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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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이 다른 달팽이 세 마리가 출발신호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달팽이들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교복을 입은 세 명의 학생들이 모니터 앞에 앉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달팽이들이 결승점에 가까워지자 학생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목한 달팽이를 응원하는 학생도 있었다. 결승점에 한 달팽이가 먼저 다다르자 학생들의 입에서 환호성과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학교 앞 PC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같은 장면은 어른들이 벌이는 도박 게임의 축소판이다. 캐릭터만 귀여운 달팽이를 썼을 뿐 경마 도박처럼 실제 돈이 오간다. 포털에서 검색하면 수십 개씩 뜨는 달팽이경주 게임 사이트는 가입에 아무런 제약도 없다. 성인인증절차가 없어 미성년자가 얼마든지 가입할 수 있다. 오히려 미성년자를 겨냥해 만든 듯한 달팽이경주, 사다리타기, 소셜그래프 등 규칙이 단순하고 쉬운 도박 게임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청소년들을 유혹하고 있다.

지난 9월 25일 달팽이경주에서 돈을 잃은 고등학생 차현수(가명·18)군을 만났다. 차군은 “몇 달 전에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사이트에 접속해 달팽이경주게임을 시작하게 됐다”면서 “용돈을 받아 여유자금이 생기면 친구들과 함께 사이트에 접속해 게임을 한다”고 말했다. 차군은 초반에 베팅금액의 몇 배를 벌며 재미를 보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돈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다. 달팽이경주를 즐기는 청소년들은 보통 한 게임에 1만~2만원을 건 후 승자 한 명이 판돈을 다 갖는다. 차군이 돈을 잃으면서도 달팽이경주 게임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돈을 땄을 때의 짜릿한 기분을 잊지 못해서다. 성인이 도박을 끊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얼마 전 기자가 취재했던 대구소년원에서 소년범들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절도나 사기죄로 들어온 몇몇의 소년범들은 도박자금을 구하기 위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했다. 그들이 했던 도박도 달팽이경주 등과 같은 단순한 게임이었다.

유튜브에 관련 영상 수만 개

청소년들 사이에서 달팽이경주 못지않게 인기가 많은 도박게임이 ‘소셜그래프’다. 이름만 들어서는 당최 무슨 도박인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이 역시 중독성이 강한 도박 게임이다. 방식은 이렇다. 게임 사이트에 들어가 계좌이체 등으로 돈을 입금하면 그래프 막대기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 그래프 막대기는 두 배, 세 배, 네 배로 표시된 지점 중 어디서 멈출지 모른다. 이 그래프가 배당률을 나타내는 특정 지점에 멈추기 전 ‘즉시 출금’ 버튼을 누르면 표시된 배당률에 따라 입금한 돈의 두 배, 세 배로 돈을 딸 수 있다. 하지만 그래프가 멈출 때까지 출금 버튼을 누르지 못하면 입금한 돈은 다 날리게 된다. 유튜브에서 ‘소셜그래프’를 검색해 보니 게임 방법부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려주는 영상목록이 끊임없이 나왔다. 소셜그래프 관련 영상만 무려 1만개가 넘었다. 인터넷에서 도박 관련 정보를 너무 손쉽게 검색할 수 있지만 불법도박 사이트의 운영자들이 대부분 서버를 해외에 두고 있어 단속이 쉽지 않은 형편이다.

앞서 나온 차군은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직업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수입과 평판이 좋은 전문직이 떠올랐지만 차군은 “그건 공부 잘하는 소수의 친구들이 선호하는 직업이고, 요즘 떠오르는 직업이 바로 ‘토사장’이다”라고 말했다. 생전 처음 듣는 단어였다. 차군에 따르면 ‘토사장’은 불법 스포츠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차군은 페이스북, 인터넷 게시판 등을 살피면 토사장이 되고 싶어 질문을 남기는 친구들이 정말 많다고 했다. 청소년들이 토사장이 되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다. 바로 엄청난 수입 때문이다.

토사장이라고 불리는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자들의 수입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불법적인 도박사업에 공식적인 수입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차군 같은 청소년들은 토사장들이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며 동경한다. “포털사이트의 블로그나 지식인에만 들어가 봐도 토사장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도박 사업만큼 돈을 쉽게 많이 버는 일이 어디 있나.”

청소년 도박중독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중독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이 급속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에 따르면 청소년 4명 중 1명은 돈내기 게임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수치는 전국 청소년 평균 흡연율인 6.3%보다 높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가 전국 중1~고2 학생 1만4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5년 청소년 도박문제 실태조사’에 따르면 5.1%가 도박에 빠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약 4%는 위험군에 속하고, 약 1.1%는 문제군으로 분류된다.

