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0일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시위대들이 이스라엘 군대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4월 20일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시위대들이 이스라엘 군대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뉴시스

‘트럼프 고마워요.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신이 당신을 축복하시길….’

예루살렘은 요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도시 같다. 어디를 가나 그를 지지하는 문구의 현수막이나 그가 활짝 웃는 얼굴 그림이 걸려 있다. ‘트럼프 얼굴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종종 눈에 띈다. 그에 대해 호감을 갖거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서다. 왜 그럴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6일 아랍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공식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숙원’을 들어준 것이다. 역대 미 대통령 누구도 하지 않았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서로 자기네 수도라고 싸우는 분쟁지다. 국제법은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는 ‘주인 없는 도시’로 정해놓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등 세계 언론은 기사를 쓸 때 중립을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도’ 또는 ‘팔레스타인의 수도’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모든 걸 거스르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미 정부는 후속 조치로 이스라엘 지중해 연안 경제도시 텔아비브에 있는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할 준비를 하고 있다. 현재 예루살렘 올드시티 인근 아르노나 지역의 미 영사관을 재단장해 대사관 건물로 쓸 예정이다.

그런데 대사관 이전 및 개관식의 날짜가 지난 4월 22일 공개되면서 예루살렘 수도 선언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타오르고 있다. 개관식을 다른 날도 아닌 이스라엘 건국기념일인 오는 5월 14일에 맞춰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과 주변 아랍국은 이스라엘 건국일을 아랍어로 ‘알나크바(대재앙)’라고 부른다. 자기네 땅을 이스라엘에 빼앗기고 ‘2등 시민’ 또는 ‘떠돌이 난민’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라고 인정해준 것도 화가 나는데 이제는 대사관 개관식마저 ‘알나크바’ 날에 맞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사관 개관식에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기로 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강한 애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스라엘 일간 하 아레츠는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대통령의 딸과 사위인 이방카와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을 비롯해 미 정·관계 인사 등 250여명이 대사관 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했다. 참석하는 상·하원 의원만 40명에 달한다고 한다.

트럼프의 계산

이스라엘 총리실과 외교부는 예루살렘 미국대사관 개관식을 계기로 다른 나라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도 설득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지난 4월 19일 각국 외교관들을 초청한 리셉션에서 최소 6개국이 미국의 뒤를 따라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또 ‘감사 선물’로 4년 뒤 신설될 예루살렘 내 한 고속열차역의 이름을 ‘트럼프역’이라 정하고, 예루살렘 올드시티 인근의 한 유명 거리 이름도 ‘트럼프거리’로 바꿀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모든 일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예고하고 있고 일부 강경파는 무력 대응을 할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예루살렘에 전운(戰雲)이 감돌면서 ‘3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 봉기)가 벌어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지옥의 문이 열렸다”는 분노의 외침도 터져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랍국가와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이스라엘 편을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의 ‘ABO(Anything But Obama·오바마만 아니면 된다)정책’이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초 취임 직후부터 전임 대통령 오바마의 레거시(업적) 지우기에 착수했다.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혁안) 등 국내 정책은 물론 오바마 임기 8년간 추진된 외교·안보 정책 전반을 뒤집어엎기로 한 것이다.

오바마는 재임 중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인 이스라엘과는 거리를 두고 대신 1979년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30여년간 앙숙으로 지낸 반미국가 이란과의 관계 개선을 밀어붙였다. 여세를 몰아 오바마는 2015년 국제사회의 오랜 난제였던 이란 핵협상도 타결했다. 이란의 핵 개발을 동결(凍結)시키고 그 대가로 일부 경제제재를 풀어주기로 한 것이다. 이에 이란을 최대 안보 위협으로 여기는 이스라엘은 미국과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이스라엘은 “이란이 약속된 핵 동결 기간이 지나면 다시 핵 개발을 하며 핵폭탄도 제조할 수 있다”며 강도 높게 오바마의 친이란 정책을 반대했다.

이를 잘 아는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오바마의 외교 정책은 ‘실패했다’며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친(親)이스라엘·반(反)이란 정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정책의 대표 ‘상품’이 바로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수도 인정이다. 단박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최상으로 격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970년대 경기침체로 사업하기 어려운 뉴욕에서 파산 직전의 호텔을 매입해 회생시키는 등 비즈니스맨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 그런 그가 단지 오바마와 성향·이념 차이만 가지고 ABO정책을 추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주판알을 어떻게 튕겨봤기에 국제사회의 거센 반발을 감수하고서라도 ‘예루살렘 수도 선언’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걸까.

