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
[2466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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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리더의 조건] 다리우스 대왕의 다언어주의

세계 최초 제국 건설자 그가 남긴 베히스툰 비문의 비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베히스툰 비문
세계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은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대왕(기원전 550~486년)이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한 왕이다. 그는 기원전 550년경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파르티아 통치자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세 번째 왕으로, 기원전 522년부터 기원전 486년까지 36년간 통치하였다. 그는 서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아테네와 기원전 490년 마라톤전쟁을 치렀던 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다리우스 대왕은 제국에 필요한 경제구조, 도로망, 통화 등을 정비하여 인류 최초의 제국을 만들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다리우스에 관한 자료를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작 ‘역사’에 의존해왔다. 페르시아에 관한 사료를,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그리스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해온 셈이다. 헤로도토스의 해석이 객관적 사실을 표방하고 있지만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시작된 ‘오리엔트 르네상스’로 페르시아 쐐기문자가 판독되기 시작했다. 쐐기문자는 19세기 초 판독될 때까지 1500년 이상 사람들에게 장식으로만 여겨져왔다.
   
   1618년 피구에로아가 고대 페르시아 다리우스 대왕과 그의 후손들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에서 수많은 유적지의 흔적을 보았다. 그리스, 로마의 저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에서 숱하게 언급했던 바로 그 왕이었다. 그는 이 유적지에서 새로 발견한 알 수 없는 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문자들은 아람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혹은 아랍어도 아니다. 이들은 삼각형으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모양과 거의 유사하다.”
   
   1657년, 필사한 쐐기문자가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당초 쐐기문자는 이집트의 성각문자와는 달리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700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히브리어와 아랍어 교수였던 하이드는 이 문자들이 쐐기처럼 생겼다 하여 설형문자(楔形文字·cuneiform)라 불렀다. 영어의 cuneiform은 cuneus(쐐기)+forma(모양)의 합성어다. 1712년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고전학자인 캠퍼가 1686년 유적지를 방문해서 그린 쐐기문자 문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1770년대까지 쐐기문자 판독에는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덴마크의 여행가였던 니부르가 페르세폴리스에 써 있는 문자는 모두 세 종류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세 종류의 문자는 후에 인도-유럽어인 고대 페르시아어, 고립어인 엘람어, 그리고 셈어인 아카디아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니부르의 작업은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쐐기문자 판독의 기초를 놓은 셈이다.
   
   쐐기문자 판독에 첫 진전을 본 사람은 독일 괴팅겐의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였던 그로테펜트였다. 그는 중기 이란어와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고전문헌 등에서 반복되는 관용어구를 대입시켜 1802년 고대 페르시아어를 거의 판독하게 된다. 그가 만든 음절표에 실수가 있었고 그가 대학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가 쐐기문자 판독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히스툰 비문의 발견
   
   쐐기문자 판독이 진행되면서 단문보다는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장문의 쐐기문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란의 자그로스산맥의 서쪽 베히스툰산에는 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영국의 장교이자 외교관인 로린슨(1810~1895)은 1826~1833년까지 인도에 장교로 머물면서 힌디어, 아랍어, 현대 이란어를 배웠다. 그 후 이란 국왕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베히스툰산이 속해 있는 케르만자 지방의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는 탁월한 체력과 동네 양치기 소년의 도움으로 1100행 이상이 되는 베히스툰 비문을 모두 베끼는 데 성공하여 판독하였다. 이 베히스툰 비문에 바로 다리우스 대왕의 족적이 남겨져 있었다.
   
   기원전 522년 페르시아 전체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키루스 대왕의 아들 캄비세스 왕이 이집트 정벌에 나서자 페르시아는 내분에 휩싸였다. 캄비세스의 동생이라고 자칭한 가우마타는 스스로를 왕이라 칭했다. 이 소식을 들고 페르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캄비세스가 시리아 부근에서 죽는다. 베히스툰 비문에 의하면 캄비세스가 말을 타다 칼집이 실수로 벗겨지면서 칼에 허벅지가 찔려 그 상처로 죽었다고 기록한다.
   
