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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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7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의 신선식품 코너. 이곳에는 푸릇푸릇한 봄철 채소들이 진열돼 있었다. 주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보니 진열대에 속이 꽉 찬 배추가 한가득 올라와 있었다. 주부들은 배추를 손에 들고 꼼꼼하게 살펴봤다. 배추의 바깥 잎사귀의 색은 짙은 초록빛이었고, 속은 선명한 노란색을 띠었다. 배춧잎 한가운데 있는 심이 얇고 작았다. 주부들은 “배추가 단단하고 빛깔이 싱싱해 보인다”고 말했다. 진열대에 쌓여 있던 배추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이 마트에서 다른 품종의 배추는 볼 수 없었다. 소위 ‘봄배추’라고 불리는 이 품종은 언제부턴가 전국 마트의 진열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진열대에 올려놓고 몇 날 며칠을 팔아도 색과 모양이 오랫동안 유지됐다. 크기와 모양이 균일해서 상자 포장에도 적합했다. 저장성이 뛰어난 이 배추는 전국 유통업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생산성도 뛰어났다. 농민들도 환경적응력이 뛰어난 이 배추를 너도나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 배추는 결구력(結球力)도 강했다. 결구란 배추의 채소 잎이 여러 겹으로 겹쳐서 둥글게 속이 드는 걸 말한다. 종자회사인 사카타코리아가 내놓은 품종인 ‘춘광’이다.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던 ‘춘광’은 결정적으로 단점이 있었다. 높은 저장성과 생산성만큼 맛이 따라주지 못했다. 김치제조회사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김치를 담그기에는 배추가 너무 단단하고 단맛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이미 춘광은 배추시장을 접수한 뒤였다. 김치제조회사들은 다른 배추를 구하고 싶어도 ‘춘광’ 이외에는 구할 수가 없었다. 결국 김치제조회사들은 대책을 찾기 시작했다. 배추에 적합한 김치 제조방식을 개발한 것이다. 양념에 감미료를 더 많이 치고, 감칠맛을 내는 재료들을 넣었다.

유통시장의 판도를 바꾸다

봄배추의 대명사가 된 ‘춘광’의 등장은 배추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처럼 시장에서 한 종자가 성공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얽혀 있다. 유통업자에게는 저장성이, 소비자에게는 맛이, 농민에게는 생산성이 가장 중요하다. 삼박자가 다 맞는 품종을 개발하는 일은 모든 종자업자들의 꿈이다. 지금 세계 종자시장은 우수한 종자 개발을 위한 기업들의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 정부도 종자 개발을 위해 2012년부터 ‘골든 시드 프로젝트(Golden Seed Project)’를 추진해오고 있다. 골든 시드 프로젝트란 종자 강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농촌진흥청·산림청 공동의 국가 전략형 종자 R&BD사업(사업화 연계 기술 개발)을 말한다. 골든 시드란 금값 이상의 가치를 가진 고부가가치 종자다. 실제 우리가 먹는 파프리카 씨앗 3g의 가격은 약 36만원이다. 참고로 금 1돈(3.75g)의 가격은 약 17만원이다. 파프리카 씨앗의 값이 금값의 2배에 달한다. 때문에 종자를 가리켜 ‘농업의 반도체’로 부르기도 한다.

골든 시드 프로젝트의 주된 내용은 종자 개발을 통해 수출 전략 종자 20개 이상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채소 종자(고추·배추·무·수박·파프리카), 원예 종자(양배추·양파·토마토·버섯·백합·감귤), 수산 종자(넙치·바리과·전복·김), 식량 종자(벼·감자·옥수수), 종축(돼지·닭)의 총 5개 사업단을 지원하고 있다. 사업의 기간은 총 10년. 2016년 품종개발 기초 연구 마련, 해외진출 기반구축 등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는 1단계 사업을 마쳤다.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2단계 사업이 시작됐다. 정부는 오는 2021년까지 종자수출국으로서의 가시적 성과를 낸다는 계획이다.

