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거창한 건물들은 연방정부 아니면 기념관과 미술관이다. 서울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남산타워 안 간다는 식으로, 워싱턴에 살면서도 그런 곳은 좀처럼 안 가게 된다.

몇 주 전 오랜만에 스미스소니언 미국미술관에 들렀다. 설치미술가 서도호의 전시회 ‘집 가까이서(Almost Home)’ 개막 전날 행사에서 강연이 있다고 했다. 그날 오전엔 싱크탱크에서 일하는 한국 전문가를 만나 미·북 정상회담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온갖 시나리오를 만드느라 진을 뺐고, 점심 땐 또 다른 학자를 만나 정전협정에 대해 토론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밥을 먹었다. 오후에 사무실에 앉아 북한 관련 뉴스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그런 와중에 ‘서도호’ 전시회 개막 전날 행사에 초대를 받았으니 이게 웬 호사인가 싶었다. 예전부터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연이 닿지 않아서 만나지 못했던 서도호의 강연을 그날 밤 들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가 자신의 생각을 작품으로 구현해가는 여정이 너무 아름다웠다. 건물 외벽이나 실내에 종이를 붙이고 손으로 문질러 음영을 살려내는 작업을 하다가 지문이 없어질 정도가 됐다는 얘기를 듣는데 순간적으로 뭔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워싱턴 특파원 생활은 단조롭다. ‘북한, 동맹, 외교, 안보, 통상, 트럼프’에 일이 집중돼 있어서 만나는 사람들도 그쪽에 한정돼 있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교관, 정부 관리, 싱크탱크 전문가, 교수, 로비스트, 시민단체 활동가, 언론인 정도다. 워싱턴이란 도시가 전형적인 행정수도로 시작해, 정치와 행정이 주력 산업인 도시라 그 이상을 기대한다는 것도 무리다.

백악관 근처의 한 호텔 지하에 있는 바(Bar) 이름이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이다. 술집 이름이 ‘비보도를 전제로 한다’는 뜻이라니 워싱턴답다. 정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이곳을 약속장소로 정하면 의외로 좋아한다. 건물 외벽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오프 더 레코드’란 간판을 보며 흐뭇해하기까지 한다. 여기서 만나서 한 얘기는 어쩐지 다 ‘오프 더 레코드’가 될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모양이다. 반면 나는 ‘오프 더 레코드’라는 말 때문에 상대방 마음이 느슨해져 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뭐,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만.

워싱턴에는 외국 특파원이 1000명쯤 있다. 국무부 외신기자센터에 등록한 기자 수가 이 정도니까 등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취재하는 외국 기자의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들은 미국 연방정부의 관심이, 그러니까 트럼프 행정부의 관심 또는 정책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가를 자국 입장에서 관찰한다. 백악관이나 국무부 브리핑에 가서 그날 어느 나라 기자들이 많이 와 있는지만 봐도 그 시점에 국제적 현안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워싱턴에서 누군가 만날 때는 오늘 만나서 한 얘기를 기사로 쓸지 말지부터 결정해야 한다. ‘온 더 레코드(On the record)’는 취재원이 말한 것은 모두 써도 된다는 뜻이고, ‘백그라운드(Background)’는 써도 되지만 취재원을 ‘정부 고위관리’나 ‘외교소식통’쯤으로 가리고서 쓴다. ‘딥 백그라운드(Deep Background)’는 기사 안에 취재원이 보이지 않도록 녹여넣는다. 한발 더 나가면 ‘오프 더 레코드’인데 여기서부턴 쓰지 않는다. 설사 쓰지 못하더라도 그 내용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나게 다르다. 어떤 사안의 진행 방향을 잘못 잡을 위험은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워싱턴에서 외국 기자들만 이렇게 취재하고 글을 쓰는 게 아니다. 예전만 못 하다 해도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모여드는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은 국적과 직업이 달라도 하는 일은 다 비슷하다. 정부 주요 인사나 영향력 있는 인사를 만나든지, 회의나 모임에 가서 워싱턴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은 후 뭔가를 써서 본부에 보고한다. 외교관은 전문을, 기자는 기사를, 공공기관이나 기업 주재원, 전문가들은 아마 보고서를 쓸 것이다. ‘취재해서 쓴다’는 행위까지는 다 같다. 다만 그 글의 독자가 누구인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워싱턴에선 비공개 정보 또는 정부 핵심에 얼마나 가까이 닿을 수 있느냐가 능력의 차이다. 또 다 공개된 정보에서 얼마나 큰 흐름을 잘 읽어내느냐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철강 관련 정책을 발표하는 브리핑이 열렸다고 하자. 현장엔 기자나 외교관, 관련 기업 주재원들만 있는 게 아니라 해당 산업의 흐름을 분석해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매우 전문적인 보고서를 쓰는 분석가들도 있고 블로거도 있다. 이들은 저마다 그날의 정보를 제각각의 필요에 따라 가공해서 본국으로 보내는 것이다.

‘노트를 비교해 본다’는 표현

워싱턴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노트를 비교해 본다’는 표현이 있다. 최근 일어나는 주요 사건에 대해 파악한 것을 서로 비교할 때 쓰는 말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 행정부 인사들이 일제히 대북 군사옵션을 하루가 멀다 하고 언급했다. 이게 압박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정부 안팎에서 들은 정보들을 종합·분석하고 과거 사례를 참고해서 서로 비교해 보며 ‘진의’에 대한 전망을 해보곤 했다.

미국 정부가 어디로 가느냐 하는 큰 흐름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흐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버튼’을 찾아내는 것이다. 워싱턴 사람들이 미국 정부가 추구하는 정책의 흐름을 좇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흐름을 자국 이익에 맞게 돌리거나 최소한 미리 알아서 대비라도 하기 위해서이다. 미국도 똑같은 이유로 워싱턴에 있는 외국인들과 인맥을 구축하고 정보를 얻는다. 하지만 서로 그런 입장이란 걸 알기 때문에 다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이 과정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로비스트와 홍보 전문가들이다. 워싱턴에 살다 보면 싱크탱크와 로비회사에서 “현직 의원과 전직 장관, 싱크탱크 전문가들을 모시고 이 문제에 대해 소상히 알아보겠다”며 토론회에 참석하라는 이메일 초대장이 수도 없이 날아든다. 한번은 어떤 로비회사가 주요 고객들에게나 보냈을 법한 정책설명회 초대장이 실수로 나에게 전달됐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얼른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이런 이메일이 왔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건 저희 고객용이니 제발 오지 마시고요. 대신 저희가 따로 브리핑을 해드리겠습니다.” 이 일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친구 한 명을 더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워싱턴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