   캄비세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페르시아제국의 10개 속국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이 정치적 혼란기에 페르시아제국 전체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이가 바로 다리우스다. 그는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이었던 파르티아 태수의 아들이었으며 캄비세스 왕과 함께 이집트 원정을 갔던 페르시아의 일만용사 중 한 명이었다. 다리우스는 고대 이란인들이 오래전부터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는 베히스툰산에 자기의 등극 과정을 자세히 새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고대 이란의 아후라마즈다 신에게 비문을 헌사하여 신으로부터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성산에 비문을 새긴 이유
   
   다리우스 대왕은 인류 최초로 제국을 건설하였다. 좌우로는 터키에서 인도, 상하로는 박트리아에서 이집트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박트리아는 힌두쿠시산맥과 아무다리아강 사이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이란 중부 베히스툰산 절벽에 새겨놓았다. 베히스툰산은 이란 케르만자로부터 30㎞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베히스툰산은 독립적인 산이 아니라 케르만자 지역을 감싸며 북쪽으로 계속되는 산맥 중의 일부이다. 하마단 쪽에서 보면 베히스툰산은 평원에 갑자기 생겨난 500m 정도의 산이다. 다리우스가 이곳에 베히스툰 비문을 남긴 이유는 뭘까.
   
   다리우스 왕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우연이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비문과 부조석상을 새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평평한 바위가 필요했다. 왕의 대로(大路)를 따라 있는 여느 자그로스산맥의 산들과는 달리 베히스툰산은 메데 왕국의 목초지를 포함한 매우 평평한 절벽을 지닌 산으로 쐐기문자를 정으로 새기기가 용이했다. 둘째, 베히스툰산 아래에 메소포타미아나 이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개의 샘터들이 있었다. 왕의 대로를 지나간 수많은 행상들과 병사들이 지친 몸을 달래던 쉼터였다. 이곳을 지나는 모든 군인이나 대상들이 다리우스 부조물과 비문들을 보았을 것이다. 셋째,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러스에 의하면 베히스툰산은 ‘바가스타나’로 불렸다. 바가스타나를 직역하면 ‘신들의 장소’다. 즉 이곳은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이 근처에서 가로 10m, 세로 10m의 제단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리우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들에게 제사드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네 번째, 다리우스 대제가 등극하면서 최고의 정적인 가우마타를 잡아 처형한 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근처이다. 다리우스에게 페르시아제국의 왕권을 가져다준 결정적 사건인 가우마타 처단을 기념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베히스툰 비문 안에는 그 처단 장소를 ‘메데 지방, 나사야 지방의 시카유바티’라고 말하는데, 그곳이 바로 베히스툰산 뒤로 1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런 이유들로 베히스툰산은 다리우스 왕이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최적지였다.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된 비문
   
▲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다리우스 대왕 부조.
베히스툰 비문은 엘람어, 아카드어, 그리고 고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삼중 쐐기문자 문헌이다. 이 비문은 고대 페르시아제국 왕들이 남긴 비문들 중 가장 길며 역사학적·문헌학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베히스툰 비문은 서양인들이 쐐기문자를 판독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학자들은 이 비문을 ‘고대 비문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베히스툰 비문은 바빌론, 수사, 그리고 엑바타나(현재의 하마단)를 잇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연결되는 고대의 중요한 무역로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는 대상무역상들은 지상으로부터 60m 높이의 절벽 위에 새겨진 다리우스의 부조물과 비문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베히스툰산에 다리우스는 자기가 왕으로 등극한 과정을 쐐기문자로 상세히 기록했다. 베히스툰산의 중턱에 비문과 부조물이 있는데 지상으로부터 69m 위의 경사면에 가로 18m, 세로 7m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워낙 험한 곳이라 사람이 이를 보려면 지상으로부터 고작 40m 위까지밖에 접근하지 못한다. 1839년 영국 학자 헨리 로린슨은 베히스툰산 정상에서 자일을 타고 내려와 공중에 매달린 채 쐐기문자를 일일이 베꼈다고 한다. 이 비문과 부조물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이 난공불락의 지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히스툰 비문의 상단 중심에 부조물이 있는데, 실물 크기(173㎝)인 다리우스 대왕과 두 신하인 인타파르나스와 고르바야스, 그리고 다리우스가 정복하여 처단한 10명의 왕들이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 위에는 조로아스터교 최고의 신인 아후라마즈다가 강복하고 있다. 이 부조물들의 위아래로는 반란군들의 이름과 행적을 적은 설명문이 세 가지 쐐기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 부조물의 오른편으로는 다리우스 왕의 등극 과정을 새긴 엘람어 비문이 손상된 채 있고, 왼편으로는 같은 내용이 아카드어로 적혀 있다. 밑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적혀 있다. 당초 다리우스 왕도 ‘왕위 찬탈자’에 불과했지만 현란한 업적으로 결국 키루스가 창건한 페르시아제국을 완성하는 왕이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대왕은 캄비세스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기를 설명하고 있다. 다리우스 대왕에 따르면, 캄비세스가 그의 친동생 바르디야를 살해했지만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때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인 가우마타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다. 즉 자신이 바르디야라고 속이고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기에 이르렀다.
   