지난 3월 13일 ‘골든 시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워진 김제민간육종단지를 찾았다. 김제터미널에서 민간육종단지를 가는 길에는 끝없는 들판이 이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길가에 핀 꽃들이 하늘거렸다. 차량은 들과 들 사이에 난 좁은 길을 달렸다. 비포장도로 위에서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흙먼지가 날렸다. 민간육종단지에 도착하자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한눈에 봐도 규모가 엄청났다. 이곳은 2016년 10월 김제시 백산면 일대 54.2㏊ 부지에 사업비 약 700억원을 들여 완공됐다. 김제에 민간육종단지가 세워진 이유가 있다. 김제의 기후는 종자를 개발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연평균 기온은 12.7℃, 무상(無霜)일수는 328일, 월 일조시간은 174시간. 김제는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국내 유일한 지역이다. 김제는 농가 호당 경지면적이 2.5㏊로 한 농가당 전국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경작하는 곳이다. 농가인구도 2만9000여명으로 김제시 전체인구의 약 31%를 차지한다. 김제 전체 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37.6%에 달할 정도로 높다.

현재 민간육종연구단지에는 20개의 토종 종자기업이 입주해 종자 연구를 하고 있다. 기업별 수준에 따라 ‘역량 강화형’은 1㏊ 규모 내외, ‘수출시장 개척형’은 2~3㏊ 규모의 연구동을 각각 제공받았다. 민간육종단지에서 골든 시드를 향해 종자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안정환·정운화·이기병씨 3명을 만났다.

(왼쪽부터) 정운화 코레곤종묘 육종연구소장. 이기병 아름농업연구소장. 안정환 에코시드 대표.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왼쪽부터) 정운화 코레곤종묘 육종연구소장. 이기병 아름농업연구소장. 안정환 에코시드 대표.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새로운 종자 개발되기까지 10년

“종자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뭔지 아시나요?”

안정환 에코시드 대표는 기자를 보자마자 대뜸 질문을 던졌다. 안 대표는 고추 종자 개발에만 30년을 넘게 매달린 인물이다. 순간 기자의 머릿속에 연구비, 첨단장비 등의 단어가 떠올랐다. 안 대표는 대답을 망설이는 기자에게 “인내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종자가 개발되는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자신이 원하는 특성을 가진 한 품종에 다른 품종을 교배한다. 종자 교배를 거친 다음에는 그 종자를 직접 재배한다. 재배를 해서 그 종자의 특성이 어떤지 지켜본다. 이 과정만 1년이 걸린다. 문제는 1년 만에 성공하는 경우는 없다는 점이다. 이 과정을 최소한 10회 이상은 반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수한 품질의 종자가 개발되기까지 적어도 10년은 걸린다는 얘기다. 현재는 세대단축 기술을 통해 개발 기간을 단축해 나가는 중이다. 세대단축이란 개발 종자를 갖고 1년에 2모작이 가능한 동남아 지역에서 재배를 하는 것을 말한다. 1년에 두 번 재배가 가능하기 때문에 기간도 절반으로 단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그는 역병에 강한 고추인 ‘역강홍장군’을 세상에 내놓은 인물이다. 그는 1986년 서울대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한농종묘(현 LG팜한농)에 입사했다. 입사하고 몇 년 뒤 작황조사를 위해 전국의 농촌으로 출장을 떠났다. 당시 그가 본 농촌의 풍경은 처참했다. 1980년대 후반 논밭에 들이닥친 역병 때문에 모든 고추가 말라 비틀어 죽어가고 있었다. 농촌에서 만난 농부들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당시 상황을 안 대표는 이렇게 전했다. “농민들이 밤낮으로 일군 결실들이 역병 때문에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역병에 강한 고추를 만들어 농민들의 시름을 덜어주고 싶었다.” 회사로 돌아온 그는 고추 개발에 몰두했다. 이전까지 없던 병충해에 강한 새로운 고추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역강홍장군’이 탄생하기까지 10여년이 걸렸다. ‘역강홍장군’의 등장은 고추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농민들은 역병에 강한 고추가 등장하자 환호했다. 1990년대 후반 안 대표는 다시 농촌을 찾았다. 농민들은 그의 두 손을 잡고 “정말 고맙다”고 했다. “10년간의 노력이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당시 농민들이 기뻐하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 내가 지금도 종자 개발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안 대표는 몸담고 있던 회사를 나와 종자 개발 회사인 에코시드를 세웠다. 본격적으로 종자 연구에만 매달리고 싶었다고 한다. 결국 2005년 맛과 모양까지 겸비한 업그레이드된 지금의 역강홍장군을 완성했다. 지난해 에코시드는 10만달러(약 1억700만원)의 수출실적을 달성했다. 안 대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했다. “세계 종자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약 1%에 불과하다. IMF 때 한국 종자기업들이 외국으로 팔리며 위축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종자 강국으로서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앞으로 종자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총성 없는 종자전쟁 중