전문가들은 미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 복음주의 기독교계, 그리고 유대인 공동체의 지지를 얻기 위한 ‘투자’ 차원에서 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미 전체인구의 약 28%(연방통계청 자료)에 달하는 데다 교회와 각종 단체를 기반으로 촘촘히 조직화돼 정치·사회적으로 목소리가 크다.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몰려 사는 미주리·노스캐롤라이나 등 동남·중남부는 ‘바이블벨트(성경지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러시아 스캔들’ ‘부적절한 여자 관계’ 등 각종 의혹에 곤욕을 치르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복음주의 기독교계의 ‘기도제목’을 들어줬다는 것이다. 또 복음주의 기독교계는 자신이 속한 공화당의 주축이다. 그에게 교계는 잘 지내야 하는 최대의 ‘사업 파트너’인 것이다.

예루살렘 올드시티에 있는 미국 영사관이 대사관으로 쓰기 위해 재단장 중이다. 예루살렘 미대사관은 5월 14일 개관식이 열린다. ⓒphoto 뉴시스
예루살렘 올드시티에 있는 미국 영사관이 대사관으로 쓰기 위해 재단장 중이다. 예루살렘 미대사관은 5월 14일 개관식이 열린다. ⓒphoto 뉴시스

복음주의 기독교계의 ‘이스라엘 사랑’

그런데 복음주의 기독교계는 이스라엘을 왜 좋아하는 걸까. 친이스라엘 정책이 이들의 표를 얻는 데 왜 도움이 되는 걸까.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수도 인정이 미국 내 유대인 유권자의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건 쉽게 이해가 간다. 이스라엘은 1948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의기투합해 세운 나라인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으로부터 수도를 인정받는다는 건 이·팔 분쟁이란 외교 전쟁에서 매우 유리한 고지(高地)를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기독교는 유대교와 사이가 좋은 종교라 하기 어렵다. 기독교는 예수를 신의 아들이자 메시아(구세주)로 믿지만, 유대교는 예수가 그저 숱한 유대인 중의 하나일 뿐이라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전면 부정한다.

복음주의 기독교의 ‘이스라엘 사랑’은 이들이 이스라엘을 종교적 운명공동체로 여기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기독교인 상당수는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신앙관을 갖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신의 뜻에 따라 창조부터 종말까지 총 7단계(세대)로 나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마지막 단계가 이뤄지려면 이스라엘이 온전한 나라로 회복돼야 한다고 본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이·팔 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길 ‘기도’하고 이를 위해 힘쓰는 트럼프 대통령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데도 복음주의자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큰 몫을 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고 이란과 관계 개선에 나서려는 오바마 정부의 외교 정책에 불만이 컸기 때문에 이를 뒤집고 이스라엘과 관계 회복을 할 대통령을 원했던 것이다. 이들 중에는 “오바마가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이는 위장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골수 무슬림’”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때 정치계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인 마이크 펜스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삼은 것도 경쟁 상대인 민주당과 차별화를 확실히 하며 기독교계의 표를 확보할 의도로 풀이됐다. 펜스는 부통령이 돼서도 교계 표심 관리에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하스바라’의 승리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정부는 일찌감치 미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힘을 간파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유대인 로비’ ‘이스라엘 로비’라는 말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들의 로비력이 강력할 수 있는 것은 복음주의 기독교계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 건국운동을 할 때도 영미권 유명 목사들과 연계해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기도 했다. 건국운동의 선구자인 유대인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부터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 주재 영국대사관의 성공회 사제였던 윌리엄 헤클러와 매우 친밀하게 지내며 건국운동 관련 도움을 받았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을 비롯해 역대 총리 모두 미 교계와 강한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 물밑 작업을 했는데, 이를 대대적으로 확대한 건 6대 총리인 메네헴 베긴 때부터다. 베긴은 1977년 취임하면서 국가 안보를 위해선 미국과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보고 미 교계 단체를 상대로 ‘하스바라’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하스바라’는 히브리어로 ‘설명하기’라고 직역되는데, 좋게 의역하면 ‘공공외교’, 나쁘게 말하면 ‘선전술(宣傳術)’이라 할 수 있다. 미 정책결정자 그룹뿐 아니라 미 사회 전반에 이스라엘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려는 의도였다. 지금도 이스라엘대사들은 근무지에 부임하면 그 나라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대학·단체를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데 이 또한 ‘하스바라’ 활동의 하나다.

이스라엘 정부, 그리고 미 유대인들의 ‘하스바라’가 없었다면 미국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수도 인정 선언을 끌어내는 ‘외교 대첩’도 없었을 것이다. 미 대통령이 “독도는 대한민국 땅!”이라고 공개 선언하고 독도에 핵심 참모진과 자신의 딸과 사위를 보낸다고 상상해보면 이들의 성취가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예루살렘 문제로 중동 정세 악화 등 후폭풍이 우려되긴 하지만 이스라엘이 국가 주권과 직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장기간 여러 방법을 모색하며 노력하는 태도는 눈여겨볼 만하다.

노석조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전 예루살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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