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
[2476호] 201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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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영욕의 100년 한강대교가 이룬 것

▲ 오는 10월 7일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한강대교.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경. 폭음과 함께 ‘한강인도교(人道橋)’가 강물 아래로 주저앉았다. 6·25 남침 나흘째인 이날 새벽 0시 북한 공산군은 서울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에 국군은 공산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다리를 폭파한 것이다. 최대 800명의 사망자를 낸 한강인도교 폭파는 민족 최대 비극인 6·25전쟁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당시 한강인도교 폭파 작전을 지휘한 육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의 명을 받고 수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적전비행(敵前非行)’이란 죄목으로 총살당했다.
   
   지난 9월 18일 용산구 한강로 방향에서 찾아간 한강대교 보도 초입 바닥에 매설된 ‘한강인도교 폭파현장’이라고 적힌 삼각형 동판 하나만이 당시 비극을 기념하고 있었다. 그나마 한강대교 보수공사 현장 인부가 “저쪽에 작은 동판 하나가 있더라”고 알려줘 겨우 찾아낸 동판이었다. 당시 폭파로 끊어진 노들섬에서 노량진으로 이어지는 아치형 한강대교의 2·3·5번 경간(徑間)과는 전혀 동떨어진 엉뚱한 지점에 설치한 동판이지만, 그나마 비극의 현장을 기리는 거의 유일한 기념물이다.
   
   6·25전쟁 휴전 후 1958년 복원돼 ‘제1한강교’ ‘한강대교’란 이름으로 불린 한강인도교가 오는 10월 7일로 개통 100주년을 맞이했다. 한강대교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와 동작구 양녕로(동작본동) 사이를 잇는 총연장 840m, 폭 40m(각 20m)의 쌍둥이다리다. 한강다리 중 가장 짧은 다리지만, 일제강점기 때인 1917년부터 지금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품은 다리의 탄생 100주년이라 그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교량관리를 책임지는 서울시도 한강대교 개통 100주년을 맞아 ‘한강인도교 건립 100주년 기념 아이디어 공모전’과 ‘사진전’ 등 각종 기념사업을 준비 중으로 10월 노들섬축제에 맞춰 공개할 예정이다. 진희선 서울시 도시재생본부장은 “한강대교 건립은 100년 전 한강을 처음으로 걸어서 건널 수 있었던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했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첫 번째 다리는 한강철교(鐵橋)다. 국내 최초 철도인 경인선(京仁線) 철도 부설에 맞춰 1897년 착공해 1900년 개통된 철도 전용 다리다. 구한말 조선 조정으로부터 경인선 부설권과 한강교량 가설권을 따낸 주한 미국전권공사 제임스 모스는 한강철교와 나란히 행인이 다닐 수 있는 보도를 낼 계획이었다. 철도와 편도 1차선 도로가 동시에 놓여진 지금의 잠실철교와 같은 형태였다.
   
   하지만 착공 중 재정난에 봉착해 교량가설권이 일제가 세운 ‘경인철도합자(合資)회사’에 넘어가면서 이 계획은 비용절감과 공기단축을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1900년 한강철교 개통 이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다.
   
   
▲ 1917년 한강인도교 개통 초기 모습. 지금의 아치교와 다른 트러스교 형태다.

   정조 ‘배다리’ 놓던 곳
   
   사람들이 건널 수 있는 다리는 1916년 착공해 1917년 10월 개통된 한강인도교가 최초였다. 한강 최초 인도교는 과거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 화성(華城)으로 행차할 때 배다리(舟橋)를 놓던 코스로 정해졌다. 정조는 역대 임금들이 용선(龍船)을 건조해 한강을 건너던 것을 작은 배들을 모아 그 위에 가설교량을 설치해 건너는 식으로 간소화했다. 한강의 물흐름이 크게 꺾여 물살이 완만해져 너른 백사장을 갖고 있던 용산에서 노량진 구간에 배다리를 설치했다. 한강대교 남단의 노량진1동주민센터 자리에는 당시 배다리 설치를 관장하던 주교사(舟橋司)란 관청 터와 정조가 강을 건너 잠시 쉬어가던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란 정자가 여전히 남아있다.
   