안 대표의 말처럼 세계 농산물 종자시장 규모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농업기술실용화재단에 따르면 세계 종자산업 규모는 695억달러 규모이다. 해마다 5.2%대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종자는 식품·의약품·화장품 등 활용범위가 광범위하다. 현재 세계 종자시장의 1위는 26.7%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이다. 2위는 중국으로 22.1%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종자 강국이자 농업 강국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종자시장 점유율은 1%로 열악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세계 종자시장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종자산업은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크게 위축됐다. 당시 5대 종자기업 중 4곳이 다국적기업에 인수되며, 국내 종자들이 해외로 팔려나갔다. 청원종묘는 일본의 사카타에, 서울종묘는 스위스 노바티스에,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는 미국의 몬산토에 인수됐다.

이로 인해 무·배추 등 토종 채소 종자의 50%가 외국 회사에 넘어갔다. 양파, 당근, 토마토의 종자는 무려 80% 이상이 넘어갔다. 중앙종묘가 가지고 있던 청양고추 종자도 이때 몬산토로 넘어갔다. 원래 우리나라 종자인 청양고추를 먹을 때마다 몬산토에 로열티를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후 2012년 국내 기업인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가 갖고 있던 삼복꿀수박, 불암배추, 관동무 등 채소 종자 300여 품종에 대한 특허권을 인수했다. 하지만 채소시장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토마토, 파프리카, 시금치 등은 여전히 몬산토의 권리로 남아 있다. 다국적 종자기업들이 각국의 종자기업 인수에 사활을 거는 이유가 있다.

“종자를 개발하는 것은 단순히 씨앗만 판매해서 수익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종자에 적합한 제초제, 재배방법 등 종자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패키지를 함께 판매하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종자기업을 인수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농산물시장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입니다.”

정운화 코레곤 육종연구소장의 말이다. 정운화 소장은 1989년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종묘에 입사했다. 서울종묘는 IMF 때 스위스의 노바티스에 인수됐다. 이후 종자 개발에만 매진하기 위해 뜻을 함께한 동료들과 코레곤을 설립했다. 코레곤의 대표 종자는 무, 양파, 수박, 양배추 등이다. 지난해 코레곤은 210억원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코레곤의 경우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약 1000가지 이상의 종을 보유하고 있다. 1000가지의 특성을 가진 다른 종을 끊임없이 배합해 우수한 품질의 새 품종을 만들기 위해서다.

정 소장은 종자에서 몬산토라는 기업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세계 1위 종자기업 몬산토는 세계 종자시장의 43%를 점유하고 있다. 주력인 생명공학 작물의 경우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몬산토가 종자시장에서 독점적인 지배권을 갖게 된 것은 제초제 ‘라운드업(Roundup)’과 유전자 변형 종자 ‘라운드업 레디(Roundup Ready)’ 덕분이다. 1974년 개발한 라운드업은 몬산토를 초국적 기업으로 도약시킨 효자 상품이다. 1996년에 나온 라운드업 레디는, 라운드업의 제초 효력에 내성을 가진 농산물 종자다. 라운드업만 2~3차례 뿌리면, 라운드업 레디 종자 이외의 식물은 모두 죽어버린다. 제초제인 라운드업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라운드업 레디 종자를 심어야 하게 된 것이다. 이 상품들을 통해 몬산토는 제초제와 종자시장 점유율을 한꺼번에 끌어올릴 수 있었다. 몬산토는 자신들이 개발한 제초제로 돈도 벌고, 이에 견디는 종자로 다시 큰 수익을 내고 있다.

