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신내점 ‘꽃너울’의 꽃 자판기.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연신내점 ‘꽃너울’의 꽃 자판기.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서초구청 내 자판기 앞. 알맞게 익은 사과 한 알을 골랐다. 버튼을 누르고 지폐를 넣자 포장된 경북 청송의 사과가 손에 들어왔다. 씻어 나온 사과라 껍질째 먹을 수 있었다. 구청 관계자에 따르면 주로 여직원들이 아침식사 대용으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공무원·민원인들이 자주 사서 먹기 때문에 수시로 청송에서 사과와 사과즙을 택배로 조달하고 있다고 했다.

자판기시장이 탈바꿈하고 있다. 커피·캔음료·간식거리에 국한됐던 품목들이 다양해졌다. 꽃에서부터 헌책·반찬·바나나·샐러드·화장품·헬륨풍선에 라면·피자 등 나름의 조리 과정이 필요한 음식들도 자판기에서 구입할 수 있다. 심지어 소·돼지고기도 자판기로 판다. 최근에는 소비자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감성’ 자판기까지 나왔다. 동전 500원을 넣으면 시·소설 속 명문(名文)을 뽑아주는 자판기, 고민 내용을 입력하면 해결 방안이 나오는 자판기 등이다. 또 캔과 페트병을 넣으면 일정 금액을 적립해주는 재활용품 자판기와 스마트폰에 충전해놓은 가상화폐로 특정 물건을 살 수 있는 자판기까지 등장했다.

자판기는 눈부신 변신 못지않게 숫자도 늘고 있다. 1990년 3만대 수준이었던 커피 자판기는 2016년 한 해에 836대를 생산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이색 자판기들이 등장하면서 전체 자판기시장은 커지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통계연보에 따르면 ‘식품자판기’만 해도 2015년 2만5883대에서 2016년 2만8039대로 1년 만에 2000여대 넘게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자판기시장의 확장과 변모에는 무인화(無人化) 시스템 추세가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 외에도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인건비 부담, 높아지는 지대(地代) 때문에 업주들은 무인 시스템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기계값 등 초기 투자비용은 좀 들어도 운영·관리가 편하고 정기 지출이 적어 자판기를 이용해 ‘투잡’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낮에는 일반 회사를 다니고, 밤에는 자신이 설치한 자판기의 관리와 수금을 맡는 식이다. 1인사회가 도래하면서 보편화된 ‘비대면(非對面) 문화’의 특성도 자판기 증가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입지·아이템·사후관리 여부가 관건

업계 종사자에 따르면 특히 최근에는 최저임금 인상 이후 자판기 창업 문의가 많아졌다고 한다. 자판기 창업의 경우 적게는 몇십만원부터 많게는 몇천만원이 든다. 자판기 생산기업이 대기업에 자판기를 판매할 경우 수억원 규모다.

이색 아이템으로 승부하는 자판기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어떤 점이 중요할까. 자판기 제조업체인 미래자판기연구소 이영환 대표의 말이다. “기존 자판기 시스템의 종류는 착즙·냉장·엘리베이터 기능 등 10가지 미만입니다. 어떤 제품을 넣느냐에 따라서 자판기 성격이 달라지는 겁니다. (일반적인) 음료 자판기 같은 경우 요즘 업자들끼리는 ‘본전 뽑는 데 10년 걸린다’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꽃 자판기는 자리만 좋으면 서너 달 만에 원가 회수가 되고 수익이 납니다. 얼마나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어떤 아이템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특히 자판기는 기계이기 때문에 애프터서비스, 사후관리가 가능한 업체를 선택하는 게 필수적입니다. 부품 문제로 기계가 고장 났을 때, 자신이 구매한 자판기 회사가 이미 시장에서 없어져 할 수 없이 폐업한 사례들도 많습니다.”

