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6월 베이징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을 벌이는 천안문 4군자. 허우더젠, 류샤오보, 저우둬, 가오신(오른쪽부터).
1989년 6월 베이징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를 점거하고 단식농성을 벌이는 천안문 4군자. 허우더젠, 류샤오보, 저우둬, 가오신(오른쪽부터).

2011년 5월 1일 노동절, 베이징 냐오차오(鳥巢) 올림픽주경기장 특설무대에 대만 출신 작곡가 허우더젠(候德健)이 섰다. 허우더젠은 그가 작사작곡한 ‘용(龍)의 후예’(원제는 ‘용의 전인’)를 원창자인 대만의 유명가수 리젠푸(李建復)와 9만 관중 앞에서 열창했다. ‘용의 후예’는 허우더젠이 1978년 대만에서 발표한 그의 대표곡이다. 이 노래는 1983년 허우더젠이 대만에서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대만에서는 금지곡이 됐으나 오히려 대륙에서는 더 큰 유명세를 탔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단행 후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용의 후예’에 비유한 노랫말과 당당한 멜로디에 열광했다. 돈이 생기면서 자신감이 붙었던 그 당시 중국인들이 딱 원하던 노래였다.

하지만 ‘용의 후예’는 1989년 6월 4일 이후 대륙에서도 금지곡이 됐다. 그해 6월, 류샤오보(劉曉波), 가오신(高新), 저우둬(周舵)와 함께 천안문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연좌 단식농성을 벌였던 허우더젠이 ‘반(反)혁명죄’로 체포돼 대만으로 추방되면서다. 하지만 대륙과 대만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노래를 흥얼거렸고, 2000년 미국 출신의 대만 가수 왕리훙(王力宏)이 댄스비트를 가미한 곡으로 리메이크하면서 더 큰 인기를 누렸다. 결국 21년 만에 ‘용의 후예’의 원작자인 허우더젠이 수도 베이징의 올림픽경기장 9만 관중 앞에서 ‘용의 후예’를 불렀다는 것은, 1989년 6·4 천안문사태 이후 21년 만의 정치적 복권을 뜻했다.

21년 만에 복권된 허우더젠

지난 7월 13일 ‘천안문 4군자’의 한 사람인 류샤오보가 감옥에서 가석방된 지 한 달 만에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남은 3명의 근황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천안문 4군자는 1989년 6·4 천안문사태 때 천안문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연좌 단식농성을 벌이며 유혈사태를 막으려 했던 허우더젠, 류샤오보, 가오신, 저우둬를 일컫는다.

1989년 4월 개혁파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사망을 추모하면서 촉발된 천안문시위를 당국이 ‘반혁명 동란(動亂)’으로 규정하면서 계엄군 투입은 시간문제가 됐다. 지명수배 1, 2호였던 왕단(王丹), 우얼카이시(吾爾開希) 등과 함께 학생시위 지도부를 형성하며 ‘천안문의 꽃’으로 불린 차이링(柴玲)은 “머리가 잘리고 피를 흘릴 수 있지만, 광장은 빼앗길 수 없다”는 강경 발언을 이어갔다. 천안문광장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 역시 결사대를 조직해 화염병과 죽창으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강행할 경우 대규모 유혈충돌이 불가피했다.

천안문시위 막바지에 등장한 이들 4군자는 6월 2일부터 72시간의 절식(단식)을 선언하면서 계엄군과 학생 양측 모두를 천안문광장에서 철수시키고자 했다. 6월 4일 새벽 ‘광장청소’가 단행됐을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 계엄부대를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그렇게 계엄부대로부터 천안문광장 동남쪽에 한 가닥 퇴로를 열어준다는 데 동의를 받아냈다. 1990년 중국 당국이 공식발표한 천안문사태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875명. 류샤오보를 비롯한 천안문 4군자가 퇴로를 확보했기에 그나마 줄어든 사망자 숫자다. 중국인들이 류샤오보를 비롯한 이들을 ‘천안문 4군자’로 추앙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미국서 집필 활동하는 가오신