정 소장은 “한국 기업 가운데에는 몬산토처럼 유전자 조작을 통해 종자를 개발하고 제초제를 함께 파는 경우는 없다”면서 “대신 종자를 개발하고 재배법을 함께 판매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정 소장이 유전자 조작에 대해서도 말을 이어갔다. 종자시장에서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유전자 변형 농산물)는 뜨거운 감자다. 지난 3월 12일 ‘GMO완전표시제 시민청원단’은 GMO완전표시제 법제화 촉구를 위한 20만 청와대 청원에 들어갔다. 한국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 2017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수입된 GMO 식품원료는 228만t이다. 국민들은 매년 1인당 40㎏ 이상(세 끼 먹는 쌀 62㎏의 3분의 2)의 GMO 식품원료를 섭취하고 있다. 농산물 원료 상품에서 GMO 성분이 3% 이상인 경우에만 GMO 표기를 하고 있다. 식용유, 당류, 간장, 변성전분, 주류 등은 GMO 표시가 면제된다. GMO완전표시제 법제화가 이뤄지면 모든 식품에 GMO 여부를 표기해야 한다. 그렇지만 GMO 유해 여부를 놓고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정 소장의 말이다. “한국 종자기업들은 GMO을 개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시장점유율에서 낮을지는 몰라도, GMO 유해 논란이 일수록 한국 종자가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또 한국 특유의 농산물 재배법도 큰 강점이다. 여름과일인 수박이 언제부턴가 겨울에도 먹을 수 있게 됐는데 그 이유가 바로 수박밭에 이불을 덮어 키우기 때문이다.” 정 소장은 낮은 가격도 큰 경쟁력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3월 13일 전북 김제시 종자산업진흥센터 내 연구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3월 13일 전북 김제시 종자산업진흥센터 내 연구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GMO 유해 논란은 뜨거운 감자

한국 종자기업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자시장의 성장은 10년간 정체된 상황이다. 종자업체는 최근 3년간 증가세이긴 하지만 등록업체는 1669곳으로 많지 않다. 여기에다 실제 영업 중인 곳은 1207개사로 더 줄어든다. 2015년 종자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종자기업 1207개사 중 매출액 40억원 이상인 기업은 17개로 전체의 1.4%에 불과하다. 5억원 미만의 영세업체가 1061개(87.9%)로 대부분이다. 15억~40억원 41개(3.4%), 5억~15억원 88개(7.3%)다. 대부분의 국내 종자 업체들은 영세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R&D 투자 여력이 없는 실정이다. 이런 영세한 토종 종자 기업들을 살리기 위해 탄생한 곳이 바로 김제민간육종단지다. 정 소장의 말이다. “김제민간육종단지에 입주한 기업들은 마음놓고 종자 개발에만 매달릴 수 있어서 좋다. 종자 기업들이 옹기종기 몰려 있다 보니, 서로 교류도 하면서 시너지 효과도 나는 것 같다. 특히 지난해 이곳에서 열린 국제종자박람회에 참여했을 때는 정말 감격스러웠다.”

정 소장이 언급한 제1회 국제종자박람회는 2017년 10월 김제민간육종단지에 조성된 10만㎡에 달하는 전시회장에서 개최됐다. 국내 종자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받는 고추·토마토·배추·양배추·무·청경채 등 200여 품종이 전시됐다. 국제종자박람회를 통해 한국 종자기업들은 크고 작은 성과들을 얻었다. 특히 종자기업 ‘아름’은 이 박람회를 통해 일본의 수루가카키와 상추 300만주의 종묘(약 18억원)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아름이 키운 꽃 모양의 상추는 일본 바이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기병 아름농업연구소장의 말이다. “당시 상추를 전시해 놓았는데, 일본 바이어가 다가와 어떻게 상추가 이렇게 예쁠 수 있느냐고 묻더라. 꽃은 예쁘지만 금방 시들고 말아서 실용성이 떨어지는데, 상추가 꽃 모양을 하고 있으니 관상용에도 좋고, 먹을 수도 있다는 점이 큰 강점이었다. 지금 일본에서 꽃상추에 대한 반응이 매우 뜨겁다고 한다.”

