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
[2462호]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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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리더의 조건] 검소한 행복과 에피쿠로스

“불행은 두려움과 허영, 절제가 없는 욕망으로부터 나온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에피쿠로스
뉴욕타임스의 논설위원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을 평가하는 두 가지 덕목을 구분한다. 한 가지 덕목은 생전에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등장하는 ‘나’다. 내가 이력서에 나열하는 목록들은 남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고 오히려 돋보이게 하려는 상대적이며 객관적인 업적들이다. 내가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목록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 이력서의 성공은 상대방의 평가에 달려 있다. 이런 의미에서 브룩스는 다른 덕목을 소개한다. 그는 이 덕목을 한 사람이 죽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조사(弔辭) 이력서’라고 부른다. 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평가다. 브룩스는 조사 이력서가 자기소개서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브룩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고대 철학자가 있었다. 바로 에피쿠로스(기원전 341~기원전 279년)다. 만약 에피쿠로스가 브룩스의 말을 들었다면 그는 ‘조사 이력서’가 부질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시간낭비이며 비이성적이다. 그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죽음을 정의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에 스스로 익숙해지십시오. 왜냐하면 선하고 악한 모든 것은 감각 안에 있습니다. 죽음은 감각을 제거한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악한 것들 중 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식민지 빈농의 아들
   
   에피쿠로스는 오늘날 터키 서쪽 바다인 에게해에 위치한 사모스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테네 출신이 아니라 아테네가 정복한 식민지에 정착한 그리스인이었다. 이들은 ‘클레루코스(cleruchos)’라고 불렸다. 아테네는 가난한 시민들을 식민지 도시로 배치하였다. 이들은 식민지에서 땅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고 전시 상황에는 보병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가난한 아테네인들은 식민지로 가서 농토를 받아 농민계급인 ‘제우기타이’로 승격하기를 꿈꿨다.
   
   기원전 323년 아테네와 사모스를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과 마케도니아, 보에오티아 사이에 라미아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연합군에 징집되어 싸웠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패하였고, 사모스에 거주하던 에피쿠로스 가족은 추방당한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가족과 함께 기원전 322년 이오니아 본토(터키)의 항구도시 콜로폰으로 이주한다.
   
   에피쿠로스는 정치적인 혼란시대에 살았다. 그는 다시 아테네로 들어가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리세움에서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접하며 자신의 미래를 꿈꿨다. 그때 그는 나우시파네스라는 스승을 만나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는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충격적인 데모크리토스 철학을 배웠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물질주의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사상 체계를 구축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레스보스라는 섬으로 이주한다. 그는 그곳에 위치한 미틸레네라는 도시의 김나지움에서 데모크리토스 물리학과 윤리학을 연구하고 강의하였다.
   
   하지만 아테네의 상업식민지였던 미틸레네에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대세였다. 그곳 학자들은 철인정치를 옹호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빈농 출신 에피쿠로스의 물질주의 사상은 눈엣가시였다. 그들로부터 목숨까지 위협받은 에피쿠로스는 미틸레네를 떠나 헬레스폰트 근처인 람프사쿠스로 이주한다. 람프사쿠스도 아테네의 상업식민지였지만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도시였다. 에피쿠로스는 이곳에서 학문적인 동지들과 추종자들을 만나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전파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펼칠 유일한 곳은 아테네라고 생각해 기원전 306년 동료들과 함께 다시 아테네로 돌아갔다.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철학의 철인정치는 시대착오적이라고 판단하고 에피쿠로스의 사상과 같은 다양한 사상들을 섭렵하고 있었다.
   
   
   사상의 공동체 ‘정원’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교외에 조그만 집을 구입하였다. 이 집엔 정원(庭園)이 딸려 있었다. 그는 람프사쿠스에서 함께 이주해온 친구들과 공동으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세움에서, 제노는 스토아에서 가르치며 각자의 사상을 전파했듯이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유물론적 사상을 이 ‘정원’에서 전파하였다. ‘정원’은 도시와 떨어져 있는 사적인 공간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독립적으로 토론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사상을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였다. 이 정원은 아테네에서 흘러나오는 에리다누스강 옆에 위치하여 수많은 나무와 식물로 우거져 있는 파라다이스였다.
   
