼지떼가 있는 걸 알았다. 스틱을 부딪쳐 쇳소리를 내면서 걸었다. 얼마 후 돼지떼가 등산로에서 벗어나 경사면으로 가는 게 보이더라. ‘인간이랑 마주치지 말아야지’ 하면서 피해주는 거다.”

- 2000년대 들어와 ‘악돌이’에 죽은 등산인들에 대한 얘기가 종종 나온다. 산에서 죽을 고비도 넘기셨나. “여러 번이지. 1983년의 일이다. 10월 13일, 가을이었다. 후배들을 데리고 북한산 인수봉에 갔다. 다음 날 일찍 산행을 하려고 텐트 안에서 자는데 꿈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나타났다. 어머니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나에겐 외할머니가 어머니 대신이었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날 보다가 가시는 거다. 아침에 일어나 기상을 보니 비도 오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다. 봉우리 등반을 포기하고 후배들을 이끌고 북한산을 벗어났다. 집에 돌아오니 라디오 뉴스가 나오는 거다. 인수봉에 등산객이 매달려 있다고. 밤중에 당장 달려갔다. 그때만 해도 젊었으니까. 구하려고 간 거다. 그런데 구할 수 없었다.”

코스가이드를 만들기 위한 초벌 지도들.
코스가이드를 만들기 위한 초벌 지도들.

- 사고가 왜 일어났나. “그날 인수봉에 기상 이변이 발생했다. 기압 차이 때문에 순간적으로 그곳만 영하 10도가 됐다. 당시 대학생 남녀가 짝을 이뤄 일곱 커플이 등반을 한 거였다. 바람이 너무 불어 자일이 엉켰다. 추워지자 남학생들이 옷을 벗어 여학생에게 입혔다. 여학생들은 엉킨 자일을 타고 어떻게든 내려왔다. 날이 밝은 후 구조하러 갔더니 남학생들은 전원 동사했더라. 이성과 등반을 하면 안 된다. 산악에서 나는 인명사고 중에 이성끼리 산에 간 경우가 많다. 남자가 여자랑 산에 가면 폼 잡다가 치명적인 오판을 하는 경우가 잦다. 나는 아내하고도 같이 산에 안 간다.”

박 화백은 상당히 기억력이 좋았다. 날짜나 인명을 정확히 기억했다. 시력은 30대의 기자보다도 더 좋은 듯했다. 건강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에 다니면 장수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등산계 원로 선배님들 중에 의외로 단명하시는 분들이 많다. 안광옥 선배님 같은 경우는 90세를 넘기시고도 정정하시다. 장수하시는 분들을 보면 생활이 단출하더라. 평일엔 후배들 만나서 마음 편하게 소주 한잔하고, 주말엔 꼭 산에 간다. 산행엔 돈 안 들지 않나. 서울에 아파트 따로, 산 입구에 별장 따로 짓는 건 바보 짓이라고 본다. 주말용 집을 정해놓으면 거기만 가게 되지 않나. 활동량이 오히려 적어진다.”

46세 악돌이도 장수할 수 있을까. 악돌이의 예상 수명을 물었다. 박 화백은 딸 비나씨 얘기를 꺼냈다. 비나씨는 이름부터 산과 인연이 있다. 등반용 쇠고리를 ‘카라비나’라고 부른다. 줄여서 비나라고 이름을 지었다. 아들은 자일이다. 등반용 로프를 뜻하는 독일어 ‘자일’에서 따왔다. 젊었을 적 산행에 데려갔다 술 마시고 산에 놓고 오기도 했던 그 딸이 이제 아버지의 길에 동행한다. 산악 만화가로 활동 중이다. 등산 잡지 ‘사람과 산’에 한동안 연재했다. 산악 잡지에서 부녀가 경쟁한 셈이다. 부녀의 펜 끝을 오가며 등산을 계속할 악돌이에게 정해진 수명은 없다는 말을 박 화백은 하고 싶었을까.

“가장 좋았던 산 한 군데만 추천한다면?” 인터뷰를 마치며 던진 우문에 돌아온 즉답.

“친구랑 지하철로 갔다가 산행 후 순댓국에 소주 한잔할 수 있는 산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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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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