   한강인도교가 놓인 구간은 한강 하중도(河中島)인 노들섬(중지도)이 사이에 있어서 공사가 비교적 쉽고, 공사비용과 공기를 줄일 수 있었다. 이에 한강인도교는 용산에서 노들섬까지 이어지는 길이 188m의 소교(小橋)와 노들섬에서 노량진까지를 연결하는 길이 400m의 대교(大橋) 두 부분으로 나뉘어 가설됐다. 이 중 강폭이 좁은 용산에서 노들섬은 일반다리 형태로,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노들섬에서 노량진까지의 구간은 선박통행이 가능하도록 교각 간격을 넓힌 트러스 형태로 지어졌다. 당시 대교 부설에 사용된 철구조물은 바로 옆 한강철교 건설 때 남은 것을 사용해, 한강인도교의 부설 초기 모습은 한강철교와 거의 흡사했다.
   
   한양대 건축학부 서현 교수는 “당시 한강인도교를 만들 때 북쪽은 모래사장이 있어서 교각을 촘촘히 박을 수 있었으나 남쪽은 상시 강물이 흐르고 있어 교각 위에 구조물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소교와 대교 사이는 노들섬 위에 둑을 쌓아 둑길로 연결했다. 서울시 교량안전과의 한 관계자는 “160m가량의 노들섬 둑길은 교량 길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1917년 개통한 한강인도교는 준공과 동시에 식민지 경성의 명물이 됐다. 한강다리 자살문제가 최초로 불거진 다리도 한강인도교였다. 조선총독부가 한강인도교 북단에 파출소를 설치해 다리 순찰을 강화하고, 다리 난간에 ‘잠시만 기다리라’는 뜻의 ‘일촌대기(一寸待機)’란 푯말을 써붙일 정도였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 김기림 시인이 발표한 ‘한강인도교’란 시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때때로 임자 없는 모자들이 란간에 걸려서는 ‘인생도 잘 있거라’고 바람에 펄럭기림니다/(중략)/‘잠간만 기다리서요’ 아마도 호적조사나 유물처분에 대한 이야기겠지요.>
   
   지금도 한강대교 양측 난간에는 자살방지를 위한 문구와 관할 동작경찰서 긴급전화번호(112)가 적혀 있다.
   
   하지만 경성의 명물 한강인도교는 1917년 준공된 지 8년 만인 1925년에 다리가 끊어지는 시련을 겪는다. 그해 7월, 한강의 물길을 바꿀 정도로 피해가 컸던 ‘을축년 대홍수’로 용산과 노들섬을 연결하는 소교가 유실되면서다. 이후 복구에 착수해 1930년 소교 복구를 마친 한강인도교는 1938년 다시 한번 모습을 크게 바꾼다. 1936년 일제의 ‘전차궤도부설계획’에 따라 폭이 협소한 노들섬에서 노량진 구간의 트러스교를 대체할 아치형 다리를 상류 측에 새로 놓은 것이다. 1938년 아치형 다리의 완공과 함께 기존 트러스교는 철거되면서 지금의 아치형 교량으로 바뀌었다.
   
   1950년 6·25전쟁 직후 한강인도교는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두 번째로 끊어졌다. 1953년 휴전 직후 끊어진 다리 위에 임시상판을 깔아서 사용했던 한강인도교는 1958년 5월 16일 완전 복구를 끝내면서 ‘한강대교’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복구된 한강대교를 참모들과 함께 건넜다. 한강대교 난간 시작점에는 ‘단기 4291년(1958년) 5월 복구’라는 동판이 붙어 있다. 공교롭게도 복구 3년 뒤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건너간 다리도 ‘한강대교’였다. 당시 헌병들은 혁명군의 선두에 선 해병대를 저지하기 위해 한강대교 남단, 노들섬, 다리 북단 3곳에 군용트럭으로 바리케이드를 쳤으나 끝내 저지에 실패했다.
   