위험군은 도박 경험이 있으며 경미한 수준의 도박증상을 보이는 등 심리·사회·경제적 피해 등이 발생한 상태다. 문제군도 1%에 달하는데 이는 반복적인 도박 경험이 있으며 도박 조절 실패와 이에 따른 피해가 심각한 수준의 학생들이다. 학교 밖 청소년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무려 20%(위험군 10.8%, 문제군 9.2%)가 도박중독에 빠져 있는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는 이 수치를 전체 학생 수에 대입해 도박중독을 겪고 있는 청소년을 3만명 정도로 추정했다.

청소년들이 가장 자주하는 도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인형뽑기 등 뽑기 게임이 47.5%로 1위를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카드나 화투 게임’(15.8%), ‘스포츠 경기 내기’(14.4%) 등으로 나타났다. 도박을 즐기는 시간을 3개월 기준으로 하면 온라인용 내기 게임이 87.3분으로 가장 길었으며 한게임, 넷마블 등에 있는 카드·화투 게임이 75.5분으로 그 뒤를 이었다. 도박을 즐기는 시간이 가장 긴 것은 스포츠 경기 내기로 660분에 달했다. 청소년들이 도박에 쓴 비용은 3개월간 평균 2만원이었으며, 최대 960만원을 쓴 학생도 있었다. 도박 비용 중 잃은 돈만 따지면 3개월간 평균 1만원 정도였고, 가장 많게는 3개월간 400만원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청소년들이 도박을 처음 접하는 경로는 선·후배의 소개, 온라인 게시글 등이었으며 60.9%가 스마트폰을 이용해 도박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들이 주로 즐기는 불법도박 게임 종류. ⓒphoto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청소년들이 주로 즐기는 불법도박 게임 종류. ⓒphoto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도박 은어로 은밀한 대화

도박으로 인해 발생하는 청소년 범죄 역시 심각하다.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절도나 사기와 같은 2차 범죄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진호(가명·21)씨는 고3이던 2014년 우연히 도박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지난해 범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북 익산경찰서에 따르면 박씨는 불법 도박 사이트가 문을 연 2014년 2월부터 2016년 초까지 3억원가량을 도박을 하는 데 사용했다. 박씨는 도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부터 일용직까지 안 해본 일이 없고 심지어 부모 돈에까지 손을 댔다. 결국 부모 부동산을 몰래 담보로 제공하고 억대의 돈을 융자받아 도박으로 탕진했다. 그는 도박을 끊기 위해 수차례 도박센터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경찰서에서 “도박의 희열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청소년이 인터넷 도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기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올해 초 제주 서부경찰서는 도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온라인 게시판에 ‘게임머니를 판매한다’는 허위 글을 올려 39명에게서 526만원을 챙긴 혐의로 김이수(가명·20)씨를 붙잡았다. 김씨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인터넷 스포츠 토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3년간 인터넷 도박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빌린 돈은 무려 1억5000만원에 달했다. 결국 김씨가 경찰에 붙잡히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재산을 담보로 빚을 갚아야 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인터넷 도박으로 붙잡힌 10대 피의자는 지난해 347명으로 2014년 110명, 2015년 133명에 비해 크게 상승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도박과 관련된 은어도 늘고 있다. 부모와 학교 교사들이 자신들의 도박행위에 대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도박에 빠진 청소년들이 나누는 대화를 재구성해 보면 이런 식이다. “여긴 ‘먹튀’ 사이트 아니지? 오늘 ‘총알’ 충분히 준비했어?” “응, 오늘만 하고 여길 ‘졸업’할 거다.” “그게 말처럼 쉽냐? ‘픽’ 좀 알았으면 좋겠다.”

도박 예방교육 턱없이 부족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먹튀, 총알, 졸업, 픽 등은 모두 도박 관련 용어들이다. ‘먹튀’는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 당첨금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운영을 중단하는 행위를 말한다. ‘총알’은 도박 자금을 의미하고, ‘졸업’은 돈을 많이 딴 사람이 더 이상 사이트 이용을 하지 않는 경우를 뜻한다. ‘픽’은 도박 결과에 대한 정보이고, ‘유출픽’은 픽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말한다. 상담센터를 통해 도박에서 벗어난 고등학생 이민기(가명·18)군의 말이다. “사실 도박은 부모와 선생님에게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친구들끼리 은어나 줄임말로 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도 도박 예방교육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더군다나 선생님들도 도박에 관련된 학생들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도박에 빠진 친구들을 많이 봤다.”

