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의 압도적 위세와 인기는 누구나 인정하지만 아쉽게도 우물 안 얘기다. 와인, 위스키, 코냑, 보드카, 데킬라, 배갈, 사케 등 동서양의 강자들이 특유의 맛과 브랜드 스토리로 즐비한 세계 주류시장에서 한국의 소주는 마이너일 뿐이다. 표준화된 공정으로 대량 생산되는 희석식이든,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증류식이든 다르지 않다. 해외에서도 소주는 기껏해야 한국인들의 기호품이기 십상이다.

외신을 통해 전해오는 소주 관련 뉴스들은 그래서 대개 옆길로 간다. ‘강남스타일’이 뜨고 가수 싸이의 사진이 병 라벨에 붙고 나니 해당 소주의 해외 판매가 훌쩍 늘었다더라, 영국 신문 가디언에서 비중 있게 다룬 한국인들의 소폭(소주 폭탄주) 문화는 정말 기이하더라, 한국이란 나라에서 유럽산 돼지고기의 기름기 많은 벨리(belly, 우리 식으론 삼겹살) 부위를 거의 블랙홀 수준으로 싹쓸이해 가는데, 그게 다 소주 때문이라더라…, 대강 그런 가십(gossip)들이다.

와인과는 또 다른 한국 소주의 톡 쏘는 맛에 서구인들이 매료됐다거나, 사케의 매출을 제치며 소주가 뒤늦게 성가를 높이고 있다는 식의 기사는 없다. 그나마 소주 자체에 대한 뉴스를 고르자면, 포장과 디자인을 달리 한 한국의 전통 소주들이 신제품을 론칭하며 해외 경쟁에 뛰어들었다는 정도다. 그렇게 소주의 위상도, 소주에 관한 뉴스도 별 볼 일 없는 상황에서 소주에 관한 이례적 낭보가 최근 미국에서 전해졌다.

국내의 대표적 소주 생산업체인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가 2016년 미국에서 판매한 소주가 모두 1793만병인데, 그 증가폭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2014년 1360만병, 2015년 1540만병이었다. 지역이 어디든 그 정도면 가파른 성장세로 못 봐줄 이유가 없는데, 그 비결을 주류업체들은 ‘도수를 낮춘’ ‘과일맛’에서 찾고 있다. 소주를 더 부드럽게(도수), 덜 쓰게(맛) 만들었더니 현지인들도 좋아하더란 것이다. 소주의 세계화를 논하기에는 미약한 뉴스이기도 하고, 전례 없는 선전(善戰)에 고무된 소주 회사들의 마케팅 의지에 동화될 필요도 없지만, 가벼이 넘길 말은 아니다. 브랜드와 질(質) 양면에서 외국의 주요한 술들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한국 소주를 살려낼 강력한 힘이, ‘도수’와 ‘맛’의 조합과 조율에 담겨 있는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잠깐, 뉴스의 주인공인 희석식 소주의 제조 과정을 들여다보자. 제조의 기본 원리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다. 일단 녹말이나 당분을 함유한 곡물을 재료로 고농도의 에틸알코올을 만든다. 쌀, 보리, 밀이든 고구마, 감자든 관계없다. 표준화된 발효 과정을 통해 알코올을 만드는데, 재료의 질은 관계없다. 싸면 된다. 동남아 원산의 못생긴 감자 타피오카가 알코올 재료의 절대강자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95% 수준의 고농도 에틸알코올을 주정(酒精)이라 한다. 술의 정수(精髓)라니 참 멋지다. ‘술의 영혼(sprit)’이라는 서정적인 수사까지 동원될 때가 있는데, 쓰임새는 그리 서정적이지 않다. ㈜대한주정판매 홈페이지에 소개된 주정의 용도를 보면 소주, 청주, 위스키 등 술을 넘어 소독제, 식품살균제, 식초, 치약, 화장품, 구강청정제까지 전방위적이다. 그렇긴 해도, 주정에 대한 희석식 소주의 절대적 의존과 둘 사이의 질긴 인연을 보면, 주정이 ‘소주의 영혼’인 정도까지는 인정해줄 만하다.

