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회
[2494호] 201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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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신문광고로 ‘이재용 석방’ 촉구 이영수 재이손산업 대표

“열 명의 범인 놓쳐도 한 사람의 억울한 죄 만들어선 안 돼”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이재용을 석방하라!’
   
   지난 1월 24일자 조선일보 사설(社說) 하단에 큼지막한 광고가 내걸렸다. 현재 구속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석방을 촉구하는 광고였다. 광고 문안을 작성한 이는 골프용품 제조기업 사장인 이영수(81) 재이손(財李孫)산업 대표였다.
   
   이 대표는 해당 광고에서 “이재용에 대한 검찰의 공소는 ‘박근혜와 이재용이 만났으니 청탁이 있었고 삼성이 정유라와 미르, K스포츠재단 등에 돈을 보낸 것은 그 대가이다’라는 가상현실을 구성하여 무고한 한 기업인에게 유죄를 선고하려는 시도이고 새로운 적폐 제1호”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또한 “이 나라 경제성장의 거대한 바퀴를 굴려가는 기업의 총수를 적폐청산의 정치적 제물로 희생시키려는 행위는 우리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씨앗이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밝혔다. 덧붙여 지난날 자신이 회사를 경영하면서 정관계의 각종 규제와 협찬 요구에 시달렸던 때를 회고하면서 우리나라 기업인들의 현실적인 처지를 대변해주기도 했다.
   
   이 대표는 1994년부터 24년간 총 20번의 신문광고를 내 정치·사회 현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해왔다. 그는 현안이 있을 때마다 조선일보·동아일보·경향신문 등에 정치혁신·부패척결·재벌개혁 등을 주제로 신문광고를 냈다. 정계·재계·법조계부터 파업 노조에 불법 시위대까지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대상을 가리지 않고 비판했다.
   
   2016년에는 최순실사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광고를 조선일보에 싣기도 했다. 그때도 광고글 말미에 ‘북한의 대남공작과 추종세력의 침투를 철저히 경계할 것을 모든 분에게 부탁드린다’고 적어 용공세력의 선전·선동은 배격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밖에 검찰의 부실수사를 비판한 ‘마피아의 총대로 만든 잣대!’, 수지김 간첩 조작사건의 전모가 밝혀질 당시 국정원의 정치중립을 촉구한 ‘조폭, 국정원, 악랄한 칼잡이들!’ 등 전체적인 글의 수위와 방향도 거침없었다.
   
   지난 1월 29일 서울 연희동에 위치한 재이손산업 사무실을 찾아갔다. ‘서베리아’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서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날이었다. 고령이라 원격 마이크가 달린 보청기를 사용해 대화를 나눠야 했으나 육성은 또렷했고 신념은 분명했다. 그는 인터뷰 당일 아침에도 5시간 동안 서울중앙지법과 대법원 앞에서 ‘이재용 석방’ 촉구 1인 시위를 하고 왔다고 했다.
   
   이 대표는 줄곧 재벌개혁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대기업들의 비자금 조성과 각종 부정부패 추문을 지탄하며 수천만원씩 광고비를 들여 신문에 비판의견을 냈다. 실제 2003년 11월 21일자 경향신문에 낸 광고에서 이 대표는 “재계의 부정을 찾아내고 범죄를 처벌해야 하는 것은 이제 우리 모든 백성의 사명”이라면서 재벌기업의 비자금·정치자금·회계내역 등을 밝혀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재벌기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있는 그가 이 부회장의 석방을 촉구한 것은 “(이 부회장에 대해) 정당한 법 절차에 의하지 않은 재판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석방돼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정당한 법 절차에 의하지 않은 재판을 하기 때문이에요.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억울한 죄를 만들어서는 안 돼요. 일단 구체적인 증거가 없어요. 증거라 하는 것은 객관적·구체적·합리적이어야 해요. 실제로 누가 봐도 ‘그게 사실이다’라는 확증이 있어야 하는 거요. 그런데 포괄적(포괄적 현안에 대한 묵시적 청탁)이라는 거요. 포괄이라 하면 안 걸려 들어갈 사람이 없어요. 나쁜 짓 했다면 정확하게 증거를 찾아서 잡아넣으라는 거예요. 적폐라고 하는 것은 법을 어긴 일이에요. 그걸 바로잡자는 게 적폐청산 아니오? 그러면 바로잡는 일도 법에 따라서 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 지난 1월 2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이영수 대표의 의견 광고. photo 조선일보

