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
[2482호] 2017.11.13

244개 성씨(姓氏) 한데 모인 뿌리공원 20년

▲ 대전 중구에 위치한 뿌리공원 전경. 약 12만5000㎡의 부지에 244개 성씨 조형물이 자리 잡고 있다. photo 신현종 조선일보 기자
절기로는 입동(立冬)이지만 낮 최고기온이 20도까지 올라 따뜻했던 지난 11월 7일, 대전 중구 ‘뿌리공원’에는 단풍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대전 남쪽 만성산과 유등천이 만나는 곳에 있는 뿌리공원이 조성된 것은 1997년, 올해로 꼭 20년이 지났다. 해마다 뿌리공원을 찾는 관람객도 130만명이 넘는다. 12만5000㎡(3만7000평) 넘는 공원이 수려한 경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뿌리공원의 진가(眞價)는 광장 너머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보면 알 수 있다.
   
   마침 이날 뿌리공원에는 10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기념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뿌리공원이 한데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자리에 새로 세워질 성씨 조형물의 제막식을 가지는 의성김씨 문중 사람들이었다. 의성김씨의 역사와 문중 인물들을 소개하는 유래문(由來文)을 읽고 조상에게 알리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내는 문중들 사이로 두 개의 원이 얽힌 조형물이 보였다. 다소 현대적인 디자인의 조형물에 대해 의성김씨 대종회에서는 “미래지향적인 조형물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의성김씨 대종회(大宗會) 김경림 회장의 설명이다.
   
   “큰 원과 작은 원이 얽혀 있는 형태는 문중의 종친 개개인의 희망이 문중 전체와 어우러져 화합한다는 뜻입니다. 원의 형태를 통해 영원히 번영한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보통 문중의 조형물을 만들 때는 돌 같은 재료를 사용해서 전통적인 형태를 만들기 마련인데 일부러 스테인리스를 써서 현대적인 느낌을 준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메시지도 담았습니다. 다음 세대의 의성김씨 자손들에게도 조형물에 담긴 소망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뿌리공원에 있는 244개 성씨 조형물은 모두 각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안중근 의사와 도산 안창호를 배출한 순흥안씨의 조형물은 책 모양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는 경구(敬具)로 독서의 중요성을 설파한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게 하는 조형물이다. 박혁거세를 시조(始祖)로 하는 밀양박씨의 조형물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를 형상화했다. 신라 대문장가 최치원을 시조로 하는 경주최씨의 조형물은 ‘최(崔)’를 형상화한 것으로 하나로 모인 꼭짓점을 통해 후손들의 번영과 화합, 단결을 보여줬다.
   
   각자 조형물에 적힌 유래문에는 성씨의 유래와 역사가 나타나 있다. 김시업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쓴 의성김씨의 유래문을 보면 성씨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벌 독립투쟁의 호랑이가 된 일송 동삼이 있고, 파리장서와 군자금 모금 등 전국 유림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심산 창숙이 있다. 그 외 대한민국장 등 훈·포장을 받은 독립운동 유공자도 100여명이나 된다. 이처럼 의성김문은 국난 때에는 기꺼이 순국의렬의 길을 걸었고 일천여 년 역사에 걸쳐 국가융성과 학문발전의 중심에 섰다. 우리는 이 빛나는 선조들의 충효·학덕·대의실현의 선비정신을 추원(追遠)하고 계승하여 다음 세대의 내일을 깨우쳐 나아가고자 이 빗돌을 세운다.”
   
   의성김씨뿐 아니다. 충무공 이순신과 율곡 이이를 낳은 덕수이씨의 유래문은 간결하지만 명확하게 성씨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일찍이 정조대왕은 ‘도학(道學)에 율곡 이이와 충렬에 충무공 이순신, 문장에 용재 이행(李荇)과 택당 이식(李植)이 있어 다른 성씨와 비할 바 없으나 우리나라에서 망족(望族)을 꼽자면 덕수이씨를 제일로 할 것이다’라 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유래문이 빛바랜 영광을 붙잡는 고리타분한 일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성씨와 족보, 가족과 친척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10년 전에 ‘고조할아버지’라는 용어를 모른다는 응답자가 전체 설문 응답자의 42%에 달한다는 조사가 나온 적도 있다. 친척의 범위가 점점 좁아져 직계가족과 4촌 이내의 친족만 친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반수를 넘었다는 조사도 있다. 여론조사기관 폴리컴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친척과의 만남이 거의 없다는 사람도 전체 응답자의 20%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244개 성씨가 제각각 유래를 밝히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설명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지난 11월 7일 성씨 조형물 제막식을 열고 고유제를 지내는 의성김씨 문중. photo 신현종 조선일보 기자

   왜 ‘뿌리’를 찾나
   
   의성김씨 문중이 제막식을 열던 시각,드넓은 뿌리공원을 오르락내리락하던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있었다. 대전 서구의 정부대전청사 다솜어린이집의 어린이 18명과 인솔교사들이었다. 18명 어린이 모두의 성씨에 맞는 조형물을 찾아 관람하고 유래문을 읽어본 후 휴식시간을 가지던 참이었다. 인솔교사 신지혜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은 얼마 전 어린이집에서 시작한 ‘이름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한다.
   
