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벨트’지에 실린 그림. 레닌이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해 환영을 받는 장면을 묘사했다.
‘디 벨트’지에 실린 그림. 레닌이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해 환영을 받는 장면을 묘사했다.

1차 세계대전 기간(1914~ 1918) 러시아는 독일제국과 동부 전선에서 대규모 살육전을 벌였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독일 헤센공국 공주였던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 등 주화론자들의 전쟁 반대 충언을 처음에는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약한 그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범(汎)슬라브주의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의 여론에 밀려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혁명은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가 전쟁 상대국인 러시아를 약화·붕괴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레닌의 볼셰비키를 지원함으로써 성공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레닌은 러시아제국의 영토가 어떻게 되든 그것에는 관심이 없는 직업혁명가다. 그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차르제국을 붕괴시키고 볼셰비키 정권을 수립하는 데에만 골몰했다.

7500만유로어치 지원

독일제국은 폭력 혁명을 도모하는 레닌 세력에 러시아를 내부에서 교란시킬 목적으로 모든 편의를 제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레닌은 레닌대로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그의 당대에는 혁명을 완성할 수 없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적국인 독일과 협력하기로 결심했다.

독일 외무부는 레닌의 볼셰비키에 현금·무기·탄환 등 약 2600만마르크(현재가치 약 7500만유로)를 비밀리에 지원했다. 당시의 경제 규모에 비추어볼 때 이 지원 금액은 엄청나다. 독일 외무부의 문서보관소에서는 이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는 진기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외무부 이외에 다른 루트를 통한 지원은 아직 문서상으로는 드러난 것이 없다. 1917년 2월 혁명 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정권을 이양받은 임시정부가 전쟁을 계속 수행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은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위해 10월혁명도 지원했다.

독일군 총사령부는 중립국인 스위스 취리히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레닌을 자국 영토를 경유해 러시아로 입국시키는 작전을 기획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저서 ‘영광의 시간, 1927’에서 레닌의 귀향은 ‘봉인열차’를 타고 독일제국을 통과함으로써 적국과는 협력하지 않았다고 서술하면서 적국을 경유해 귀국한 사건을 쾌거로 묘사한 바 있다. 레닌의 ‘봉인열차’ 신화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1917년 초부터 러시아의 내부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레닌의 귀국은 레닌 자신뿐만 아니라 독일도 원하는 상황이 되었다. 독일 북쪽의 바다를 통한 귀국은 독일 잠수함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위험성이 컸다. 독일이 레닌을 지원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이 레닌을 체포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레닌은 선전문을 통해 수없이 독일을 비난하고 저주에 가까운 험담을 해왔다. 이 사실로 인해 비밀공작에 참여했던 공작원들은 레닌과 협력해야 한다는 현실을 당혹스럽게 느꼈지만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목표는 러시아의 내부를 교란시켜 전세(戰勢)를 유리하게 이끌어 종국적으로 개별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레닌으로서도 타도 대상으로 여겼지만 독일의 도움으로 독일 영토를 경유해 러시아로 입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사실이 알려지면, 레닌은 적국의 간첩으로 낙인찍힐 위험성이 있었다. 2월혁명 후 러시아 정세는 급변했다. 하루 빨리 귀국을 서둘러야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레닌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스위스인을 대리인(프리츠 플라텐)으로 내세워 스위스 주재 독일제국 대사관과 귀국 문제에 대해 협의하게 하였다.

레닌이 ‘봉인열차’를 타고 취리히를 출발해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른 이동경로.
레닌이 ‘봉인열차’를 타고 취리히를 출발해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른 이동경로.

레닌은 독일 영토를 경유해 러시아로 귀국하겠다는 뜻을 전달하면서 하나의 조건을 제시했다. 자신이 탑승할 기차에 국제법상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여권 심사 면제, 다른 승객 탑승·출입 금지 등이었다. 레닌은 나중에 독일 측의 지원이 없었다는 무류성(無謬性)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기차 탑승 비용을 모두 여행자들이 각자 지불한다는 조건도 붙였다. 전시 상황에서 독일 영토를 통과하여 기차로 이동하는 데에는 독일군 최고사령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스위스 주재 독일대사관은 바로 베를린 외무부에 연락했고, 외무부는 군 당국에 허가를 요청했다. 이에 독일 수뇌부는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음’이란 통보를 보냈다.

