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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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꼭 30년째다. 소설가이자 역사가 송우혜씨가 쓴 ‘윤동주 평전’. 평전문학의 전범, 윤동주 연구서의 결정판이라고 불리는 이 책은 평전으로서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윤동주의 29년간 생애를 촘촘히 들여다보는 작업은 독립운동사와 일제치하로 점철된 엄혹한 역사를 파헤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북간도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한 사학자로서 송 작가가 새롭게 밝혀낸 사실이 꽤 된다.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이자 동갑내기 학우 송몽규의 무덤을 찾는 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했고, 윤동주 시에 쏟아진 ‘역사의식 과잉’이라는 왜곡을 일격에 날려버렸으며, 시 쓸 당시의 윤동주 행적이 구체화되면서 시 해석의 방향을 대대적으로 바꿔놓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은 고정불변의 박제된 서사(敍事)가 아니다.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지니고 진화해왔다. 변화무쌍한 시대 변화도 개정판을 부추겼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냉전이 종식되면서 북간도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자 할 얘기가 늘었다. 그런가 하면 초판을 읽은 일본 학자의 제보로 새로운 사실을 발굴했으며, 아직 생존해 있는 윤동주 지인들의 증언이 하나둘 덧대어지면서 풍성하게 다져졌다. 1998년, 2004년, 2014년에 개정판을 냈다. 3차례 개정판을 낼 때마다 출판사도 바뀌었다. 세 번이나 손바뀜을 한 셈. 초판을 낼 당시 마흔이던 작가는 어느덧 일흔 살이 됐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2017년 12월 30일은 윤동주의 100번째 생일이다. 올해 출판계와 학계에서는 1년 내내 윤동주 생일 분위기였다. 코엑스몰에 들어선 별마당도서관은 개관 기념 특별전으로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를 열었고,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는 지난 12월 10일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오프라인 서점에는 윤동주 책갈피, 필사책, 도장, 스티커, 브로치 등 윤동주 굿즈(goods) 코너를 마련했다. 공연계도 떠들썩했다. 지난해에는 영화 ‘동주’가 상영됐고, 뮤지컬 ‘별을 스치는 바람’이 전국 곳곳에서 공연 중이다.

송우혜 작가도 바쁜 한 해를 보냈다. 특강 요청이 쇄도해 다양한 주제로 윤동주의 삶과 정신을 설파하고 다니는 그를 지난 12월 중순 태평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많이 바쁘셨겠습니다”라는 첫 질문에 그는 일본에 있는 윤동주 팬클럽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일본에는 도쿄, 교토, 후쿠오카에 윤동주 선생님 팬클럽이 있어요. 도쿄에는 윤동주가 연전(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학교)을 졸업한 후에 다녔던 릿쿄(立敎)대학이 있고, 교토는 윤동주 재판이 열린 곳이자 편입해서 잠깐 다닌 도시샤(同志社)대학이 있는 곳이고, 후쿠오카는 윤동주가 수감된 후쿠오카형무소가 있는 곳이죠. 윤동주 사후(死後) 60주기 행사 때에는 그 세 곳으로 순회 초청강연을 다녀왔어요. 열기가 대단합디다. 릿쿄대학에서 강연할 때에는 300여석의 좌석이 부족해 통로에 앉아야 할 정도였어요.”

- 우리나라 팬들은 어떤가요. “일본 같지 않아요. 윤동주를 기념하는 아무리 큰 행사라 해도 생각보다 많이들 안 와요. 올해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좀 달라지길 소망합니다.”

- 일본 팬들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윤동주는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옥사했는데요. “네 그래서요. 부끄러움과 미안함도 있는 것 같아요. 일본인 팬들을 만나면 꼭 묻습니다. 왜 윤동주를 좋아하냐고요. 가장 큰 이유는 시가 좋아서랍니다. 외국 시인이 자국(自國) 감옥에서 안타깝게 죽었으니까 죄송하고 미안한 특별한 유대감도 있고요. 그리고 꼭 나오는 말이 뭔지 아세요? ‘미남이잖아요’ 합니다. 후후.”

- 평전을 보니 지인들은 윤동주보다 송몽규가 훨씬 미남이었다고 하던데요. “북간도에 계시는 친척 세 분께 송몽규에 대해 물었더니 첫마디가 ‘어유~ 엄청 미남이었지’ 해요.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 셋이 연전 동기로 같은 방에서 살았잖아요. 상상해 보면 눈부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둘(윤동주·송몽규)은 옥사하고, 강처중은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시대에 휘말리면서 겨우 살아남았죠. 세 사람의 삶과 죽음으로 그 시대가 다 보이는 것 같아요. 환하고 빛나고 진국인 사람들이 불운한 시대를 만나 처참한 말년을 보낸 것이지요. 참 엄혹한 시대였어요.”

