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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 리포트] 평창 패럴림픽이 가르쳐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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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00호] 201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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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평창 패럴림픽이 가르쳐준 것

어느날 내가 장애인이 된다면

김효정  기자 

지난 3월 18일 막을 내린 평창 동계패럴림픽을 지켜보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는가.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선수들이 대견하면서도 측은했을 것이다. 장애를 안고 태어나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지만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는 그들. 하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인식 오류가 있다. 패럴림픽에 참가한 우리 국가대표 선수 36명 중 선천적인 장애는 5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당신처럼 평범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장애인이 됐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패럴림픽 금메달을 안겨준 크로스컨트리 신의현 선수만 해도 대학 졸업 직전 갑작스럽게 당한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했다. 전체 장애인 인구를 봐도 89%가 후천적 장애인이다.
   
   이 기사는 불행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도 닥칠 수 있는 불행의 심연을 우리 공동체가 함께 건너야 한다는 것, 이것을 말하기 위해 누군가에게는 떠올리기조차 힘든 불행 그 이후의 스토리를 전하는 것이다. 장애인이 되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다. 예기치 못한 일로 장애를 얻게 된 장견중·최성혁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 ‘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꿈처럼 아득히 들리는 소리였다. 붉은 화염을 얼핏 본 것이 마지막,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새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들어보니 한 달이 지나 있었다. 까마득한 정신을 다잡고 주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몰던 차가 폭발했다고 한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 사고가 나고 처음 이틀간은 곧 죽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뇌도 다쳤고 뼈도 깨졌고 살도 터졌다. 가족들은 오열했고 장례 치를 걱정까지 했지만 삶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의 생명력이란 끈질겨 기어코 질긴 숨을 내뱉었다.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 달이 되던 때에 기적같이 손가락을 움직이고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살아 돌아왔지만 맨정신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뇌를 다쳤다고 하더니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도 어려웠다. 가장 불편한 것은 머리와 두 눈을 감싸고 있는 붕대였다. 오랜 중환자실 생활을 끝내고 일반 병실로 옮겨서도 붕대를 풀 수 없었다. 병실을 지키며 간호하는 어머니와 아내에게 불편하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람을 더 힘들게 할까봐 참기만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잠결에 어머니와 아내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울음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두 사람은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시력이 돌아올 가능성은 없는 거죠.” “없다고 한단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눈을 감싸는 붕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붕대를 풀면 힘겹게 눈 뜨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그건 상상일 뿐이었다. 붕대가 없이도 앞이 캄캄했다. 명암도 느껴지지 않는 생전 처음 보는 어둠의 세계. 사고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것이다.
   
   2004년 서른아홉 살, 인생에서 가장 활기찬 때를 보내고 있던 장견중씨에게 닥친 사고였다. 장씨의 삶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문은 못 밟아봤지만 아쉬운 것은 없었다. 군대에서 운전대를 잡았던 경험을 살려 큰 버스회사에 취직했다. 10년 넘게 서울과 경기도 파주를 오가며 손님을 실어날랐다. 일에 대한 욕심도 있었고 성격도 활발한 터라 회사 내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목숨줄같이 소중한 딸과 아내까지, 뻔할 정도로 무난한 삶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모은 돈으로 차를 마련해 직접 손님을 싣고 나를 때도 그랬다. 25인승 소형 버스였지만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무엇 하나 잘못될 일은 없어 보였다. 사고는 지극히 평범한 날,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갑자기 차가 폭발했어요. 그것뿐이에요. 전조, 불길한 예감, 이런 것들은 없었습니다.” 사고로 왼쪽 안구를 감싸고 있는 뼈가 완전히 부서져 안구가 튀어나와 적출했다. 오른쪽 눈의 망막은 다 찢어졌다.
   
   “2005년 1월에 다섯 번째 수술을 했는데 그때는 명암이라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돌아올 거라 믿었어요. 실제로 한 달 정도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곧 다시 어두워지더군요.”
   
   수백, 수천 명의 승객을 실어다나르면서 매일 다채로운 풍경을 감상하던 예전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었다. 차 사고가 난들 다리 하나, 팔 하나 부러지는 것 이상을 상상해 본 적 있을까.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 감각인지 잃고 나서야 알았지요. 아무것도 혼자서 할 수 없고 너무나 고독해지더군요.” 사고를 당한 이듬해, 마흔 살의 장씨는 깊은 어둠으로 빠져들었다.
   
   
   # 부모 형제와 떨어져 18살 어린 나이에 독립해 깨달은 점은 ‘돈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학과 공부가 돈벌이에 그다지 도움될 것 같지는 않았다. 과감하게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앞뒤 돌아보지 않고 저돌적으로 추진해나가는 적극성 덕분에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났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자신감 넘치게 살았고 주변에 낙관적인 기운을 불어넣어 주려 애썼다.
   
   서른한 살 되던 2011년 초여름 어느 밤은 평범한 날이었다. 늘 그렇듯 오토바이를 타고 퇴근하면서는 집에 가서 무얼 할까 고민했다. 더워지기 시작했으니 얼른 귀가해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셔야겠다 결심하고 무의식 중에 오토바이 핸들을 틀었다. 빨간불을 발견하고 ‘아차’ 생각하는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몸이 날아갔다.
   
