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역 민자역사, 역사 오른쪽이 과거 인천백화점이 있었던 민자역사다. ⓒphoto 이동훈
동인천역 민자역사, 역사 오른쪽이 과거 인천백화점이 있었던 민자역사다. ⓒphoto 이동훈

지난 9월 25일 찾아간 동인천역 주위에는 현수막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님, 영세상인 죽이시려면 차라리 우리를 동인천역에서 산 채로 화장(火葬)해 주세요’ 같은 섬뜩한 내용의 현수막도 보였다. 동인천역 남광장으로 이어지는 출입구 절반은 공사로 인해 막혀 있었다. 동인천역 아래 지하상가에서 역사(驛舍)로 들어가는 지하출입구 역시 공사로 을씨년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동인천역 민자(民資)역사 공사 때 임시역사로 지어진 건물을 활용한 1번출구 쪽은 과거 백화점 주차타워로 쓴 철골이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고 후미지고 외져 들어가기조차 꺼려졌다. 리모델링을 한답시고 2010년부터 무려 7년째 이어지는 상황이다. 선거철이면 유력 대선후보들이 군중들을 모아놓고 지지를 호소하던 인천 최대 철도역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동인천역은 국토교통부와 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시설공단의 골칫거리가 된 지도 오래다. 오는 12월 31일로 30년간의 민자역사 점용기간이 끝나는데, 점용면적은 1만2278㎡로 전국 16개 민자역사 가운데 가장 작은데도 불구하고 권리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지역상공인 주도로 개발된 터라 대기업 주도로 개발한 서울역(한화역사), 영등포역(롯데역사)과 달리 단일창구도 없다. 국토부 철도정책과의 한 관계자는 “동인천역 민자역사는 경영악화로 2004년 이전부터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있고 권리관계가 많이 설정돼 있어서 국가 귀속도 곧장 안 되는 상태”라고 말했다.

심지어 동인천역 민자역사 건물 1층에는 오는 12월 31일로 점용기간이 끝나는 마당에 상가 분양사무소까지 차려져 있다. 그 옆에는 코레일이 게시한 ‘점용허가기간은 오는 2017년 12월 31일 만료되며 연장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라고 적힌 경고 현수막이 걸린 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상가 투자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국토부 철도정책과의 한 관계자는 “법적으로 분양업체와 분양자 사이의 사인(私人) 간의 계약이기 때문에 그간 국가가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며 “반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피해를 보는 측면이 있어서 분양사를 상대로 공무집행방해나 사기죄 등 법적으로 대응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축현역, 상인천역, 동인천역

국토부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수년째 공실로 비어 흉물로 전락한 동인천역 민자역사의 ‘원상회복’으로 일단 방향을 정한 상태다. 국토부의 한 관계자는 “원상회복이라 하면 민자역사 건물이 없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 즉 건물철거를 뜻한다”고 했다. 다시 1989년 민자역사를 올리기 이전의 동인천역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동인천역의 전신은 1899년 국내 최초 철도인 경인선 개통과 함께 들어선 축현(杻峴)역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로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1883년 개항(開港)한 인천은 일찍이 일본과 청국의 조계(租界)로 지정됐다. 옛 인천시청이 있었던 지금의 인천 중구청 일대다. 축현역은 조계지 북쪽의 조선인촌에 있던 역이었다. 하지만 조계지가 팽창하면서 일제는 지금의 자유공원(옛 각국공원)이 있는 응봉산 아래로 홍예문(虹霓門·인천시 유형문화재)을 뚫어 남쪽의 일본조계와 북쪽의 축현역을 연결시켰다. 이와 함께 지금의 동인천 청과시장(참외전) 주차장 터에 있던 축현역을 지금의 동인천역이 있는 자리로 확장 이전하기에 이른다.