레닌과 귀국을 희망한 활동가들과 그들의 가족 모두 합쳐 31명에 불과한 이 러시아 귀향객들이 취리히 중앙역에 나타났다. 좁은 취리히 러시아 망명자들 사이에 이와 관련한 소문이 쫙 퍼졌다. 이들이 특별열차에 탑승했을 때, 이를 주목하는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단지 스위스 주재 독일대사관 무관이 이들의 탑승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인 다수가 플랫폼에 보였다. 이들은 레닌이 탄 기차를 향해 “독일 스파이, 반역자, 이 반역자들을 모두 목매달아 죽여라”라고 고함을 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그러나 기차는 고함을 뒤로하고 플랫폼을 천천히 벗어났다.

레닌이 ‘봉인열차’를 이용했으므로 독일 측과 연락을 차단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레닌 자신이 독일과 내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기차의 출입구 3개는 형식상 봉인돼 있었으나 봉인되지 않은 또 다른 출입구가 있었다. 레닌의 측근인 프리츠 플라텐과 독일 장교 두 명이 동승해 맘대로 출입하였다. 이들은 먹을 것도 넣어주고 새로 발간된 신문을 사서 넣어주기도 했다. 외부와는 긴밀히 연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1919년 하원 연설에서 “대도시 수도관 속으로 섞어 넣게 될 장티푸스 또는 콜레라 배양균이 들어 있는 앰풀을 보내는 방식으로 독일은 레닌을 러시아로 보냈다”고 말했다. 기차는 독일의 보호를 받으며 독일 영토를 경유해 북해의 항구도시 자스니츠에 도착해 페리를 이용하여 중립국인 스웨덴의 항구도시 트렐레보리에 도착했다. 이미 연락을 받은 레닌의 동지들이 마중 나와서 일행들을 안내·호송했다. 레닌은 스톡홀름, 핀란드(러시아제국 영토)를 거쳐 무사히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는 핀란드역 광장에 몰려 나온 볼셰비키 지지자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레닌의 여권.
레닌의 여권.

귀국 도정에서 레닌은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우다’도 읽었다. 러시아에서 아직 사회주의 혁명은 성숙하지 않았으니 페트로그라드의 지역 볼셰비키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논설을 싣고 있었다. 레닌은 도착하자마자 즉시 전쟁을 끝내고 임시정부를 무너뜨려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세계혁명이 따라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레닌은 즉시 ‘제국주의 전쟁’을 중지하고 자국 내의 계급전쟁으로 전환하자며 혁명 활동을 독려했다. 그는 곧바로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볼셰비키들은 독일로부터 받은 자금을 루블화로 바꾸어 군중들에게 일당으로 나누어주었다. ‘임시정부 타도’라고 적은 플래카드도 제작해 배포했다.

독일 지도부는 쾌재를 불렀다. 독일 외무장관은 빌헬름 2세 황제와 힌덴부르크 총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볼셰비키는 우리 외무부의 지속적인, 광범위한 지원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선전매체 ‘프라우다’를 발간, 배포하는 가운데 선전·선동 활동을 활발하게 함으로써 초기의 좁은 토대를 넓혀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917년 혁명의 해에 페트로그라드는 무정부적 혼란 속에 있었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우선 무엇보다도 전시경제 체제에서 물자공급이 마비되었다. 생필품은 절대 부족해 빵 배급량도 하루에 200g 정도에 지나지 않아 시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모든 산업은 마비되어갔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전선에서는 전쟁피로증이 전체 병사들에게 퍼져나갔다. 유언비어가 병사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농촌에서 토지개혁이 단행되어 농민에게 토지가 분배되고 있다는 헛소문까지 농촌 출신 병사들 사이에 유포되었다. 전선에서 이탈병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붙잡히면 총살당할 수 있다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전선을 떠나 귀향길에 올랐다.

독일 외무성 문서보관소에 있는 1차대전 기간 러시아 강화조약 관련 문서.
독일 외무성 문서보관소에 있는 1차대전 기간 러시아 강화조약 관련 문서.

독일, 1918년 중반까지 볼셰비키 지원

레닌은 이 분위기를 감지하고 종전(終戰)과 함께 토지를 재분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선전·선동 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 세력은 드디어 임시정부가 들어서 있는 ‘겨울궁전’을 향해 전함 아우로라(Aurora)에서 대포를 발사했다. 임시정부를 타도하는 혁명의 포성이 울려 퍼졌다. 10월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레닌은 ‘조국방위’는 “소시민적이며 대중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사기술”이라고 주장하며 전쟁 반대를 선언했다. 폭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 앞에는 수많은 난관이 놓여 있었다. 독일제국 총사령부는 다음과 같이 외무부에 보고했다.