   ‘뇌물사회’ 환멸 느껴 부패척결 운동으로
   
   이 대표는 특히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독대해 포괄적 현안인 경영권 승계를 묵시적으로 청탁했다는 의혹 부분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이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외동아들”이라며 “(그렇다면) 누가 오너 계승을 할 수 있겠나. 모든 사회적 조건, 주식과 경험을 따지더라도 이 부회장 말고 누가 경쟁을 하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 대표는 “그런 형편에 (검찰이) 추정을 했다”면서 “이거는 그물 탁 쳐놓고 잡아넣는 것이다. 적폐청산의 모델케이스로 보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 같은 취지의 주장을 하면서도 대기업을 옹호하려는 뜻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오히려 과거 일부 재벌기업들의 부정축재와 비자금 조성을 비판하며, 모든 수입·지출에 수표를 사용하자는 본인만의 금융실명제 원칙을 주장하기도 했다. 1994년 9월 1일자 동아일보에 처음으로 신문광고를 낸 이 대표는 당시 개인·기업·정부 모두가 수표를 사용, 그 내역이 영수증·거래장부와 맞도록 해 돈의 흐름을 노출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제가 1989년부터 2008년까지 한 20년 동안 미국에 가서 회사를 운영하다가 왔습니다. 미국에서 체계가 잡힌 기업들 대부분은 수표로 거래를 합니다. 주고받은 수표의 사본은 거래장부하고 맞아야 합니다. 회계사는 수표 사본이랑 장부를 비교·대조하면서 수입이 맞는지 확인하고 세무 보고를 합니다. 기업이 돈을 숨길 수가 없어요. 탈세나 부정축재가 안 돼요. 그러니까 더 기업하기가 좋더라고요. 우리나라도 이를 본받아야 해요.”
   
   자비를 들여 의견 광고를 낼 만큼 이 대표의 강직한 성품은 젊은 시절부터 남달랐다. 1937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 이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대 법대에 낙방한 후 동국대 법대에서 수학했다. 일찍이 정치에 투신했던 그는 이승만 정권 시절 민주당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며 당시 이정재를 비롯한 자유당 정치깡패들과 맞섰다.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 고막이 터지기도 했다. 폭거에 맞선 그의 일화는 1957년 조선일보 사회면 기사를 장식했다. 4·19혁명 때는 경찰서를 습격하다 팔에 총상을 입었다. 상처를 동여매고 일주일 만에 다시 광장으로 나간 그는 탱크와 연단 위에서 시위에 모여든 군중들을 선도했다.
   
   1973년 벤처기업 재이손산업을 세웠다. 재물 재(財) 자에 자신의 성씨 이(李), 부인의 성씨 손(孫)을 모아 사명을 지었다. 당시 창업자금이라고는 수중의 4000원이 전부였다. 그 돈으로 을지로4가에서 불에 탄 책상 하나를 구해 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이 대표는 영어회화에 능했다. 수출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유리했다. 야구·골프·하키에 쓰이는 글러브 등 스포츠용품들을 수출해 회사를 성장시켰다. 미국 골프 붐을 타고 골프가방 사업으로 업종을 좁혔다. 미국 대통령 골프가방을 만들어 보낼 만큼 사업은 호황을 맞았다.
   
   사업이 성장하자 권력기관에 내야 할 돈도 많았다. 각종 영전금·송별금에 환영잔치까지 열어야 했다. 처음에는 ‘내가 왜 돈을 줘야 하느냐’면서 반발했다. 그러자 관에서 단속이 나왔고 세무조사로 트집을 잡았다. 그는 이번 이재용 부회장 석방 촉구 광고에서도 40년 넘게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 “지역 권력기관 등의 각종 위원회에 찬조를 하지 않는 경우 불량기업의 대상이 됐다”며 “단속대상으로 고발을 받아 시청·세무서·경찰·검찰에 시달렸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지나친 규제와 부정부패에 한이 맺힌 그는 신문광고로 세상에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1997년 한국경영자총협회 강연에 나가 ‘뇌물 없이는 기업 경영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폭로하며 투명사회 건설을 촉구하기도 했다. 신랄한 의견 광고로 이름이 나자 압력과 협박도 이어졌다. 국정원을 비판할 당시에는 가족을 겨냥한 위협전화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꾸준히 광고글 하단에 자신의 본명과 사업체, 연락처와 이메일 주소를 남겨 반론을 받는다. 반대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의 주장이 떳떳하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다.
   