   에피쿠로스는 사적인 정원이 자신의 생각을 전파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소라고 판단하였다. 정원이야말로 아테네 주류 사상이나 정치에 휘말릴 필요 없이 자신의 혁신적인 사상을 유지하며 대중의 편견에 편승할 필요도 없는 지상의 천국이라 여겼다. 그는 아테네 문화와 정치를 바꾸기보다는 호기심이 많은 개인들을 유인하고 초대하여 자신이 구축한 사상을 가르쳤다.
   
   정원은 자신이 배운 것을 묵상을 통해 실천하는 공동체였다. 그곳의 개인들은 정원 밖에서는 다른 아테네인들처럼 도시의 전통과 법규를 준수하였지만 정원 안에서는 정교한 프로그램으로 수련했다. 에피큐리아 사상을 수용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에피쿠로스인’이라고 고백해야 했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우정을 나누고 에피쿠로스를 삶의 모델로 존경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이 보기에 이들은 일종의 ‘종교집단’이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이 비상업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원에는 선생들과 학생들로 가득 찼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적는 필사자들이 공동으로 생활하였다. 정원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후원금으로 운영되었다. 정원의 또 다른 특징은 개방성이었다. 정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당시 새로운 사상을 접할 길이 없었던 여성과 노예들도 정원의 정규 일원이 되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세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배움터였다.
   
   하지만 외부인들은 이 집단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하류집단으로 매도했다. 정원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이 있었다. “나그네여! 당신은 여기에서 머물 수 있습니다. 이곳이 추구하는 최선의 목적은 쾌락입니다. 이 집의 관리자이며 친절한 집주인은 당신을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을 빵으로 대접하고 충분한 물로 맞이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말을 건넬 것입니다. ‘당신은 충분히 대접받고 있습니까? 이 정원은 당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자극하지 않고, 그 욕망을 잠재울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실천을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행복은, 우리 스스로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삶의 고통을 주는 원인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면서 시작된다. 행복한 삶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삶의 형태를 찾아 그것을 최대한으로 만끽하고, 자신의 생각을 동의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지 말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존에 필요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즐겨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적인 삶이라고 광고하는 것들을 획득하기 위해 일생을 노예처럼 살 필요가 없다. 단순하게 사는 것이 미덕이다.
   
   우리는 흔히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쾌락주의라고 오인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영어단어인 ‘에피큐리언(epicurean)’이 지니는, 좋은 음식을 탐닉하고 사치를 즐기며 육체적 쾌락을 지속적으로 영위하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 정원은 이와는 반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가장 단순한 취향을 찾아 몰입하라고 충고했다. 쾌락은 더 큰 쾌락을 양산하기 때문에 결국 정신적 고통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빵 한 조각과 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비싼 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하면 불행이 시작된다. 에피쿠로스 정원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정원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난잡한 섹스를 즐기며 보내는 야만인들이라고 폄하했지만, 에피쿠로스인들은 정반대로 검박한 삶을 살았다.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저술하는 데 바친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300권 이상의 책을 파피루스에 남겼다고 전해진다. 불행히도 그가 남긴 책들 중 오늘날 남은 책은 하나도 없다. 다른 위대한 스승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들이 남긴 노트를 통해 그의 사상이 조명되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담은 파피루스들은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기원후 79년 베수비오산이 화산 폭발할 때 폼페이 근처 헤르쿨라네움에 화산재가 떨어져 그곳에 보관됐던 파피루스 문헌이 간직되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담은 또 다른 중요한 자료는 1세기 로마 철학자이며 시인인 루크테티우스가 남긴 ‘만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장편의 시다.
   
   이 두 자료를 통해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질병을 ‘두려움’과 ‘허영’이라고 해석하였다.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불행은 두려움이나 허영, 그리고 절제가 없는 욕망으로부터 나온다. 만일 사람이 이 감정들을 제어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자가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을 관조하는 행복한 삶을 즐길 수 있다.”
   
   에피쿠로스가 직접 남긴 글은 거의 없지만 헤르쿨라네움 도서관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는 에피쿠로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글들이 있다. 특히 에피쿠로스의 제자 필로데무스가 헤르쿨라네움에서 작성한 ‘테트라파르마코스’가 있다. ‘테트라파르마코스’란 두려움과 허영을 치료하기 위한 ‘네 단계 치료법’이다. 이를 통해 에피쿠로스가 강조한 행복한 삶을 위한 기본적인 지침은 다음과 같다. “신을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은 견딜 만하다.”
   