그때부터 축현역은 주로 화물을 취급해온 경인선의 시종착역 인천역을 대신해 인천의 대표 여객역사로 기능해왔다. 이용객이 급증하면서 1926년에는 일본식 이름인 ‘상(上)인천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히 인천역은 ‘하(下)인천역’이 됐다. 광복 후 다시 ‘축현역’으로 이름을 바꾼 상인천역에 ‘동인천역’이란 지금의 이름이 붙은 것은 1955년이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전체 지도를 놓고 보면 동인천역은 오히려 서쪽에 가깝지만, 당시 인천 원도심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다고 해서 당시만 해도 ‘동인천역’이란 이름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교통평론가 한우진씨는 “동인천역은 상업기능이 일찍부터 발달하고 연계교통이 잘 돼 있어 인천역보다 더 커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동인천역 앞은 광복 직후에도 줄곧 인천 최대 상권을 형성했다. 역 북쪽 철도연변으로는 한때 ‘양키시장’으로 불린 인천 최대 혼수시장인 중앙시장과 송현시장이 있었다. 역 남쪽으로는 청과시장이 있었다. 인천에서 가장 먼저 지하상가가 생긴 것도 동인천역 일대다. 동인천역 아래에서 답동사거리까지 줄잡아 1㎞ 남짓한 거미줄 같은 지하도 좌우로는 옷가지와 신발, 가방, 화장품 등 잡화를 판매하는 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서울 을지로지하상가와 같이 당초 유사시 방공호로 뚫린 지하도지만 1963년 역전 지하도(굴다리)를 시작으로 상인들이 하나둘 자리 잡으면서 인천을 대표하는 지하상가가 됐다. 1968년 경인고속도로 개통 후 고속버스터미널도 동인천역 앞에 있었다. 인천에서 만난 개인택시 기사는 “한때 인천의 명동으로 불리던 곳”이라고 했다.

지금은 흉물이 된 동인천역 민자역사가 들어선 것도 서울역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다. 서울역에 민자역사(선상역사)가 생긴 것은 1988년이고, 동인천역 민자역사는 이듬해인 1989년 문을 열었다. 1990년 문을 연 영등포역 민자역사보다도 1년 앞선다. 국토부 철도정책과의 한 관계자는 “동인천역은 주변 상인들이 주식회사를 만들어 설립한 민자역사”라며 “지금도 개발업체와 건설사 등이 주요 주주로 있다”고 했다. 1989년 동인천역 위에 문을 연 인천백화점은 개관 당시만 해도 인천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었다. 1979년 인천 최초 백화점으로 개관한 남동구 간석동의 희망백화점(올리브아울렛), 인천 부평구의 동아시티백화점(현 롯데백화점 부평점)과 함께 한때 인천 3대 토종 백화점으로 불리며 번성을 구가했다.

동인천역의 전신 축현역.
동인천역의 전신 축현역.

상권 부활 없이 백약 무효

하지만 1989년 4월, 인천백화점이 문을 열 즈음 동인천역 상권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 있던 인천시청이 1985년 남동구 구월동에 신청사를 지어 떠나버린 뒤였다. 1997년에는 원도심에 속했던 남구 용현동의 시외버스터미널마저 신도심인 남구 관교동으로 떠나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관교동 인천종합터미널 자리에는 같은해 11월, 인천 최대 규모 신세계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최대 위기가 닥쳤다. 쇼핑객들이 좁고 불편한 동인천역의 백화점 대신 밝고 쾌적하고 주차장도 널찍한 새 백화점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1999년 무려 56명의 사망자를 낸 동인천역 앞 호프집 화재참사로 동인천역 일대 상권은 완전히 몰락했다. 당시 대부분 고등학생이었던 사망자를 기리는 기념비는 동인천역 앞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앞에 서 있다. 급기야 동인천역 위의 인천백화점도 2001년 10월 폐업 수순을 밟고 문을 닫는다. 이후 인천백화점은 엔조이쇼핑몰이란 동대문식 의류상가로 업종을 전환한다. 하지만 분양형 의류상가의 끝물에 들어선 엔조이쇼핑몰 역시 2001년 개업한 지 6년 만인 2007년 문을 닫고 만다. 의류쇼핑몰로 전환한 뒤 민자역사건물 4~5층에 실내 화상 경륜경정장을 도입하는 등 업태 변화를 시도해 봤으나 모두 실패했다. 경륜경정장 도입은 결과적으로 한탕을 노린 도박꾼과 취객만 유인하는 결과를 초래해 동인천역의 슬럼화를 가속화시켰다는 지적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에는 동인천역까지 이어지는 경인선 복선철로를 복복선철로로 확장해 기존에 주안역까지만 들어오던 경인선 급행전철을 동인천역까지 연장했다. 1965년 경인선 복선 준공 후 40년 만의 변화였다. 하지만 경인선 급행의 경우 일반열차(60분)에 비해 급행열차(47분)의 시간단축 효과가 크지 않고, 편성도 띄엄띄엄 돼 있어 동인천역 부활에 큰 기여를 못 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출범 후인 지난 7월 7일부터 기존 경인선 급행전철보다 정차역 숫자를 더 줄인 특급전철을 도입해 용산역에서 동인천역까지 투입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용산에서 동인천역까지의 소요시간은 40분대로 줄었다. 하지만 특급전철의 운행시간이 출퇴근 시간을 벗어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고, 편성도 시간당 1대, 왕복 18회에 불과해 동인천역을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동인천역 민자역사 문제는 동인천역 상권 쇠퇴와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동인천역 부활의 열쇠를 쥔 민자역사의 활용방안을 두고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 최대 고민이다. 백화점과 동대문식 의류상가에 실패한 뒤 인근의 인천항 여객터미널로 입항하는 중국 관광객을 겨냥해 사후면세점을 세우는 방안도 최근까지 검토됐었다. 하지만 중국 측의 사드(THAAD) 보복 조치로 중국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사실상 백지화됐다. 국토부 철도정책과의 한 관계자는 “동인천역의 경우 워낙 권리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결정을 내려도 실제 진행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며 “향후 철도공공성 강화, 인천시의 ‘동인천 르네상스 프로젝트’와 연계해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사용하는 공공시설로 개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 철도와 함께 태어난 동인천역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주목된다.

