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는 책은 바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이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에 발간되어 작년 상반기까지 10만권 정도 팔리고 다소 잠잠해졌다. 그런데 올 1월 어느 걸그룹 멤버가 방송에 나와 이 소설을 읽었다고 말하자 일부 팬들이 그녀의 사진을 훼손하는 등 소란을 피웠다. 이를 계기로 이 소설이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더구나 여기에 ‘#MeToo’ 물결까지 보태지자 이 소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급기야 이 소설은 요즘 각종 베스트셀러 목록의 최상단을 점령하고 있다. 지난 3월까지 무려 70만권이나 팔렸다니 소설로서는 보기 드문 대기록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여성이 이 소설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화가 치미는 남성까지 생겨나는 것일까.

김지영씨는 서른네 살이다. 3년 전에 결혼해 작년에 딸을 낳았다. 그녀는 홍보대행사를 다니다 출산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둔 ‘경단녀(경력 단절녀)’다. 그런데 얼마 전 그녀는 남편에게 갑자기 친정어머니 흉내를 냈다. 또 작년에 죽은 대학선배 흉내도 냈다. 급기야 추석 때 시댁에 갔다가 친정어머니 흉내를 내며 시부모를 힐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남편의 주선으로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 45분씩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설은 정신과 의사가 상담 결과를 토대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해 보는 것으로 바뀐다. 김지영씨는 82년생이다.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이고 어머니는 주부다. 위로는 언니가 있고 밑으론 남동생이 있다. 그리고 오로지 손자만 두둔하는 할머니가 있다.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살림살이가 팍팍했다. 어머니는 온갖 부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용기술을 익혀 출장미용까지 다녔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 와서 돈을 벌어 오빠와 남동생 뒷바라지를 보탰다. 오빠는 의사가 되었고 남동생은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칭찬은 그들의 몫이었다. 지금 그들과 어머니는 전혀 오가지도 않는 사이다.

김지영씨는 남동생을 떠받드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학교에 들어가자 ‘남자 짝꿍의 장난’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언니는 남자애들은 다 유치하니 무시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놀자고 장난치는 걸 가지고 울고불고 한다고 야단쳤다. 선생님은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군다”라고 타일렀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중학생이 되었다. 복장규정부터 남녀차별이 있었다. 여학생은 구두만 신어야지 운동화는 신을 수도 없었다. 고등학교 때 학원 갔다가 밤늦게 오던 날, 어떤 불량배 남학생이 으슥한 버스정류장까지 쫓아왔다. 다행히 행인의 도움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났다. 이 일로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혼이 났다. “왜 늦게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

IMF 때 아버지는 명예퇴직을 했다. 찜닭집, 치킨집, 프렌차이즈 빵집을 했으나 연거푸 실패했다. 어머니는 인근에 큰 병원이 입점한다는 소식을 듣고 프렌차이즈 죽집을 시작했다. 다행히 장사가 잘되어 집안은 경제적 안정을 찾았다. 그 사이에 김지영씨는 서울 소재 대학의 인문학부에 진학했다. 그녀는 의외로 자신이 활달한 성격임을 깨닫고 산악부에 가입했다. 하지만 “여자는 있어주는 것만으로 우리(남자)에게 힘이 된다”는 덕담만 들어야 했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취직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어렵사리 면접시험을 보러 갔더니 “거래처 상사가 신체접촉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홍보대행사에 들어갔다. 열심히 일했고 능력도 인정받았지만 회사는 남자 동기생들을 중용했다. 그녀는 결국 작년에 딸을 낳으며 경단녀가 되었다.

여자 입사동기가 놀러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젊은 경비직원이 회사의 여자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해 찍은 사진들을 성인 사이트에 올렸고, 거기에 가입한 회사의 남자 과장을 통해 남자 직원들이 그 사진들을 돌려 보았다. 우연히 이를 알게 된 그 동기가 경찰에 고발하여 수사가 진행 중이다. 회사는 쑥대밭이 되었고 그 동기도 지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김지영씨는 이렇게 30여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요즘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 “김지영씨는 한 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살아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모두 김지영씨 주변의 여자였다. 아무리 봐도 장난을 치거나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감쪽같이, 완벽하게, 그 사람이 되었다.”

“김지영씨를 직접 만나 보니 산후우울증에서 육아우울증으로 이어진 매우 전형적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김지영씨가 선택해서 내 앞에 펼쳐 놓은 인생의 장면 장면들을 들여다보며 나(정신과 의사)는 내 진단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는 뜻이다.”

사실은 이 의사의 아내도 경단녀다. 그녀는 공부도 잘했고 욕심도 많은 안과의였다. 특히 학창 시절 수학을 잘했다. 그런데 아들이 학교에서 이상한 행동을 보여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로 의심되었다. 결국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 그녀는 초등학교 수학문제집을 푸는 일에 흠뻑 빠져 있다. 그녀가 푼 문제집이 수북이 쌓였다. 아들 숙제를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재밌어. 엄청 재밌어. 지금 내 뜻대로 되는 게 이거 하나밖에 없거든.”

마침 병원의 여성 상담사도 어렵사리 임신을 한 후 ‘일단’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녀는 유능한 직원이었다. “그런데 급히 그만두는 바람에 리퍼를 결정한 환자보다 상담을 종결한 환자가 더 많았다. 병원 입장에서는 고객을 잃은 것이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여기서 우리는 ‘82년생 김지영’이 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김지영씨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돌아가신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회사 동기도 마찬가지다. 의사 아내도 마찬가지다. 병원 상담사도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여자는 마찬가지다.

남자 직원들은 동료 여직원들의 벌거벗은 사진을 돌려 보며 히히덕거린다. 자신의 아내도 경단녀 후유증을 앓고 있는 의사조차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한다. 실제로 일부 극성팬들은 걸그룹의 소녀가 순종적인 성적 대상일 뿐,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주체적 존재라는 점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남자는 마찬가지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들)의 진부한 삶에 관한 처절한 고발장이다. 거기에 묘사된 성적 불평등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그리하여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다!”라고 깨닫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여성이 손상된 세상에서 남성 역시 결코 온전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이것이 바로 양성평등이 남녀 공동의 소망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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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전 한국공항공사 상임감사. 전 대통령비서실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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