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9월 22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오른쪽)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 베르됭의 두오몽 납골당에서 열린 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 기념식에서 손을 잡고 있다. 이 장면은 양국 화해의 상징이 되었다. ⓒphoto AP
1984년 9월 22일 헬무트 콜 서독 총리(오른쪽)와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 베르됭의 두오몽 납골당에서 열린 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 기념식에서 손을 잡고 있다. 이 장면은 양국 화해의 상징이 되었다. ⓒphoto AP

1988년까지만 해도 헬무트 콜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총리 사퇴를 고민할 정도였다. 건국의 아버지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나 비전의 정치가인 ‘동방정책’의 빌리 브란트 총리에 비해서 특별한 업적도 없었다. 인기는 바닥이었다. 중도좌파 성향의 슈피겔 등 언론은 연일 콜을 ‘본의 등신’으로 조롱하고 사퇴를 촉구했다. 이듬해 총선을 대비해 그의 소속 기민당은 젊은 정치인 바덴-뷔르텐베르크 주지사 로타 슈페터를 총리 후보로 물색했다.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도 콜의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빌리 브란트의 ‘정치 조카’로 불리는 사민당의 오스카 라퐁텐은 총리 후보로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콜에게 새로운 역사 무대가 전개되고 있었다. 베를린장벽 너머에서 천지개벽이 시작됐다. 1989년 동독 주민들이 자신의 고향을 엑소더스하는 대규모 탈출이 시작됐다. 고향에 남은 이들도 동독정권 퇴진을 위해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동독의 스탈린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동물적 감각이 뛰어난 콜 총리는 이를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조언자인 람슈테터 목사 형제, 텔치크 외교안보 보좌관 등 측근들과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만들어 발표했다. 콜 총리의 정치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위대한 지도자는 위기 때 총칼이 아닌 비전과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결국 콜은 첫 번째 독일 통일(1891년)을 달성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강조한 “역사 속을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라는 것을 열정적으로 수행해 ‘두 번째 독일 통일’을 달성했다.

역사학 박사 학위를 가진 콜 총리는 역사적 통찰력과 상상력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우파 정당인 기민당 소속 콜은 전임자이자 정적(政敵)이었던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계승 발전시켰다. 그는 동·서독 관계를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묶어 놓고자 했다. 동서 간 정치적 화해와 경제적 지원만이 이를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소속 기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권하자마자 동독 공산정권에 유리한 조건으로 10억마르크 차관을 제공했다. 대가로 동서독 주민의 우편교환·전화통화·상호방문을 성사시켰다. 그 덕에 1984년 한 해 동안 서독에서 동독으로 500만명, 동독에서 서독으로 150만명의 방문객이 넘어왔다. 동·서독 간 34개 도시들이 자매결연을 했다. 통일 전까지 약 3만3755명의 동독 정치범을 석방시키기 위해 35억마르크를 지불했다. 그는 보수의 최고 가치인 인권을 존중했고 통 큰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헬무트 콜은 1930년 루트비히스하펜시의 오거스하임이라는 시골에서 세무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등학생 때 이미 기민당에 가입해 연방의회 의원에 도전했다. 최연소인 39세에 라인란트팔츠 주지사로 당선돼, 낙후된 주를 바꿔 놓았다. 1973년에는 43세 나이로 최연소 기민당 총재로 선출됐다. 보스 기질과 결단력은 남달랐다. 때로는 뻔뻔할 정도로 저돌적이었다. 권력의 정상을 향해 돌진해갔다. 그는 또 기민당을 전통 보수당에서 현대적인 정당으로 개혁하는 데 성공했다. 1976년 기민당 총리 후보로 출마해 과반에 육박하는 48.6%의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 하지만 자민당이 사민당과의 소연정을 하면서 총리직을 거머쥐는 데 실패했다. 이후 1982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자민당이 돌아섰고 슈미트 총리에 대한 의회 총리 불신임안이 통과되면서 콜이 서독의 제6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좌파 정치인 3명과의 우정