   “반대하는 사람들 의견도 들어야 하잖아요. 제가 광고를 내서 연락이 오면 보통 1% 미만이 반론이에요. 이번에는 한 0.1% 되는 거 같아요. 거의 90%는 응원 연락이죠. 오늘도 메시지가 들어왔어요. 고맙다, 눈물이 난다, 돈 보내겠다, 3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 기업인으로서 훌륭하다는 등 별 사람 다 있어요.(웃음) 그러면서 후환이 두렵지 않으냐고 걱정해주는 분들도 있어요. ‘무슨 일 있으면 우리에게 연락해달라’고, ‘우리 같이 싸우러 나가겠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로서도 힘이 나고 고맙죠.”
   
   

▲ 2015년(위쪽)과 1994년 동아일보에 실린 이영수 대표의 의견 광고. photo 동아일보

   “언론이 총대 메면 부정부패 끝난다”
   
   신문에 자주 의견 광고를 내자 가족들의 반대도 심했다. 아내는 ‘당신이 글을 쓴다고 해서 세상이 바로 되느냐’면서 ‘그 돈 있으면 차라리 자식들에게 쓰라’고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답답할 때마다 이 대표는 펜을 잡았고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았다. 지금까지 스무 번의 의견 광고 내용을 자신이 직접 썼다. 누구에게 따로 첨삭지도를 받지도 않았다. 꾸준히 국내외 뉴스를 챙겨 보고 책과 신문을 읽으며 공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안이 있을 때마다 신문사 측에서나 대학 교수들이 직언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글이 없었어요. 고민을 하다가 글을 계속 쓰게 됐죠. 처음 광고 내면서는 목돈도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좀 인정을 해줬는지 단가를 맞춰주더라고요.(웃음) 재작년부터는 저도 부담이 돼서 신문사들 양해를 받아 선금을 얼마씩 주고 나머지는 할부로 해요. 광고한다고 해서 다 받아주는 거 아닙니다. 저같이 시국에 민감한 글은 잘 실어주지도 않아요. 신문사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니까요. 그래서 항상 광고 끝에 ‘이 글에 대한 법률적 책임은 내가 진다’고 쓰는 거예요.”
   
   이 대표는 노년에 다시 현실정치에 도전했다. 부정부패 척결운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두 번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출마했고 2007년에는 대통령 예비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제가 그때 대통령으로 입후보한다는 것은 진짜 돈키호테 같은 생각이었죠. 제가 구상한 (사회개혁) 정책을 공개하기 위해서 나간 거예요. 실제 대통령 되는 사람이 몇 가지라도 봐줬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대표가 생각하는 부정부패 해결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언론이 본연의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언론은 자꾸 파 뒤집어서 땅속에 있는 더러운 뿌리를 캐내는 것이었다. 그는 “언론계가 총대를 메면 대한민국 부정부패 끝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본인도 계속 ‘필요할 때마다’ 신문광고를 낼 것이라고 밝혔다.
   
   “내가 죽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나라가 잘되는 방향으로 운동을 할 겁니다. 부정부패 안 하면 우리 젊은 세대들 전부 월급 더 줄 수 있습니다. 성장이 뭡니까. 쉽게 얘기해서 국민소득, 돈 아닙니까. 모든 기업인이 비자금 안 만들고 차명계좌 안 하면 월급 더 줄 수 있어요. 회사도 사회도 발전하고요.”
   
   인터뷰 말미에 이 대표를 응원하는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이번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건 시민은 그를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멋쩍어하며 “영웅은 무슨 영웅, 과찬의 말씀”이라며 “제가 무슨 용기가 있나. 그저 바른 세상 살자는 것”이라고 겸손해 했다. 전화를 끊으며 쑥스럽게 웃어 보인 그는 힘을 더 얻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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