도수와 첨가물의 조합이 성패 좌우

소주의 영혼인 주정이 그렇게 확보되면 이후 소주의 제조 공정은 거기서 거기다. 주정에 물을 타고, 맛과 향을 낼 첨가물만 넣으면 된다. ‘주정+물+첨가물’이면 소주다. 수많은 샐러리맨들이 퇴근 후 “처음이요!” “이슬이요!” 들뜬 목소리로 주문하는 소주들은 다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미국에서 선전하고 있는 과일맛 소주의 ‘더 부드럽게’와 ‘덜 쓰게’에 한국 소주의 힘이 담겨 있다고 한 것은 바로 그 단순한 구성과 공정 때문이다. 한국 소주는 외국에서 질로 승부하는 게 애당초 불가능하다. 술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재료와 숙성, 두 가지다. 얼마나 질 좋은 포도(와인·코냑), 쌀(사케), 수수(배갈)를, 얼마나 정성 들여 숙성(발효)하고 증류했느냐에 따라 술의 수준이 결정된다. 한국의 희석식 소주는 재료도, 숙성도 내세우지 못한다.

한국 소주의 수준은, 오로지 도수(주정의 희석 정도)와 첨가물(감미료와 향신료)의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 도수를 얼마나 부드럽게, 맛을 얼마나 쓰고 달콤하고 시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소주의 명운이 갈린다. 거의 무한한 선택이 가능한 도수와 첨가물의 배합 속에서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을 환상적 조합을 찾아내는 것이 한국 소주의 할 일이다. 시대가 선호하는 알코올 도수를 찾아내고, 시시각각 변하는 소비자의 입맛을 만족시킬 첨가물의 조합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소주는 과연 시대에 맞는 적정 도수와 첨가물의 조합을 찾아낼 만한 노하우와 숙련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게 문제다.

우리나라 증류식 소주의 시원은 몽골이 지배하던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희석식 소주는 1965년부터 본격화했다. 그때 정부가 새로운 양곡정책을 통해 증류식 소주의 제조를 금지했다. 소주는 당시 30도 알코올 농도의, 이른바 막소주였다. 막소주의 30도는 1973년 정부가 주정할당정책을 펴면서 깨진다. 할당된 주정으로 더 많은 소주를 만들기 위해 농도를 낮춰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25도 소주의 시대는 약 25년간 지속되다가 1990년대 후반 깨지는데, 그때부터 소주 회사들은 그야말로 사활을 건 도수 실험에 돌입한다. 그러니까 한국 소주는 30도의 막소주에서 시작해 이번에 미국 시장을 자극한 14도의 과일맛 소주에 이르기까지 줄잡아 50여년 동안, 무려 16도(30~14도)를 넘나드는 온갖 도수 실험을 해왔다. 16도에 이르는 스펙트럼의 알코올 농도를 갖는 술이 소주 말고 또 있겠는가. 소주는 그렇게 시대에 맞는 알코올 농도를 찾아내는 노하우를 역사적으로 체득했다.

첨가물의 최적 배합을 찾아내는 능력은 더 절박한 과제였다. 소주의 3대 요소인 ‘주정’ ‘물’ ‘첨가물’ 중에, 주정과 물은 거기서 거기다. 심해의 물을 끌어오건, 참숯으로 정제를 하건 물은 물이다. 주정은 그냥, 무색무취의 고농도 알코올이다. 그러니 남는 건 첨가물, 그중에서도 감미료다. 소주 회사들은 사카린 파동, 스테비오사이드 파동 등 온갖 신산(辛酸)을 겪으며 주세법이 허용하는 십여 가지의 첨가물을 배합하는 데 역시 50년의 세월을 투자했다. 상쾌한 소주 맛은 처절한 실험과 노력의 대가다.

그러나 최적의 도수와 첨가물 배합을 탐색하는 능력 말고도 빼놓을 수 없는 한국 소주의 힘이 하나 더 있다. 근대의 소주는 추운 이북에서 남한으로 넘어오며 실향민의 술로 출발했다. 이후로도 수십 년간, 전쟁과 궁핍을 견뎌내는 서민들의 바로 옆에서, 소주는 그들의 애환을 달래며 생존했다. 혀끝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는 능력이야말로 도수와 첨가물 배합을 넘어서는 한국 소주의 진정한 매력이고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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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형 작가·푸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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