전문가들은 자판기 업종이 비교적 사업 원리가 단순해 다수의 창업자들이 도전하지만, 절묘한 타이밍 포착과 아이템 감각이 없으면 시세 차익을 거두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실제 취재 결과 중소사업체와 대기업들도 자판기 사업만으로 막대한 수익을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만 무인화·자동화의 사회적 추세 속에서 자판기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경우 소비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고 이벤트성 홍보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예컨대 ‘샐러드판다’의 경우 샐러드 자판기 사업으로 홍보 효과를 누리고 있다. 이 회사 김성학 사장은 과거 중국에서 원두커피 자판기 창업에 도전하면서 자판기 비즈니스에 대한 감을 잡았다고 한다. 그는 싱가포르 여행 중 샐러드 자판기를 보고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켰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길과 여의도 같은 중심지에 설치한 자판기에서 치즈, 닭고기를 재료로 한 샐러드 5종을 판매하고 있다. 주 소비층은 인근의 여성 직장인들이다. 자판기 매출도 늘어나면서 마트 납품과 온라인 판매에도 도움이 됐다고 한다.

부산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공들찬’의 양지영 사장도 두 달 전 매장 앞에 반찬 자판기를 설치해 손님들의 이목을 끌었다. 김치·멸치볶음·연근조림 등 70종 반찬 중 쉽게 상하는 나물 종류를 빼고 주로 조림류나 숙성 밑반찬 등을 판매한다. ‘반찬 자판기 있는 집’으로 소문이 나 지역 언론에도 기사가 났다. 평일보다 가게가 쉬는 주말에 10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다.

청과회사 돌코리아는 아침식사를 하기 힘든 학생·직장인·1인가구를 타깃으로 국내 최초 바나나 자판기를 선보였다. 현재 서울 지하철역 등에 총 6대가 설치됐다. 1~2개씩 낱개 포장돼 있고 휴대 케이스도 따로 판매한다.

피엔푸드시스템은 햄·베이컨·페퍼로니 등 4가지 종류의 피자를 즐길 수 있는 자판기를 휴게소·리조트 등에 설치했다. 파스타·젤라토 자판기도 수입해 들여올 예정이다.

마음약방 자판기

서울문화재단에서는 ‘마음약방’이라는 캠페인성 자판기를 운영한다.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처방해주는 게 목적이다. 아예 자판기 형태의 ‘무인편의점’을 계획하는 경우도 있다. 미니스톱은 올해 음료·과자에 더해 김밥·도시락·컵라면·샌드위치까지 판매하는 ‘무인매장’ 테스트 사업을 준비 중이다. 자판기 4~5대 규모로 편의점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실제 편의점처럼 자판기 옆에 온수기와 전자레인지를 설치해 즉석 취식도 가능하게 할 예정이다.

다양한 자판기 품목 중 특히 요즘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아이템은 ‘꽃’이다. 지금은 거의 보편화된 상태지만 꽃 자판기는 차별화된 디자인만으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또 특수건조나 약품처리를 통해 생화의 느낌을 살리면서 보존기한도 늘려 경쟁력이 더 커졌다. 꽃 자판기 창업 전문업체 ‘꽃너울’ 임은옥 실장의 말이다.

“화종(花種)은 같아도 포장과 스타일에 따라 제품이 달라져요. 바구니에 담을 수도 있고 유리병에 앉힐 수도 있죠. 꽃집에 가서 비싼 꽃을 사지 않아도 자판기에서 훨씬 저렴하고 품질 좋은 꽃을 구매할 수 있게 됐어요. 저희 자판기 꽃은 1만~3만원 정도로 싸지만 품질은 높습니다.”

자판기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사업자 등록증이 필요하다. 식음료 자판기의 경우 관할 보건소에 영업신고를 한 뒤 신고증이 나오면 세무서에서 사업자 등록을 한다. 식품 외의 일반 물건, 또는 식품 중에서도 유통기한 1개월 이상의 완제품을 파는 경우는 곧바로 세무서에서 사업자 등록을 하면 된다.

창업 전문가인 강병오 중앙대 산업창업경영대학원 겸임교수는 자판기시장 자체가 진입장벽이 낮지만 사업을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뜨고 있다는 건 누구나 관심이 많다는 겁니다. 의미 있는 시세 차익을 거두려면 남보다 먼저 들어가서 히트작품을 내야 합니다. 맛이든 아이디어든 차별화를 해야 해요. 독특한 콘셉트에 기술도 우수해야 살아남습니다.”

신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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