올해도 제2회 국제종자박람회가 오는 10월 개최될 예정이다. 종자는 농산물의 생산성을 좌우하는 핵심 소재로 국가농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중요 요소다. 이 때문에 김제시는 국내 종자산업의 확실한 메카로 김제민간육종센터를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안경구 종자산업진흥센터장의 말이다. “지난해 김제농생명마이스터고가 개교했고, 호남권 종자종합처리센터를 준공하며 종자산업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확충해가고 있는 중이다. 종자산업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워 장기적 안목을 갖고 투자해야 한다. 세계는 지금 총성 없는 종자전쟁이 발발했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반드시 종자전쟁에서 승리하겠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

전 세계 종자 450만종 저장… 한국 재래종 1만3000점도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올해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Svalbard Global Seed Vault)가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2008년 2월부터 운영을 시작한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북극점에서 1000여㎞ 떨어진 북위 78도의 노르웨이령 스발바르제도 스피츠베르겐섬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100만개가 넘는 종자를 보관하고 있는 이곳은 기상이변과 이에 따른 작물 피해, 전쟁 등으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를 농작물 멸종으로부터 종을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해 세워졌다. 저장고는 향후 200년간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천재지변을 견딜 수 있게 설계됐다. 120m 길이의 터널 안에 강화콘크리트 벽체로 만들어진 3개의 내부 창고는 리히터 규모 6.2의 강진에도 버틸 수 있다. 최적의 보관을 위해 영하 18도를 유지하고 있다. 영구동토층에 위치해 냉장 설비가 고장이 나도 저온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북극의 노아의 방주’라는 별칭으로 더욱 유명하다. 한국도 재래종 1만3000여점을 이곳에 기증했다.

최대 450만점의 작물 종자를 저장할 수 있는 스발바르 저장고는 실제 노아의 방주 같은 역할을 이미 해냈다. 2015년 시리아 알레포에 있는 종자은행이 내전 중 파괴되자 이곳에 보관됐던 종자가 시리아 종자은행을 되살리는 데 활용됐다.

노르웨이 정부는 저장고 설립 10주년을 맞아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설비 재정비에 1억크로네(약 137억원)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날씨와 기후 등에 보다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설로 재정비할 예정이다. 비상 동력장치·냉장장치 등 기타 전기 장비를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콘크리트 터널과 서비스 건물도 건설될 예정이다.

한국에도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와 같은 식물 종자보관소가 존재한다. 2017년 산림청이 경북 봉화군 춘양면 산림청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200여억원을 들여 개장한 ‘시드볼트(seed vault)’다. 산비탈을 파고들어간 길이 120m의 터널 형태로 지어졌다.

종자금고 역할을 하는 이곳은 종자보관소와 연구실·실험실을 갖췄고 최대 200만점의 종자 저장이 가능하다. 주로 식량작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와 달리 시드볼트는 야생식물의 종자만 보관하고 있다. 야생식물 씨앗을 보관하는 가장 큰 목적은 식물의 다양성 확보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13년 국제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구상나무가 만약 멸종된다면 시드볼트에 저장된 씨앗을 이용해 되살리는 것이 가능하다. 현재 보관 중인 종자는 2350여종, 4만1600여점이 넘는다. 양치식물 400종, 과수나 화훼작물 177종 등이 보관돼 있다. 국내 자생식물국립수목원, 천리포수목원, 동강할미꽃보존회 등 기관이 맡겼거나 자체 수집한 씨앗도 있다.

이곳에 보관될 씨앗들은 엄격한 과정을 거친다. 먼저 씨앗을 깨끗이 씻어 최적의 발아 환경을 찾아 기록한 뒤 첨단장비를 이용해 속이 찬 우량종자를 선별한다. 그 다음 건조시킨 종자를 특수용기에 담아 장기 저장소로 옮겨 보관한다. 종자를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영하 20℃, 상대습도 40%의 항온·항습 조건을 유지하고 있다. 보관소는 외벽 콘크리트 두께만 60㎝에 달해 규모 7의 지진, 전쟁, 핵폭발 등의 재앙으로부터 종자를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 산림청은 ‘식물 주권국’을 꿈꾸며 세계 각국의 종자를 수집하는 중이다.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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