   
▲ 1950년 6월 28일 이후 한강인도교.

   ‘한강의 기적’ 주역들
   
   박정희 소장이 한강대교를 건넌 뒤 한강에는 새로운 다리들이 속속 선보인다. 1965년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가 놓여졌고, 1969년에는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들어섰다. 한강교 다음에 연번을 붙인 이름으로 자연히 ‘한강대교’는 ‘제1한강교’가 됐다. 제2한강교는 광복 후 한국 기술진에 의해 완공된 최초의 한강교량이자 대형 토목구조물이었다. 노들섬을 지나는 한강대교와 같이 한강 하중도인 선유도를 통과하는 형태로 놓여졌다. 제3한강교는 경부고속도로의 진입도로로 놓인 다리로, 당초 폭20m 왕복 4차선 다리로 착공했다.
   
   하지만 착공 중 육군대령 출신 서정우 당시 건설부 국토보전국장(진성기업 대표)이, 평양 대동강에 폭 25m 다리가 놓인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단 1m라도 더 커야 한다”고 주장해 왕복 6차선, 폭 27m로 키운 경우다. 한남대교는 2004년 기존 교량 옆에 교량을 하나 더 놓는 식으로 확장해 왕복 12차선으로 한강다리 중 가장 폭이 넓다.
   
   양화대교와 한남대교는 모두 돈도 없고 기술도 없을 때 가설된 교량이라, 조선시대 청계천 위에 놓인 수표교와 같이 쉽고 빠르게 건설할 수 있는 거더(girder)교 형태로 놓여졌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때 부설된 양화대교, 한남대교, 마포대교(1970년), 잠실대교(1972년), 영동대교(1973년), 천호대교(1976년)가 정책목표 달성을 위해 저렴하고 빨리 놓을 수 있는 거더교 형태로 지어졌다. 마포대교는 여의도 개발, 잠실대교는 잠실 개발과 광주대단지(성남), 영동대교는 영동제2지구(강남) 개발, 천호대교는 한강교량 중 두 번째로 오래된 광진교 대체라는 정책목표 달성을 위해 놓였다. 오직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놓인 다리로, 그 과정에서 미적 요소는 철저히 배제됐다.
   
   당시 한강다리 대부분을 거더교 형태로 부설한 것은 한강인도교 폭파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에 따르면, 교각이 많고 경간이 짧은 거더교의 경우, 폭격으로 다리가 파괴되었을 때 복구가 용이한 장점이 있다. 한강인도교도 교각이 남아 있었기에 서울수복 후 임시상판을 올려 사용했다. 이런 목적으로 지은 대표적인 다리가 1976년 준공한 잠수교다. 잠수교는 고속터미널 반포 이전에 따른 교통수요 처리와 함께, 베트남 패망 후 공산화 위기가 고조되자 전시사령부인 용산미군기지와 강남을 최단거리로 이을 목적으로 놓였다. 한강 수면에 바짝 붙은 거더교 형태로, 크레인으로 다리상판을 들어올리면 선박통행도 가능토록 했다.
   
   경제성장과 함께 먹고살 만해지면서 한강교량은 덩치를 키우고 미관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우선 제1한강교가 1979년 확장에 착수해 1982년 기존 왕복 4차선 외다리에서 왕복 8차선 쌍둥이다리로 거듭나게 된다. 서울시 교량안전과의 한 관계자는 “노들섬을 기준으로 X자 형태로 확장했다”며 “아치형 다리를 기준으로 한강 상류 측이 구교, 하류 측이 신교”라고 했다. 지금의 쌍둥이 한강대교는 1982년 버전인 셈이다.
   