   몸이 뒤집히는 게 느껴졌고 왠지 모르게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몸이 땅에 부딪친 것이 느껴졌다. 다시 또 눈을 감았다. 희미하게 정신을 차려 보니 흰 앰뷸런스 안 천장이 보였다. 까무룩 다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다. 기계 소리로 정신 없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몸이 꽁꽁 묶인 것만 같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혔다.
   
   시속 60㎞로 달려오던 차와 부딪쳐 어느 한 곳 성한 곳 없이 실려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척추 뼈가 으스러지면서 척수 신경이 손상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팔과 몸통의 감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지만 다리는 그렇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다리인 것처럼 힘을 실어봐도 다리는 꼼짝하지 않았다. 최성혁씨는 그렇게 두 다리를 잃었다.
   
   “사고를 당했는데도 평생 휠체어를 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처음에는 이러다가 언젠가는 걷겠지,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평생 이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최성혁씨의 주치의는 그에게 우울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낙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는 약을 처방했다. 약을 먹으면 움직이지 않는 두 다리도 ‘까짓것’ 하는 심정으로 쳐다볼 수 있었다.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기까지 했다. 문득문득 어둠 같은 것이 찾아오곤 했지만 약의 힘이 어둠을 억눌러줬다. 그가 실존하는 어둠과 맞닥뜨린 것은 휠체어를 타고 처음 밖으로 나섰을 때의 일이다.
   
   “장애물이 없고 평탄한 병원에서는 전혀 알지 못했어요. 우리가 다니는 길은 울퉁불퉁하고 고르지 않다는 것을요. 휠체어를 앞으로 가게 하는 데에도 많은 팔 힘이 들어갔습니다. 그저 미는 것이 아니라 팔다리를 움직이듯 조종을 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외출한 사람들이 밀고 당겨 도착한 음식점에서는 모두가 최씨를 바라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불쌍하네’. 낯모르는 시선을 한몸에 받아내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 동정 섞인 불쾌감 같은 것이었다.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할 때마다 날아드는 차가운 시선도 서 있을 때는 모르던 일이었다.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평생 이런 시선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구나, 이게 장애인의 삶이구나. 마치 다른 사람의 삶을 생각하듯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아이스하키 대표팀. photo 연합

   ‘장애인 되기’ 홀로 감당해야
   
   장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 보건복지부의 ‘2014년 장애인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장애인 중 후천적인 장애를 얻어 장애인이 된 사람, 즉 중도장애인 비율은 89%에 달한다.
   
   권재현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국장은 “후천적 장애를 얻는 중도장애인의 비율은 선진국으로 갈수록 높아진다”고 말했다.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선천적 장애인은 줄어듭니다. 대신 장애인의 수나 중도장애인의 비율은 선진국에서 오히려 더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장애인이란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상태였다’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장애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장애를 얻게 되고,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 체계적인 제도와 시스템이 필요하다고는 많이들 얘기하지만 막상 장애인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경우는 드물다. 장애인 중 그 누구도 선뜻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장애와 더불어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사람은 없다.
   
   18년 전 높은 곳에서 떨어져 두 다리를 못 쓰게 된 박주현씨는 여전히 자신의 장애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다리를 못 쓸 정도로 다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자꾸만 세상과 떨어져 안으로 숨고 싶었죠. 죽고 싶었습니다.”
   
   분노, 우울, 절망 같은 감정은 장애인에게 당연하게 찾아오는 감정들이다. 찰나의 실수로 인해 생긴 장애라면 ‘왜 그랬을까’ 후회하게 되고 예측하지 못한 사고로 인한 것이라면 ‘왜 나에게’ 화를 내게 된다. 아무리 원인을 되짚어 봐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매번 좌절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을 ‘비정상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장애를 얻기 전의 삶은 아득하기만 하다. 한국척수장애인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척수손상으로 장애인이 된 후 자살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68.8%나 됐다. 실제로 자살시도를 해본 경우도 32%에 이른다.
   