   그때 이집트를 정벌 중이던 캄비세스는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페르시아로 돌아오다가 자기가 찬 칼에 찔려 실수로 죽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을 감지했던 다리우스는, 자기가 페르시아제국의 패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6명의 경호대원과 함께 신속히 가우마타와 그의 군대에 대한 정벌에 나선다. 그는 곧 가우마타를 죽이고 6명의 경호대원의 추대로 페르시아의 왕으로 등극한다.
   
   이러한 기록은 베히스툰 비문 이외의 사료에서는 증명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캄비세스가 죽은 후 반란이 일어나 페르시아가 혼란에 빠졌고, 다리우스는 그것을 이용하여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페르시아에서의 반란은 도화선처럼 번져 페르시아제국의 모든 나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다리우스 대왕은 즉위 후 1년간 이런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 전력투구하였다.
   
   다리우스는 베히스툰 비문과 부조상의 구성을 고대 근동의 아주 오래된 예술사적 전통에 따라 재현하였다. 그의 부조상과 구성, 그리고 비문들은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 지역인 ‘사리-폴리-주합’에서 발견되는 룰루비의 왕 아누바니니의 부조물과 아키드 왕족의 나람신 왕의 비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다리우스 왕은 파르티아의 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이러스나 캄비세스처럼 아케미니드 왕조의 정통성이 결여돼 있었다. 그런 다리우스가 성산 베히스툰에 조로아스터교의 가장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에게 인정받아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면서 자기의 정통성을 천명하게 될 때,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사적 자료를 이용한 것은 당연하다. 특히 아누바니니 비문은 아누바니니 왕이 새벽별의 여신 이난나로부터 왕권을 상징한 원형을 받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부조에서 이난나는 2명의 발가벗은 포로를 포승줄로 묶고 있다. 아누바니니 왕은 헬멧을 쓰고 왼손에는 활과 화살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 비문의 배열은 베히스툰 비문의 배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 다리우스
   
   베히스툰 비문에서 다리우스 왕은 두 명의 신하들과 서 있다. 왼쪽의 신하는 고르바야스로서 페르시아 창을 들고 서 있고, 오른쪽 신하는 인타파르나스로 활을 들고 있다. 아누바니니처럼 다리우스 왕은 왼발로 그의 정적 가우마타를 밟고 있고, 그 뒤로 8명의 포로를 포승줄로 목을 감은 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다리우스 왕은 스키타이 정벌에서 ‘스쿤카라는 고깔모자를 쓴 반란군’을 잡은 후에는 본래 새겼던 글씨 부분을 삭제하고 스쿤카의 부조상을 첨가했다. 이 모든 일이 아후라마즈다의 허락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 날개 달린 아후라마즈다가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원형을 달고 다리우스 왕을 축복하고 있다. 이처럼 다리우스 왕은 왕권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베히스툰 비문이 계속하여 뭔가를 새겼고, 같은 내용이 당시에 국제 공용어인 아람어로 쓰여져 23개의 페르시아제국의 속국에 보내지게 되었다.
   
   다리우스 왕은 왕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문자를 창제한다. 조선의 세종대왕과 더불어 문자를 창제했다고 확실하게 기록을 남긴 유일한 왕이다. 그는 당시 학자들을 동원하여 쐐기문자로 고대 페르시아어를 창제한다. 하지만 다리우스 왕은 페르시아제국의 공식문서에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널리 쓰이던 전통적인 문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속국들 간의 원활한 통신을 위해서 이란어가 아닌 셈어인 아람어를 국제공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아람어는 이미 레반트, 이집트, 동부 이란 지역에 통용되고 있었다. 아람어 알파벳은 엘람어나 아카드어의 쐐기문자보다 배우기가 쉬웠다. 베히스툰 비문에 쓰인 또 다른 언어인 엘람어는 페르시아제국의 행정수도 수사를 중심으로 모든 행정·경제 문서에 사용되었고, 아카드어는 지난 1000년 이상 고대 오리엔트의 외교문자로 쓰였다.
   
   페르시아제국은 처음부터 다문화주의와 다언어주의를 표방하였다. 고대 근동의 긴 역사 가운데 처음으로 다언어 비문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원동력은 페르시아제국을 창건한 키루스의 다종교주의와 다문화주의, 그리고 다리우스가 표방한 다언어주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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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소렌토  ( 2017-07-25 )    수정   삭제 찬성 : 반대 :
그럼 언어를 잘하는 사람이 리더가 될 자질이 있는 건가 북캠으로 쉬운 영어책 한권 읽어보면 영어의 신이 강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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