   또 성수대교(1979년)를 시작으로 성산대교(1980년), 원효대교(1981년), 동작대교(1984년), 동호대교(1985년), 올림픽대교(1990년) 등은 교각 숫자를 줄이고 교각 사이 간격을 늘린 장경간(長徑間) 교량으로 지어졌다. 각각 3·4호선 지하철용 철교와 함께 놓인 동호대교, 동작대교는 각각 트러스, 아치구조를 채택했다. 1986년에는 한강 수면에 바짝 붙인 잠수교를 롤러코스터처럼 가운데를 들어올려 한강유람선 운행이 가능하도록 개조했다.
   
   1981년 ‘88서울올림픽’ 유치와 함께 ‘한강종합개발사업’에 착수하면서 한강 교량은 일제히 이름을 바꾼다. 한강교량이 하나둘씩 계속 늘면서 작명상 어려움에 봉착한 것이다. ‘제1한강교’가 1984년 ‘한강대교’로 다시 이름을 바꿔단 것을 필두로, 제2한강교는 양화대교, 제3한강교는 한남대교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제4한강교’로 시작해 1970년 준공한 마포대교는 당초 ‘서울대교’로 불리다가 1984년 다시 이름을 바꿔 달았다.
   
   동시에 한강교량들은 불과 1㎞ 남짓 길이에도 대부분 ‘대교(大橋)’란 거창한 명칭이 달렸다. ‘대교’의 영문 표기를 어떻게 할지는 지금도 논란이 거듭되는 골칫거리다. 지금은 ‘daegyo(Br)’로 표기 중이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대한민국의 ‘큰 대(大) 자’ 콤플렉스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했다.
   
   
▲ 1958년 복구와 함께 ‘한강대교’로 이름이 바뀐 한강인도교. photo 조선일보 DB

   일제히 ‘대교’ 로 변경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성수대교 붕괴참사는 급하게 지어진 한강교량의 안전문제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앞서 1992년에는 신(新)행주대교가 건설 중 교각과 상판이 붕괴하는 사고가 있었다. 연이은 교량붕괴 사고로 한강교량에 대한 대대적 정밀안전진단이 실시됐고, 당산철교는 ‘붕괴위험’ 판정을 받는다. 1983년 준공된 당산철교는 한강철교, 잠실철교(1979년)에 이은 세 번째 철도용 교량으로, 상하부가 모두 트러스 구조로 돼 있었다. 결국 당산철교에 전면 철거 후 재시공 결정이 내려지면서 1997년 철거에 들어가 약 2년 반 동안의 공사를 거쳐 1999년 새로 개통됐다. 공사기간 중 당산철교를 지나는 지하철 2호선 운행이 중단되면서 이 구간은 셔틀버스로 대체했다.
   
   가장 최근 개통한 다리는 서울 강동구 암사동과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을 잇는 구리암사대교로 2014년 준공됐다. 현재 서울시 관내의 한강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다리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한강대교를 비롯해 모두 27개에 달한다. 철도교와 도로교를 모두 포함한 숫자로, 이 중 순수 철교는 한강철교·당산철교·마곡대교(철교) 등 3개, 도로철도 복합교량은 잠실철교·동작대교·동호대교·청담대교 등 모두 4개다. 아래위 복층으로 놓인 잠수교와 반포대교는 별개의 다리로 계산한 것이고, 한강을 동서로 이어주는 노량대교 등은 제외한 숫자다. 현재 공사 중인 월드컵대교가 오는 2021년쯤 완공되면 서울시 관내에 들어서는 28번째 한강교량이 된다. 모두 한강대교의 후예들이다.
   
   하지만 한강대교는 여전히 접근이 어렵다. 2009년 한강대교 북단 한강북고가차도가 철거돼 접근성이 개선됐다지만, 남단의 노량북고가차도는 여전히 접근의 걸림돌이다. 한양대 건축학부 서현 교수는 “한강대교는 그 당시 구조역학이 최대한 발현된 다리로 구조적 논리가 뚜렷하면서도 우아한 형태를 가진 좋은 결과물”이라며 “다리를 확장하면서 남단의 보행자 동선이 모두 끊겨 있는데 보행자 동선을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하는 것이 지금 한강대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한강교량 기능개선 어떻게
   
