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5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 시대? 과학기술과 헌법: 헌법 제127조 제1항의 문제점 및 대안’ 공개 포럼. ⓒphoto ESC
지난해 11월 25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 시대? 과학기술과 헌법: 헌법 제127조 제1항의 문제점 및 대안’ 공개 포럼. ⓒphoto ESC

사례 1

서울 모사립대 자연과학대학 A교수. A교수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올해 연구비를 수주하지 못하면 연구실 운영이 어렵기 때문이다. 기초과학 중에서도 비인기 분야인 양자화학을 연구하는 A교수는 연구비를 수주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인기 분야 연구실에는 연구원들로 시끌벅적하지만 A교수 연구실은 현재 연구원이 없다. 얼마 전까지 조교로 있던 박사과정 학생은 돌연 학업을 중단하고 연구실을 나갔다.

사례 2

지방 모국립의대 기초의학 연구실에선 한국어보다 중국어가 많이 들린다. 기초의학 분야에 의대 졸업생들이 지원하지 않는 건 오래된 얘기다. 생물학, 생명공학 등 관련 전공 학생들이 기초의학 연구를 지원해왔지만 그마저도 인원이 줄고 있다.

연구실의 빈자리는 중국, 인도 등 외국 유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다. 연구비 지원이 적고 졸업 후에도 취업이 힘들어 한국 학생들이 지원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기초과학 분야 연구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기초과학 분야가 연구비 수주 및 연구인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과학자들은 기초연구가 소외받는 이유 중 하나로 ‘헌법 제127조 제1항’의 내용을 지적한다.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 과학기술을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로 인해 경제 발전과 연관된 응용과학·공학 분야는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해왔다. 반면 기초연구 및 경제 발전과 관련이 적은 연구활동은 상대적으로 소외받아왔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6년도 총 연구개발비 중 기초연구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6.0%이며 나머지는 응용·개발연구비였다.

문재인 정부는 취임 후 100대 국정운영 과제를 발표하며 임기 내 기초연구비를 2배로 늘리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2018년 예산안에는 당초 약속했던 예산 1조5000억원에서 800억원이 삭감된 1조4200억원으로 확정됐다. 이에 과학계에선 기초연구비를 2배로 늘리겠다는 문 대통령의 약속이 지켜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개헌 통해 과학기술의 경제 종속 탈피해야

이는 과학계에서 오랫동안 문제시됐던 내용이다. 그동안은 기회가 없어 수면 아래에 있다가 지난해 개헌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공론화됐다. 지난해 11월 과학기술인 민간단체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 주최로 ‘4차 산업혁명 시대? 과학기술과 헌법: 헌법 제127조 제1항의 문제점 및 대안’이라는 포럼이 열렸다. 포럼에는 오세정 국민의당 의원, 임대식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김호균·장용근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이하 개헌특위) 자문위원 등을 비롯한 과학기술·법조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날 포럼에서 헌법 개정을 통해 과학기술의 경제 종속성을 탈피해야 한다는 데 공감을 이뤘다. 구체적 개헌 방안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ESC에서 제시한 헌법 개정안은 다음 두 가지이다. 제127조 제1항에서 ‘과학기술의 혁신’을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 삼도록 명시한 부분을 삭제해야 한다. “국가는 학술활동과 기초연구를 장려할 의무가 있다”는 신설 조문을 제1장 총강에 두는 것을 제안한다. 김찬현 ESC 사무국장은 “조항 삭제를 통해 과학기술의 경제 종속성을 탈피하고 총강에 기초연구 지원을 장려하는 조항을 신설하는 게 ESC 측의 제안”이라고 설명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조항의 삭제 및 신설보다 헌법 제127조 제1항을 수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국민경제의 발전’이라는 문구를 ‘국민생활의 향상과 공공복리의 증진’으로 대체해 과학기술의 공공성을 반영하자는 주장이다.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원 장용근 홍익대 교수는 제127조 제1항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만 수정하고 학문의 자유에 관한 헌법 제22조 제2항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에 기초학문에 대한 연구 부문을 보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날 오세정 의원과 임대식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토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인사말 외에 다른 발언은 하지 않았다.

정부에서도 헌법 제127조 개정 논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권석민 과기부 과학기술정책과 과장은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과기부에서) 개헌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의견을 수렴 중이며 그 취지에 동감하고 있다. 헌법에 과학기술의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사회·공공적 가치가 반영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답했다.