천안문사태 이후 이들의 인생행보도 변했다. ‘천안문 4군자’ 중 가장 유명인이었던 허우더젠은 유혈진압 직후 체포된 이듬해인 1990년 대만으로 돌려보내졌다. 대만과 마주한 푸젠성 푸저우(福州)에서 ‘어선’에 태워 돌려보내진 허우더젠은 대만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불법입경’죄로 곧장 체포됐다. 하지만 천안문시위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받아 벌금형만 받고 석방됐다. 천안문사태 이후 대만은 왕단, 우얼카이시 등 시위 주동자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허우더젠은 이후 1994년 뉴질랜드로 이민가서 역경(易經·주역) 연구에 몰두하면서 ‘2001 대종결’과 같은 예언서를 내기도 했다. 지금은 다시 중국에 돌아와서 문화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2011년에는 베이징 올림픽경기장에서 금지곡이었던 ‘용의 후예’를 부르며 사실상 정치적 복권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천안문사태 관련 발언은 일절 삼가고 있다.

류샤오보와 같은 베이징사범대 강사 출신으로 ‘사대주보(師大週報)’ 편집장을 지낸 가오신은 체포됐다가 풀려난 직후인 199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동안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하버드대에서 머물렀고, 지금은 미국 보스턴에 적을 두고 중국공산당과 관련한 활발한 집필을 하고 있다. 홍콩 명경(明鏡)출판사를 통해 ‘장쩌민 권력의 길’(1995), ‘장쩌민의 막료(幕僚)’(1997), ‘중국을 영도하는 신인물’(2003) 등 중국공산당 최고권력층을 분석하는 책들을 다수 펴냈다. 명경출판사는 재미 화교(華僑) 언론인 허핀(何頻)이 1991년 세운 출판사인데, 족집게 같은 정보력으로 여전히 ‘죽(竹)의 장막’에 가려진 중국 권력층 내부의 소식을 전해왔다. 가오신은 4군자 중 유일한 공산당원이었다. 가오신의 책은 한국에서도 2002년 ‘21세기 중국을 움직이는 최고 권력자들’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소개됐다.

중국서 사회봉사하는 저우둬

베이징대 사회학 연구원으로 베이징쓰통(四通)그룹 종합계획부장이었던 저우둬도 6·4 유혈진압 직후 도피했다가 당국에 의해 체포됐다. 저우둬는 계엄군이 ‘광장청소’를 단행한 그날 허우더젠과 함께 계엄부대로 달려가 학생들의 철수협상을 벌였던 주인공이다. 천안문사태 이듬해인 1990년 석방된 저우둬는 미국 하버드대에 먼저 정착한 가오신의 도움을 받아 1992년에서 1993년까지 1년간 하버드대에서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지냈다. 하지만 미국에 남는 것을 택한 가오신과 달리 저우둬는 1994년 가족과 친지들의 만류에도 중국으로 자진 귀국했다. 지금은 베이징에 살면서 농촌지역의 빈곤교사들을 돕는 ‘촉광공정’ 등 사회활동에 종사하면서, SNS 활동에도 비교적 적극적이다. 4군자 중 외국으로 떠난 허우더젠(대만)·가오신(미국), 오랜 구금생활을 한 류샤오보를 대신해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사람도 저우둬다.

‘6·2절식선언’을 류샤오보가 사실상 기초했다는 것과, 천안문 4군자 중 류샤오보와 가오신이 학생 설득을 맡았고, 허우더젠과 저우둬가 계엄부대와 협상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저우둬의 인터뷰를 통해 알려졌다. 그에 따르면, 허우더젠을 계엄부대와 협상 전면에 내세운 까닭은 가장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이고, 대만 출신이라 계엄군이 함부로 발포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류샤오보가 계엄부대와 협상에 나서겠다고 자원했으나, 성정이 불같아서 만류했다는 이야기도 털어놨다. 저우둬는 2004년 BBC 인터뷰에서 “허우더젠은 대만에, 가오신은 미국에, 류샤오보는 감옥에 있어 연락이 쉽지 않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지금도 매년 6월 4일이면 집에서 단식을 하면서 천안문 희생자들을 추모한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들의 다음 선택이 주목된다.

키워드

#국제
이동훈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