   “이름 프로젝트를 시작한 아이들은 모두 6살인데 이제 자의식이 생길 나이거든요.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가면서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이름 프로젝트의 처음 단계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의 태명에 대해 아는 것이다. 내가 부모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려가며 자라났는지를 알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신씨는 “도담이라는 태명을 썼던 아이들이 많던데 아이들끼리 ‘너도 도담이야? 나도 도담이었어’라며 동질감을 갖는 사례도 생겼다”고 말했다.
   
   자신의 성씨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이름 프로젝트 중 하나다. “아무 생각 없이 부르던 자신의 성씨가 명망 있는 조상들이 지켜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돼요. 자신의 존재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더군요.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로 여기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교사 신씨는 이름과 성씨에 대해 가르치면서 저절로 인성교육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문제로 여겨져왔다.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2012년부터 방영하는 프로그램 ‘Finding your roots(뿌리를 찾아서)’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명사들이 줄지어 출연한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 CNN의 간판앵커 앤더슨 쿠퍼, 미국 상원의원 존 매케인, 영국을 대표하는 가수 스팅 같은 거물들이 나와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 찾아달라고 의뢰하는 프로그램이다.
   
   영화 ‘아이언맨’의 아이언맨 캐릭터로 잘 알려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사례를 보자. 그는 2012년에 이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부계 조상이 동유럽의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모계(母系)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한 독일 이민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방송 내내 “전혀 몰랐다” “놀랍다”는 말을 반복했다. 마지막에는 “나의 뿌리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한다”며 “나를 다시 공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국경을 넘어 이주가 잦았던 유럽과 북미 사회에 비하면 한국은 뿌리를 찾기 매우 쉬운 곳이다. 11월 7일 뿌리공원을 찾은 한 재미동포 가족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처럼 ‘나’를 찾아 뿌리를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중국계 프랑스인 남편과 결혼한 엘레나씨의 아버지는 196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 정착해 엘레나씨 남매를 낳았다. “저는 한국말을 알고 쓴다 뿐이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제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와서 ‘엄마는 한국 어디에서 왔어?’라고 묻더군요. 정말 저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사망한 엘레나씨 아버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성씨와 본관 정도가 다였다. 엘레나씨는 몇 달간 정보를 찾다가 뿌리공원이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휴가를 내 방문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 엘레나씨가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그의 성씨 조형물에 적힌 유래문에는 그의 조상들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엘레나씨는 유창하지 않은 한국어로 더듬더듬 유래문을 읽어나가다 모르는 단어는 직접 사전에서 검색해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이와 앉아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서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인지 찾고 있었어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돼 너무 놀랍고 한편으로는 자랑스럽네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에요.”
   
   박용갑 대전 중구청장은 “주말이면 자녀를 데리고 와 조상에 대해 공부하는 젊은 부모가 무척 많다”고 설명했다. 애초에 뿌리공원이 설립된 목적이 바로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었다.
   
   
▲ 의성김씨 조형물 photo 신현종 조선일보 기자

   남녀노소 소통하는 공원
   
   “그저 책으로만 읽고 외우기만 하면 재미도 없고 기억에 남지도 않잖아요. 풍경 좋은 곳에 부모와 함께 손을 잡고 놀러와서 우리 조상 중에는 훌륭하신 분이 누가 있나 살펴보노라면 가족과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저절로 생겨날 겁니다. 인성교육, 효(孝)교육이라는 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대화와 행동을 통해 생겨나는 아름다운 마음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만 통하는 얘기가 아니다. 이날 조형물 제막식을 갖고 성대한 기념행사를 올린 의성김씨 문중 1000여명의 사람들도 “성씨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다”고 얘기했다. 대종회 사무총장인 김무락씨의 말이다.
   
   “문중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1000명이나 참석해 행사를 하는 저희로서도 전국 각지의 문중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는 드뭅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기회가 돼 한데 모이게 되니 마치 명절처럼 그동안 소원했던 관계도 이어지고 못다한 얘기도 하게 되더군요. 저희가 조형물을 만들면서 ‘서로 화합하자’는 메시지를 담기는 했지만 곧바로 이렇게 실천이 되니 참 좋습니다.”
   
   박용갑 구청장을 이를 두고 뿌리공원이 “소통하는 공원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표현했다. “오늘 의성김씨 종친들처럼 오랜만에 친지와 만나 회포를 푸는 경우도 있지만 갓 결혼한 신혼부부가 손잡고 와 서로의 성씨에 대해 알아가기도 하고 할머니 손잡고 온 어린아이가 할머니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뿌리공원은 지난 20년 동안 이렇게 성씨, 세대 간의 소통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아직 뿌리공원에 조형물을 세우지 못한 성씨도 많다. 20년 사이 244개의 문중이 조형물을 세워 빼곡히 뿌리공원을 채웠지만 더 많은 성씨를 위해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는 게 뿌리공원 관계자들의 말이다. 박 구청장도 “유등천 너머로 더 넓은 공원을 조성해 이곳에 오면 가족 간의 우애를 쌓고 효를 실천할 수 있다고 널리 알리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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