   손 놓은 서울시… 교통정체 해소 위해 램프 구조개선 시급
   
▲ 2010년 착공 후 7년째 공사 중인 월드컵대교. photo 성형주 조선일보 기자

   한강대교 개통 100주년을 맞이해 한강교량의 기능개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그간 한강다리 폭을 넓히고, 진출입램프 구조를 개선하는 식으로 조금씩 개선을 시도해왔으나 폭증한 교통량을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특히 한강대교에서 동작대교를 지나 반포대교에 이르는 용산구 통과 구간은 기형적인 교량 접속램프 구조 탓에 상습정체 구간으로 악명이 높다.
   
   이는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 강변북로 성산대교에서 천호대교까지를 왕복 8차선으로 확장개통하면서 기존 도로에 연결된 교량 접속램프를 그대로 방치한 탓이다. 현재 강변북로 일산에서 구리 방향으로 이어지는 구간 중 성산대교ㆍ양화대교ㆍ서강대교ㆍ마포대교ㆍ원효대교ㆍ한강대교ㆍ동작대교ㆍ반포대교ㆍ청담대교 등 대부분 교량이 고속차선인 1차로에서 교량으로 진입하는 구조다. 이로 인해 한강다리 진출입로가 바깥쪽 차선과 연결될 것으로 짐작하고 달리던 차량이 갑작스레 차선을 변경하면서 차량흐름이 엉키는 아수라장이 매일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차선변경에 따른 교통사고 위험은 물론 안쪽 고속차선 주행차량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경기도 일산에서 구리 방향의 강변북로 해당 구간은 사실상 바깥쪽 저속차선이 고속차선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한강다리 관리 주체인 서울시는 오세훈 전 시장 재임 때인 2011년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해 1차로와 접속램프가 이어지는 일부 한강다리 구조를 변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안쪽 고속차선인 1차로와 이어지는 교량 접속램프를 바깥쪽 저속차선으로 바꾸는 계획으로, 가장 정체가 심한 동작대교와 성산대교 2개 다리가 선정됐다. 램프 구조를 바꾸면 강변북로 일부 차선을 추가 확장할 수도 있었다.
   
   오세훈 시장 때 서울시가 입안한 동작대교와 성산대교 진출입램프 구조변경 계획은 당시 서울시 디자인위원회 심의까지 통과했다. 서울시 측은 2011년 “2017년 강변북로 도로폭 확장사업이 완공되면 올림픽대로와 함께 한강변 교통흐름의 주축인 강변북로의 교통체증이 완화됨은 물론 안전성이 강화된 램프가 설치돼 시민들의 불편과 사고위험이 동시에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보도자료까지 발표했다. 오세훈 전 시장은 ‘한강르네상스’를 표방하며 선박 통과가 힘든 양화대교 구조를 변경하고, 한강에서 세 번째로 오래되고 교통량이 적은 광진교를 보행자교로 바꾸는 등 역대 시장 가운데 한강교량 유지보수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한강다리 기능개선 계획은 박원순 시장 취임과 함께 백지화됐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에는 전임 오세훈 시장의 한강르네상스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하면서 계획이 흐지부지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오세훈 시장 때인 2010년 서부간선도로와 성산대교의 상습정체를 해소하기 위해 착공한 월드컵대교도 7년째 차일피일 지연되고 있다. 1980년 최초 착공해 16년이 지난 1996년 준공돼 한동안 ‘서울의 흉물’이란 소리를 듣던 서강대교의 전철을 밟는 중이다.
   
   월드컵대교는 당초 완공 예정인 2015년은 이미 훌쩍 넘겼고, 오는 2021년에야 완공될 예정이다. 총연장 18㎞로 국내 최장 해상교량인 인천대교도 2005년 착공한 지 불과 4년 만인 2009년 완공됐다. 1975년 착공해 착공 10개월 만에 완공한 잠수교는 전설 속 이야기다. 총연장 1.98㎞, 왕복 6차로의 한강다리를 건설하는 데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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