“지금의 볼셰비키 정권은 매우 어렵게 싸우고 있다. 은행들은 금융 지원을 거절했고 인민과 붉은군대를 위한 생필품을 조달할 긴급자금도 없다. 레닌은 이 점을 알고 있고,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제국 군 최고사령부는 레닌 정권에 대한 자금 지원을 가장 소망스럽게 생각한다.”

독일은 볼셰비키에 대한 지원을 더 강화했다. 레닌은 협상책임자 트로츠키에게 소비에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1918년 3월, 레닌은 독일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종료시켰다. 강화조약에서 레닌은 폴란드, 발틱3국, 우크라이나, 핀란드를 할양해 줌으로써 러시아 영토에서 지워버렸다. 유럽 영토의 26%에 달하는 제정러시아의 영토는 사실상 독일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다. 러시아는 또한 석탄과 석유 생산의 거의 전부와 산업 시설의 절반을 내주었다. 독일은 강화조약 후 바로 볼셰비키 정권의 수도가 된 모스크바에 대사관을 설치했다.

1918년 중반까지 볼셰비키 세력의 권력기반은 확고하지 못했다. 야당인 사회혁명당 등 레닌 반대 세력들은 강화조약과 독일의 러시아 영토 점령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 세력에 볼셰비키가 합류하게 될 경우 독일 전략은 물거품이 된다. 독일은 더 많은 지원을 퍼부었다. 한편 서부전선의 러시아 동맹국들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지원을 강화했다. 러시아 내에서 각 정파들은 독일 편, 영국 편, 프랑스 편으로 나뉘어 제각각 무기와 지원금을 챙겼다. 이렇게 해서 독일은 1차 목표인 동부전선에서의 평화와 세력권 확대를 이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소비에트 정권은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테러와 살육이 시작됐다. 술에 취한 적군(赤軍)은 반대파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1918년 7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발생한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 몰살은 살육극의 정점을 이루었다. 살육 작전에 참여했던 KGB의 전신 체카(Cheka) 요원 그리고리 니쿨린(Grigori Nikulin)은 녹음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모두가 바로 즉사하지는 않았다. 작은 아이(황태자 알렉세이)는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그 아이에게 총을 겨냥해 쏘았다.”

레닌이 탔던 열차. 독일철도아카데미에 전시되어 있다.
레닌이 탔던 열차. 독일철도아카데미에 전시되어 있다.

레닌, 독일에 사기 치다

레닌은 이 살육에 대해 함구하고 모든 증거를 없앨 것을 지시했다. 볼셰비키는 잔악무도했다. 시신에 산성 화학 물질을 부어 누가 누구인지 식별이 어렵게 만들었다. 그 후 바로 이들의 시체를 숲속으로 싣고 가서 파묻었다. 어떻게 니콜라이 2세 가족들이 죽게 되었는지도 비밀에 부쳐졌다. 독일의 정보당국도 알 수 없었다.

빌헬름 2세는 4촌인 알렉산드라 황후와 그녀의 언니만은 구출하겠다는 생각으로 볼셰비키에 두 사람은 살려달라고 요구했고 “모든 것은 오케이”라는 볼셰비키의 말을 믿었다. 그후 볼셰비키는 독일 측에 “차르는 혁명의 와중에 사망했으나, 그 가족들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달했다. 다른 루트의 정보망이 없던 독일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독일 지도부를 속이는 데 성공한 레닌은 악마적 게임을 즐겼다. 볼셰비키 정권은 독일 측에 황후와 5명의 자녀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독일에 투옥 중인 혁명동지들을 석방·교환할 것을 대담하게 제안했다. 이미 황후와 자녀들이 모두 살해당한 뒤였다. 얼마 후 독일 지도부는 황후와 자녀들의 사망 소식을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다. 레닌에게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독일은 레닌과의 모든 협력을 끝내기로 하고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볼셰비키 정권은 독일의 움직임을 모른 채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내려고 했다. 기관총 2만정, 소총 20만정, 탄환 5억발의 원조를 요청했다. 독일 군부는 이 원조 요청을 거부했다.

1918년 11월 5일,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독일은 이제 서부전선의 적대국들과의 종전을 위한 협정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패전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 독일은 러시아와 체결했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폐기하는 것은 물론 독일 영토의 15%가량을 상실했다.

박광작 성균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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