콜이 유럽과 독일의 좌파 정치인들과 긴밀한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유지했던 점 또한 독일 통일에 기여했다. 대표적 인물로 3명의 리더를 꼽을 수 있다. 소련 공산당 고르바초프 서기장, 프랑스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 그리고 독일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였다. 먼저 콜은 몰락해가던 공산주의 국가의 맹주인 소련의 고르바초프를 외면하지 않고 35억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다. 콜은 1990년 통일의 마지막 관문인 소련을 넘기 위해 고르바초프의 별장이 있는 코카서스를 전격 방문했다. 이를 통해 독일은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통일 독일이 나토(NATO)에 가입해도 된다”는 통일허가증을 고르바초프로부터 받아냈다. 이를 ‘코카서스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외교는 주고받는 법! 인간적 신뢰 관계와 경제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콜은 또 프랑스를 가장 중요한 동맹으로 간주하고 사회당의 미테랑 대통령과 친구 이상의 우정을 만들었다. 통일에 반대한 프랑스의 여론을 찬성으로 돌리는 데는 그와 미테랑과의 우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와 미테랑이 나란히 손을 잡고 서 있는 사진은 아직도 대표적인 독일·프랑스 화해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한국 정치인들에게 큰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 콜과 브란트 관계다. 한때 정적이었던 빌리 브란트에 대해 콜은 “정치적으로는 간격이 컸지만 17살 더 많은 그에게 인간적으로 매료됐다”고 고백했다. 콜은 브란트와 규칙적으로 만나면서 자문을 구했고 특사로 활용했다. 그는 정적인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이어갔고, 복지정책을 확대 발전시켰다.

콜은 당시 서구에 불고 있던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총리가 폈던 복지축소·민영화·규제완화 대신 오히려 독일식 복지를 강화했다. ‘가족 친화적 사회’를 강조하면서 유치원을 확대하고, 출산장려금을 신설하고, 어린이 지원금을 높였다. 필자는 1986년 외국인 유학생이었지만 출산장려금으로 한 달에 600마르크를 받았다. 당시 한국 대졸 초임 월급 수준일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콜은 묵묵히 솔선수범하는 리더였다. 전임자들이 만든 좋은 전통을 깨지 않았다. 그에게 아들이 2명 있었지만 금수저로 키우거나 권력자의 후광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의 첫째 아들 발터는 독일 남부의 소도시에서 전자대리점 직원으로 근무하는 데 그쳤다. 콜은 유능한 정치 리더의 계보를 이어가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집권 때 정치 입문생에 불과했던 앙겔라 메르켈 현 총리를 ‘여성청소년 장관과 환경부 장관’으로 연이어 임명했다. 메르켈 총리를 ‘콜의 정치적 양녀’라고 부르는 이유다.

콜은 독일 통일 때는 정치적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엑소더스를 막기 위해 화폐 통합의 카드를 뽑았다. 대규모 탈출 행렬을 돈의 댐으로 막은 것이다. 당시 서독과 동독의 공식 화폐 교환율은 1 대 4였고, 암시장에서는 1 대 8까지 치솟았다. 동독 경제는 붕괴하고 있었다. 콜은 독일 연방은행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 대 1 교환을 제시했다. 이후 그는 통일의 문을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였다. 1990년 2월 그는 캐나다 오타와에서 ‘2(동·서독)+4(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 회담’을 제안해 독일 통일의 조건과 방안을 주요국과 논의했다. 그는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영국의 대처 총리를 설득했다.

물론 그에게도 비판의 소지가 많이 있다. 그는 “3년 안에 동독이 서독같이 잘살 수 있다”는 장밋빛 환상을 불러일으켜 동독 주민으로부터 계란 세례를 받기도 했다. 과도한 통일 및 복지 비용으로 한동안 독일은 ‘유럽의 환자’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 누구도 콜에게 주어지는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의 주역’이라는 찬사를 비난하지 않는다. 87세 나이로 고향에서 세상을 하직한 그에게 세계의 지도자들과 그를 조롱했던 슈피겔지도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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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환 전 경기대 교수·독일 본대학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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