실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도박 예방교육은 미미한 실정이다. 2016년 기준 도박 예방교육을 받은 학교 비율은 초등학교 1.2%, 중학교 7.0% 고등학교 7.4%에 그쳤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임정민 예방교육과장은 “가치 판단이 미숙한 청소년들의 도박문제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학교나 센터와 같은 공공기관의 예방교육은 필수”라고 말했다. 일차적으로 가정에서부터 부모가 관심을 갖고 살펴야 한다는 전문가 의견도 많다. 이홍석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교수의 설명이다. “겉으로 표시가 나는 술·담배와 달리, 인터넷 도박중독은 자녀의 스마트폰 사용 실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부모가 알아채기 힘들다. 특히 학업에만 매몰된 아이는 뇌 발달이 더뎌 도박에 빠지기 쉽다. 뇌는 언어와 감정 소통을 통해 발달하기 때문에 집에서 부모는 자녀와 소통하고, 학교에서도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가치관이 완전히 정립되지 않은 청소년기의 도박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에 등록된 관리 대상자 현황을 살펴보면 19세 미만 청소년 비율은 2013년 0.2%에서 2015년 1.8%로 9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20~30대 관리 대상자 중에서도 절반 이상(57.8%)은 10대 때 처음 도박을 접했다고 응답했다. 그만큼 청소년기에 시작한 도박은 끊기가 매우 어렵다는 의미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까지는 전두엽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큰 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뇌에서 전두엽은 충동을 억제하고 고등 기능을 담당한다.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임정민 과장은 청소년이 도박을 할 경우 전문가를 찾아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청소년들은 발달적 특성에 비춰 도박이 주는 자극, 보상, 중독성 때문에 도박에 취약하다. 부모는 자녀가 도박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반드시 도박 관련 센터나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

청소년 도박문제 자가진단표

지난 1년 동안 자신이 아래의 경험들을 겪었는지, 겪었다면 얼마나 자주 겪었는지 해당 보기번호에 체크표시(V) 하면 된다. 돈내기 게임이란 카드나 화투, (인형 등) 뽑기, 스포츠 경기 내기, 복권·토토 등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에서 돈 또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물건을 걸고서 승자가 그 돈(물건)을 가져가고, 패자가 잃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각종 내기 성격의 게임을 의미한다.

없다(0점)

가끔 있다(1점)

자주 있다(2점)

거의 항상 있다(3점)

➊ 돈내기 게임 때문에 단체 활동이나 연습에 빠진 적이 있나요?

➋ 돈내기 게임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을 어긴 적이 있나요?

➌ 돈내기 게임을 위해 계획을 세운 적이 있나요?

➍ 돈내기 게임 때문에 기분이 나빴던 적이 있나요?

➎ 전에 잃은 돈을 되찾기 위해 다시 돈내기 게임을 한 적이 있나요?

➏ 돈내기 게임 하는 것을 부모나 가족 또는 선생님에게 숨긴 적이 있나요?

➐ 돈내기 게임으로 인해 내게 문제가 생겼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청소년 도박문제 자가진단표(CAGI) 추가 2문항. 아래 두 문항은 응답 보기가 위와 다르다.

없다(0점)

1~3회 있다(1점)

4~6회 있다(2점)

7회 이상 있다(3점)

➑ 밥이나 옷, 영화표 구입 등에 써야 할 용돈을 돈내기 게임에 쓴 적이 있나요?

➒ 돈내기 게임을 위해 남의 돈이나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몰래 가져온 적이 있나요?

0~1점

지난 1년간 돈내기 게임 경험이 없거나 돈내기 게임으로 인한 피해나 폐해가 전혀 발생하지 않은 상태로, 만약 돈내기 게임 경험이 있다면 여가 목적으로 조절 가능한 수준에서 돈내기 게임을 하고 있는 상태.

2~5점

지난 1년간 돈내기 게임 경험이 있으며, 경미한(Low) 수준에서 중증도(moderate) 수준의 조절 실패와 그로 인해 심리·사회·경제적 폐해 등이 발생한 상태로, 문제 수준으로 진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의심되는 상태.

6점 이상

지난 1년간 반복적인 돈내기 게임 경험이 있으며, 심각한 수준의 조절 실패와 그로 인한 심리·사회·경제적 폐해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한 상태로, 도박중독 위험성이 높은 상태.

자료: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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