- 평전문학의 전범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평전을 쓸 생각은 없었어요. 이미 윤동주 전기는 10권 넘게 출간돼 있었죠. 그러나 북간도 역사에 대해 잘못 알고 쓴 것이 많아 내용에 오류가 많았어요. 1970년대에 들어서는 한국 문단에 윤동주 폄하 분위기가 생겼고요. ‘평생 공부만 했던 윤동주가 무슨 독립운동을 했겠나. 일본 유학생으로서 일제의 과잉단속에 걸려 불우하게 옥사한 것이다’는 식이었어요. 한 저명한 문학비평가는 윤동주가 독립국들의 세상인 북간도에서 연전 문과로 온 이력을 거론하면서 윤동주의 철저하지 못한 세계를 말해준다고 했죠. 헛짚어도 보통 헛짚은 것이 아니에요. 그때는 만주국 시대였단 말이에요. 오류를 바로잡으려 한 시사잡지에 글을 실으면서 평전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송 작가는 당시 기고문을 통해 송몽규가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 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한 점, 연전을 거쳐 일본 교토제국대학에 유학했다가 다시 체포돼 일본 감옥에서 옥사한 전말, 송몽규가 일본 공안당국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분류돼 감시당한 상황, 윤동주가 그와 가깝게 어울렸고 그들이 일본 교토에서 함께 체포당해 나란히 재판에 넘겨진 과정, 일본 공안당국이 그들에게 내린 혐의와 선고형량 등을 조목조목 밝혔다. 사학자로서 북간도 역사에 대해 깊이 천착한 결과였다.

출판사 주간이던 시인 최하림은 송 작가에게 “제대로 된 윤동주 평전을 써 달라”며 이렇게 청했다. “당신이야말로 적임자다. 인척관계라 외부에서는 알기 어려운 집안 이야기에 접근하기 수월하고, 북간도 역사까지 공부한 역사학자인 데다가 글솜씨까지 갖춘 소설가이니.” 하지만 거절했다. 평전이라는 장르를 다뤄 본 적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송 작가는 운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꿈을 꾸게 된다.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 김신묵씨가 임종 직전에 접어든 꿈이었다. 북간도 출신 김신묵씨는 윤동주 집안과 송몽규 집안 모두와 가까운 인척관계였다. 게다가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고 정직하고 역사의식까지 강해 윤동주 평전을 쓰게 된다면 없어서는 안 될 증언자였다. ‘아!’ 하며 가슴 아파하다가 깨어 보니 꿈이었다.

송우혜 작가가 평전 집필을 위해 들인 노력은 놀랍다. 윤동주 관련 자료를 빠짐없이 읽고 그의 행적을 따라 북간도와 일본, 서울의 행적을 현장답사했다. 북간도에 있는 윤동주 묘지는 네 차례나 방문했다. 윤동주를 기억하는 이가 있으면 그 누구라도 달려가 만나 세세하게 따져물었다. 유가족인 누이동생 윤혜원씨와 남동생 윤일주씨를 비롯, 연전 후배인 정병욱 서울대 교수, 연전 후배이자 집안끼리도 잘 알고 지낸 장덕순 서울대 교수, 명동소학교 4학년 때 담임 한준명 선생, 중국 낙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와 함께 훈련을 받았던 라사행 목사, 윤동주와 같은 날 일본 특고(特高)경찰에 체포돼 수감되었던 고희욱 선생 등이 그들이다.

그중에는 윤동주가 다녔던 도쿄 릿쿄대학 출신인 야나기하라 야수코(楊原泰子) 선생도 있었다. 야나기하라 야수코 선생은 윤동주 평전 초판을 바탕으로 고증에 나섰고, 이를 통해 발굴한 사실이 꽤 된다. ‘쉽게 쓰여진 시’에 나오는 ‘늙은 교수’가 누구인지(‘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윤동주가 일본 릿쿄대학에서 도시샤대학으로 전학한 배경의 하나가 교련 거부 문제였다는 사실, 윤동주가 좋아하던 두 명의 여인에 얽힌 이야기 등이 새롭게 담겼다.

- 김신묵씨는 몇 번이나 뵈었습니까. “뭐 수도 없죠. 내가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 같아요. 나중에는 김신묵 권사님과 친해져서 ‘우혜야, 자고 가라’ 하면 머리맡에 녹음기를 틀어놓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윤동주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증언들이 얼마나 귀한지 서로 잘 알고 있어서 더 신나게 이야기를 해주신 것 같아요.”

‘윤동주 평전’은 지난 30년간 3차례에 걸쳐 개정판으로 출간됐다.
‘윤동주 평전’은 지난 30년간 3차례에 걸쳐 개정판으로 출간됐다.

- 시 해석도 달라졌겠습니다. “‘참회록’이 대표적이에요. 평단에서는 이 시에 대해 역사의식 과잉이다 뭐다 해서 부정적이었어요. 그런데 윤동주 삶을 들여다보니까 이 시와 창씨개명과 관련이 있더군요. 일본식 이름으로 된 창씨개명계를 계출(屆出)한 날이 ‘참회록’을 쓴 지 닷새 만이에요. 그 뼈아픈 역사의 치욕을 담아 그 시를 썼어요. 말하자면 이 시는 윤동주 시 중 가장 저항성이 강해요.”