   이런 감정들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43년 전에 폭발 사고로 발목을 절단한 민동식씨는 “여전히 꿈속에서 사고 당시의 장면이 되풀이되면서 놀라 잠에서 깨곤 한다”고 말했다. 박지순 대구대 재활심리학과 연구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장애 수용’ 정도는 시간과는 관계가 없다.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는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장애를 얻고 난 다음의 삶은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다르다. 일상생활을 하는 방법도 새롭게 배워야 한다. 밥 먹는 방법, 화장실 가는 방법 같은 것도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배우듯 장애인도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거의 대다수의 장애인이 이전의 직업 활동을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하기 위한 교육도 새로 받아야 한다. 장애 유형과 정도에 따라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는지, 그 직업을 위해 갖춰야 하는 능력은 어떤 것인지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장애인들은 이런 ‘장애인 되기’의 과정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 시각장애를 얻은 장견중씨의 경험은 그런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 누구도 저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걸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고 걸어본 적이 있나요. 시각장애를 얻으면 그런 것을 처음부터 다 배워야 합니다.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는 것도 예전처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걸 배울 수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장씨는 장애를 얻고 1년 동안 어둠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고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을 위해서라도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형수님이 TV에서 본 내용이 있다며 전화를 해왔습니다. 시각장애인을 돕는 복지관 같은 시설이 있는데 거기에 가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요. 그래서 제 발로 찾아갔습니다. 복지관에서 제 얘기를 듣더니 깜짝 놀라더군요. ‘1년 만에 복지관에 오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했습니다. 대개는 최소한 3~4년은 지나야 알음알음 찾아오지 저처럼 빨리 장애를 인정하고 무언가 하러 온 사람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더 빨리 찾아갈 수도 있었다. 장견중씨는 병원에서 퇴원하고 가족의 도움을 받아 주민센터에 장애인으로 등록하러 갔다. 주민센터에서는 장애인 등록을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 어떤 안내도 해주지 않았다. 가족들 말에 따르면 주민센터 곳곳에 장애인 등록과 지원에 대한 안내서가 비치돼 있었다고 하지만 읽지 못하는 장씨에게는 아무 소용 없는 물건일 뿐이었다. 장씨만의 경험이 아니다. 막상 장애인이 돼서 장애인 지원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싶어도 제대로 안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주민센터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하도록 도와준다든가 각종 시설에서 쓸 수 있는 바우처(voucher)를 발급해준다든가 하는 경제적 지원에 그칠 때가 대부분이다.
   
   
   장애인을 세상 밖으로
   
▲ 2011년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최성혁씨.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에서 장애인은 장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장애를 얻게 돼 우울에 빠져 있으면 이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고 끌어주는 제도가 없다. 혼자 장애를 이겨내고 문 밖으로 나와 찾아가지 않으면 기껏 마련돼 있는 장애인 지원 정책을 활용해 보기도 어렵다.
   
   최성혁씨는 전형적으로 스스로 이겨낸 사례다.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도와줄 부모도, 형제도 없었습니다. 제 장애의 원인은 제가 신호를 위반했기 때문에 생긴 사고였는데, 이 경우에는 건강보험공단의 보험금 지급이 거부되더군요. 수천만원을 배상해줘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의 상황이 됐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어요.”
   
   최씨는 재활전문병원에서 만났던 휠체어 영업사원을 떠올렸다. 장애인에게 휠체어란 ‘몸 밖의 몸’이라고 할 정도로 몸과 다름없는 도구인데 보통 휠체어를 만드는 사람이 휠체어를 수리하고 판매까지 한다. 그는 자신의 휠체어를 사면서 친해진 휠체어 생산업자에게 ‘일을 배우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일단 돈을 벌어야 하니 휠체어를 파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선택은 의외의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휠체어를 팔기 위해 다른 장애인을 만나고 얘기를 듣고 제 얘기를 하면서 저도 모르게 제가 장애인이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휠체어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일에 익숙해졌고요. 자연스럽게 장애에 적응한 겁니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장애를 진단하고 나면 관련 기관에서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이 장애인을 찾아와 장애인 본인과 가족을 면담한다. 재활상담사는 장애에 따른 정신건강 문제나 진로 상담을 해주고 특수교사는 장애인에게 필요한 교육 프로그램을 알려준다. 행정 담당자가 찾아와서는 받을 수 있는 지원제도를 알려주고 가족과도 면담을 가진다. 이 모든 과정에서 병원과 행정기관, 장애지원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장애가 생겼다고 해서 장애인이 사회에서 누락되는 경우는 드물다.
   
   마음의 문제는 오롯이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 생계의 문제 때문에 직업활동 일선에 서둘러 나설 수밖에 없는 장애인이 많다. 그러나 단지 장애에 적응했을 뿐 완전히 장애를 수용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계속 찾아다니는 최성혁씨는 마음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무척 많이 봤다. 집 밖으로 끌어내 악기를 배우게 하고 친구를 사귀게 하면서 장애인으로 사는 삶을 누리게 하고는 있지만 쉽지만은 않다.
   
   “장애인 시설이 부족하거나 장애인 지원제도가 더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장애인이 제도와 시설을 이용하게끔 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장애인의 삶이란 새로 태어난 삶이나 다름없는데 태어나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은 생략한 채 곧바로 훈련부터 시키려고 하니 제대로 될 턱이 없습니다.”
   
   괴리가 생기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장애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애인은 처음부터 장애인이었고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의 얘기를 들어 보면 장애는 우연히 얻는 것이다. 장애인이 되기 쉬운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고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질병 역시 마찬가지다. 장애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말하는 권재현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국장의 절실한 말이다.
   
   “우리 사회에는 250만명의 장애인이 있고 2인 가족 기준으로도 최소한 500만명, 인구의 10분의 1이 장애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애를 정상 사회 밖에 존재하는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면 영원히 겉돌 수밖에 없죠. ‘내가 장애를 얻는다면’ 상상해 보는 것은 장애인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 중 하나입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장애인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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