국회에서는 과학기술인 출신 의원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리학과 교수 출신의 오세정 의원은 “과학기술의 경제적 측면만 강조하는 헌법 제127조는 반드시 개정돼야 한다”면서 “다만 조항 자체를 삭제하느냐, 문구를 수정하느냐 등 개정 방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므로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2월에는 한국표준연구원장 출신 신용현 국민의당 의원 주최로 ‘과학기술 헌법 개정을 위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 환영사에서 신용현 의원은 “정부 간섭과 국가경제 발전에 종속된 과학기술 헌법 조항은 개정돼야 한다”며 “새로운 헌법에는 ‘인간존중, 과학기술의 미래가치’가 담겨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 개헌특위 위원장인 이주영 자유한국당 의원도 개헌 논의에 힘을 보탰다. “과학을 단순히 경제 관련 테두리에 가둬놓은 것은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창의성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에 어떤 족쇄를 채우는 것은 발전의 원동력을 저하시키는 일이다.”

‘제9장 경제’에 속한 헌법 제127조
‘제9장 경제’에 속한 헌법 제127조

역대 과학기술 헌법 조항

헌법에 과학이란 용어가 처음 들어간 것은 1962년 제5차 개정헌법이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주도로 진행된 개헌이었다. 당시 신설된 헌법 제118조 제1항이다. “국민경제의 발전과 이를 위한 과학진흥에 관련되는 중요한 정책수립에 관하여 국무회의의 심의에 앞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경제·과학심의회를 둔다.”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웠던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이 헌법에도 그대로 반영됐던 것이다. 유신헌법이라 불리는 1972년 제7차 개정헌법에서는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과학기술을 창달·진흥해야 한다는 국가의 의무가 처음 직접적으로 명시된다. 헌법 제118조가 삭제되고 이를 제123조가 대체한다. 당시 헌법 제123조 제1항이다. “국민경제의 발전과 이를 위한 과학기술은 창달·진흥되어야 한다.” 이후 1980년 제8차 개정헌법에서는 국민경제 발전과 과학기술의 창달·진흥이 대등한 위치에 놓인다. 헌법 제123조 조문이 제128조로 이전되고 내용이 일부 수정된다. 당시 헌법 제128조 제1항이다. “국가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고 과학기술을 창달·진흥하여야 한다.” 현행 헌법은 1987년 제9차 개정헌법이다. 헌법 제128조 조문이 제127조로 이전되고 내용이 일부 수정된다. ‘국가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의무에 ‘그러한 노력은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해야 한다’는 수단적 관점이 더해졌다.

김래영 ESC 헌법 개정 TF팀장은 “과학기술 서술에 있어 현행 헌법은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을 대등하게 서술했던 제8차 개정헌법보다 오히려 후퇴했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관련 논의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며 “당시 과학기술의 역할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개정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과학기술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이들은 제5차 개정헌법에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한 과학진흥’이 명시된 이후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 계획에 따라 경제 성장을 이루었음에 동의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과학기술이 경제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헌법의 요구는 유효했다. 당시에는 경제 발전이 국정운영의 최우선 과제였고 과학기술인을 비롯해 온 국민이 함께 노력함으로써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다만 이제는 과학기술의 역할이 경제 발전의 도구로만 국한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관점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ESC 대표인 윤태웅 고려대 교수의 말이다. “1970~198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가장 합리적인 설득이었을 것이나 이제 우리의 사회적 역량도 그것 이상을 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이) 경제 발전의 도구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만 여겨 과학기술의 발전을 왜곡하는 것에는 문제의식이 있다.”

지난해 10월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와 한겨레 사이언스온이 과학기술종사자 228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3%가 헌법 제127조 개정에 동의했다. 과학기술인들은 헌법 제127조의 개정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오세정 의원은 “과학기술인 및 인문사회 연구자 중심으로 국민청원 서명을 모아 1월 중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외국의 과학기술 관련 헌법 조항

주요국 중 과학기술을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나라는 스위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소수에 불과하다.

스위스 헌법

제64조 제1항 ‘연방은 과학 연구와 혁신을 장려한다.’

제3항 ‘연방은 연구기관을 설립, 운영 또는 지원할 수 있다.’

스페인 헌법

제44조 제2항 ‘공권력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과학, 학술조사 및 기술연구를 촉진한다.’

제149조 제1항 ‘국가는 다음의 사항에 있어서 배타적인 권한을 가진다.’

15. 과학 및 기술연구에 관한 촉진과 조정 일반

이탈리아 헌법

제9조 ‘공화국은 문화의 발전과 과학 및 기술 연구를 장려한다.’

이들 국가의 헌법은 과학 연구의 장려 또는 촉진을 국가의 의무로 밝히고 있으며 스페인 헌법은 과학 촉진의 목적을 공공의 이익에 두고 있다. 스위스는 스위스국가과학재단이 연방정부의 위탁을 받아 기초분야 연구를 지원한다. 스페인은 과학연구고등위원회를 통해 과학 및 인문학 연구를 지원한다. 이탈리아는 국가연구위원회를 통해 과학, 문화, 인문학 등 기초연구 전반을 지원한다. 미국, 독일, 일본 등 과학기술 선진국들은 과학기술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과학기술 촉진에 필요한 사항을 입법화해서 지원하고 있다.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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