- 사랑에 빠진 시기에 쓴 시 ‘봄’도 흥미로웠어요. “하하. 맞아요. 윤동주가 결혼까지 생각한 여자가 있었어요. 박춘혜라고, 성악을 전공했는데 성품이 참 좋고 괜찮은 사람이었대요. 윤동주 동생 윤혜원씨가 그 여자분 사진까지 보여줬죠.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요. 나중에 윤혜원씨가 교회에서 우연히 그 여자를 만난 거예요. 어디서 많이 본 듯해서 곰곰 생각해 보니 오빠 사진 속 그 여자였던 거죠. 윤동주를 아시냐고 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너무 반가워하더래요. 좀 친해지고 나서는 농반진반으로 ‘어머니가 다른가? 오빠는 잘생겼는데’ 했다고 해요. 윤동주에 대한 기억이 좋았나봐요. 윤동주가 그 여자분과 사귀던 시절에 ‘봄’을 썼는데, 아주 밝아요.”

‘봄’은 이런 시다.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 왜 한국인은 윤동주의 시를 사랑할까요. 김소월 시도 좋아하지만 결이 다른 듯합니다. “주는 게 커서 그렇죠. 명작을 구분하는 간단한 기준은 ‘몇 번이나 다시 볼 수 있는가’예요. 진짜 명작은 한 번 읽고 무슨 말이 나온 줄 알면서도 또 읽고 감동받고 수시로 읽게 됩니다. 영화도 그렇잖아요. 재미있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화가 있는가 하면 내용을 뻔히 알면서도 다시 찾아보고 싶은 영화가 있죠. 윤동주의 시는 읽을수록 힘을 주는 것 같아요.”

- 윤동주의 시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는 뭔가요. “‘서시’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읽을 때마다 힘을 얻어요. 정화하고 치유하고 격려하는 힘.”

- 그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서정주·정지용 시인의 시를 보면 언어가 기가 막혀요. 윤동주가 못 따라가요. 그런데 ‘서시’같이 심장을 치는 시가 그 사람들에겐 없어요. 윤동주 시의 힘은 윤동주의 맑은 정신, 순결한 영혼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 윤동주와 관련된 숱한 자료들을 읽었지요. 윤동주의 본성을 어떻게 느끼셨나요. “절대 유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외유내강의 전형 같아요. 윤동주의 명동소학교 4학년 담임은 윤동주에 대해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고 기억해요. 마음이 여렸던 거죠. 하지만 내면에는 금강석같이 단단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맑고 투명하면서도 지켜야 할 것은 최선을 다해 지켜내는 사람. 그래서 ‘서시’ 같은 시가 나올 수 있었던 거죠.”

- 영화 ‘동주’ 시나리오 감수도 하셨지요. “최초 시나리오에는 윤동주가 일본어로 된 시집을 내려고 한 걸로 돼 있었어요. 펄쩍 뛰었죠. 윤동주는 조선어가 멸절하면 민족이 망한다는 말을 재판장에서도 한 사람인데, 일본어 시집이 가당키나 한가요. 이대로 갈 거면 송우혜의 ‘송’ 자도 넣지 말라고 했죠. 나중에는 일본어 대신 영어 시집을 준비하는 걸로 고쳤어요.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 29세. 윤동주의 요절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한테 저격당해 죽고 나서 일본에서 그 죽음을 부러워했대요. 정점에서 생을 마감한 거죠. 윤동주도 그래요. 그런 죽음이 윤동주로서는 최선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죽음이 윤동주를 더 빛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 근황이 궁금합니다. “이순신 장군에 빠져 있어요. 30년째. 인간적으로도, 리더로도 멋진 사람이에요. 조선일보에 6개월간 연재도 했잖아요.(‘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1권은 다 썼고 2권을 써야 하는데, 눈이 안 좋아요. 망막정맥폐쇄증, 황막부종, 백내장이 생겼는데 수술 후 더 안 좋아졌어요. 병원에서 책 읽는 거 삼가라고 해요. 자료를 봐야 책을 쓰는데 30분 이상 보기 어려워요. 한동안 너무 속상해하다가 마음을 바꿨어요. ‘평생 눈을 너무 부려먹었으니 한쪽 눈이라도 살살 달래가면서 살아야지’ 하고요.”

- 한 언론인은 송 작가를 일컬어 ‘죽은 남자만 좋아하는 사람’이라 했다죠.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이순신, 전봉준, 홍범도 이런 사람이에요.(웃음) 윤동주는 처음에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평전을 쓰면서 점점 좋아하게 됐죠. 이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수록 진짜 맑고 순수하고 귀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구나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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