동인천 르네상스 프로젝트 어떻게…

동인천역 일대 중구·동구로 나눠져… 행정구역 통합이 먼저

동인천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유정복 인천시장. ⓒphoto 인천시
동인천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유정복 인천시장. ⓒphoto 인천시

인천광역시도 오래전부터 인천 원도심의 중심인 동인천역 처리를 두고 고민해왔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지난 2월, 동인천역 역세권을 재개발해 최고 80층 높이의 주상복합을 비롯, 5816가구의 기업형 임대주택(뉴스테이)을 짓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동인천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 4월에는 ‘동인천 르네상스’를 위해 인천동구청을 비롯한 관계기관들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인천 르네상스’는 공간적 범위가 동인천역 북광장 일대에 그쳐 기존 중심지이자 흉물로 전락한 민자역사가 있는 남광장 일대가 그대로 방치되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인천시 도시균형건설국의 한 관계자는 “남광장이 있는 중구쪽은 반대가 많았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에는 새 정부의 전면 재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탓에 기존 계획마저 부분 개발로 축소 수정됐다.

동인천역 일대의 체계적인 개발이 지지부진한 데는 동인천역을 기준으로 경인선 철로 남쪽은 인천 중구, 철로 북쪽은 인천 동구로 행정구역이 이원화되는 이유도 있다. 지금도 동인천역 남광장 일대는 중구가, 북광장 일대는 동구가 관할한다. 동인천역의 주출입구(2·3번출구)가 있는 남광장은 원도심 쇠퇴와 민자역사 공사로 을씨년스럽고, 북광장은 광장은 너른 데 반해 정작 출입구(4번출구)는 개구멍마냥 협소하다. 이에 인천에서는 쇠락한 동인천역 일대의 체계적인 재개발을 위해서는 중구와 동구를 합쳐 관할 행정기관부터 일원화하는 것이 먼저라는 얘기가 오래전부터 나왔다. 실제 중구와 동구는 이명박 정부 때 행정구역 통폐합 대상으로도 오른 바 있다.

특히 인천 동구의 경우 인구가 7만명가량에 불과하다. 강화군과 옹진군 등 도서지역 자치군(郡)을 제외한 인천의 8개 자치구 가운데 가장 적다. 중구는 인구가 11만명가량이지만, 실상은 생활권이 전혀 별개인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 인구 6만6000여명을 포함한 터다. 육지에 있는 인천 중구의 인구만 따지면 5만명에 불과하다. 육지 인구만 따지면 인천 자치구 가운데 인구가 가장 적다는 동구보다도 적다. 하지만 중구와 동구는 각각 자치구라는 이유로, 자치구청장을 별도로 뽑고 자치구 의회까지 설치하고 있다. 사공은 많은데 가운데 끼여 있는 동인천역은 점차 쇠락하고 있는 셈이다. 인천시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리가 걸려 있는데 자치구 통합이 말처럼 쉽겠느냐.”

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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