   첫 번째 “신을 두려워하지 마라”. 에피쿠로스는 친구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신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 관한 많은 말들은 진정한 정의가 아니라 잘못한 가정들”이라고 썼다. 에피쿠로스 추종자들은 고대사회 최초의 무신론자로 불렸다. 그들은 세상이 ‘원자와 허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원자로 이루어진 인간과 사물은 허공에서 돌아다닌다. 세상에 신들을 위한 공간은 없다. 신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도 다른 물질들과 마찬가지로 원자로 만들어진 창조물이며 지구가 아닌 우주의 다른 곳에 거주한다. 그들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기 위해 자신의 원자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는다.
   
   이 믿음은 당시 아테네인에게는 파격적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신으로 만드는 불필요한 수고를 피해야 평안과 쾌락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는 어떤 종류의 신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만일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신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에피쿠로스에게 삶의 철학은 경험에 근거해 구축해야 했다. 에피쿠로스는 신을 향한 기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신이 인간의 기도를 들어준다면 모든 인간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기도의 효과를 증명할 길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인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더 이상 없어진다. 왜냐하면 그 죽음을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인간의 가장 악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고민과 집착이 인간 삶의 질과 행복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은 죽은 후에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모든 형태가 파괴되면, 영혼은 흩어지고 이전에 소유했던 능력을 상실한다.” 당시 대부분의 아테네인이 영혼 불멸성을 신봉하였다. 그는 사후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걱정하지도 않았다.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루크레티우스 역시 인간이 태어나기 전 상태를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죽은 후도 걱정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21세기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죽음은 인생의 사건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우리의 죽음은 인간 경험이 제거된 상태로 의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원래 없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습니다. 나는 죽은 후에 더 이상 없습니다. 나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수도원으로 전환된 ‘에피쿠로스 공동체’
   
   세 번째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 삶에 괴로움을 주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에겐 세 가지 욕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자연스럽고 필요한 욕망이다.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욕망으로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에 필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둘째는 자연스럽지만 불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식탐이나 성적 욕망과 같은 감정들이다. 이 본능은 제어하기 힘들지만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고 불필요한 욕망이나 감정들은, 그것을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더 갈망하게 만들기 때문에 수련을 통해 제어해야 한다. 셋째는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명예와 권력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선한 것은 단순하고 검소한 음식과 거주지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신들의 부와 권력과는 상관없이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좀 더 좋은 음식과 거주지를 원하면 그에게 탐욕이 생긴다. 탐욕은 필요 없는 욕망과 걱정을 야기하여 불행을 초래한다.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라는 말은 생존에 필요한 검소한 삶을 의미하며 평온을 유지하기 위한 관조하는 삶을 뜻한다.
   
   네 번째 “최악의 상황도 견딜 만하다”.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지속된 몸의 고통은 언젠가 그치기 마련이다. 극도의 고통은 짧은 시간 동안 진행되며, 그 고통은 수년 동안 자신이 즐긴 쾌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테네 교외의 조그만 정원에서 시작한 공동체 운동은 지중해 전역에 퍼져 많은 사람들의 생활규범이 되었다. 당시 사회약자들을 받아들인 에피쿠로스 공동체는 1세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회당과 교회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그 후 4세기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수용하면서 에피쿠로스 공동체는 이단으로 낙인찍혀 사라졌다. 기록에 의하면 4세기 에피쿠로스 공동체는 지중해에 수백 개가 있었고 구성원도 40만명이 넘었다. 에피쿠로스 공동체는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 수도원으로 전환되었다. 공산주의 이론을 만든 칼 마르크스가 박사학위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를 쓴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270년 요도결석과 세균성이질로 고생했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로 결정한 후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질병을 얻기 전 자신의 친구들과 나눈 우정과 아내에 대한 사랑을 기록했다. 그는 친구들과 추종자들이 보는 가운데 청동물이 담긴 목욕탕으로 들어가 와인을 한잔 마시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채 조용히 영면하였다. “나의 친구여, 잘 있게나. 나는 내가 가르친 진리를 일생 동안 지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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