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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
[2510호] 201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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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 도시락 절반은 친구들 입으로

내 친구 구본무를 추억한다

정순태  언론인·전 월간중앙 주간 

▲ 생전에 ‘마곡 사이언스파크’를 둘러보고 있는 구본무 회장. photo 뉴시스
구본무(具本茂) LG그룹 회장의 별세 후 국내의 거의 모든 언론은 일제히 “정도(正道) 경영의 어른이 떠나다”라는 등 고인(故人)의 업적을 기렸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을 닫고 난 후에 판가름 난다고들 하는데, 고인이 된 직후 구본무 회장만큼 평가를 받은 국내 기업인은 매우 드물었다.
   
   그 평가의 내용은 “구본무 회장은 럭키금성을 글로벌 LG로 키우는 과정에서 냉철한 승부사의 기질을 보였지만, 평소에는 온화한 리더십을 발휘한 기업인” “고인은 물론 LG그룹도 불미스러운 구설에 오른 적이 거의 없었던 것도 고인이 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기업 경영에서 정도를 실천한 결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사회적 책임)를 실천해온 대기업 오너” 등등이었다.
   
   구본무 회장과 필자는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 동기동창으로 4·5·6학년 때 같은 반의 옆자리에서 공부했지만, 별로 접촉이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1957년) 후에는 그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만큼 기업가 구본무 회장을 깊숙이 평가할 만한 입장이 아니다. 다만 어릴 적에 목격했던 몇 가지 일화를 통해 구본무라는 인물, 그리고 한국 재벌의 원초적(原初的) 모습을 더듬어보려고 한다.
   
   
   ‘동동구리무’를 제조·판매하던 시절
   
   당시의 부산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대충 그렸듯이 한국 재벌의 요람인 국제시장의 시대였다. 6·25전쟁 발발 직후 LG그룹의 창업자 구인회(具仁會·故人) 회장의 최초 사업은 ‘동동구리무’의 제조였다. ‘구리무’는 로션을 의미하는 크림의 일본식 발음이다. ‘구리무’ 앞에 ‘동동’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국제시장 등지에서 북을 둥둥 치면서 ‘구리무’를 팔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인다.
   
   화학실험실을 차려 ‘동동구리무’를 처음 제조한 실무자는 구인회 회장의 셋째 동생으로서, 그 후 6선 국회의원과 제9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다음에 재계로 되돌아간 구태회(2016년 별세) LS전선 명예회장이었다.
   
   필자가 창업기 LG그룹의 비화를 우연히 알게 된 시기는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지금의 익산역) 폭발사고 직후였다. 이 폭발사고는 한국화약그룹이 제조한 다이너마이트 등 폭발물 30여t을 싣고 가던 열차에 승차한 경비원이 이리역 정차 중에 소주를 마시고 깜박 졸던 사이에 촛불이 다이너마이트에 옮겨 붙는 바람에 발생했다.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이 발생한 대형 참사였는데 다이너마이트가 터진 이리역 구내에는 깊이 15m, 직경 30m의 큰 웅덩이가 파이고 열차 30여량이 파손되었으며, 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렸다. 역전 주변 동네의 가옥 피해 동수는 전파 811동, 반파 780동 등이었다. 이재민 수는 1674가구 7873명에 달했다.
   
   국회 의장단의 이리 이재민 위로 방문 때 필자는 국회 출입기자단의 풀 기자로 수행하면서 우연히 구태회 부의장의 승용차에 편승하게 되었는데, 이동 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창업기 LG그룹의 일화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6·25전쟁 발발(1950년) 직후, 화학 전공도 아닌 내가(구태회 부의장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실험실을 차려놓고 ‘동동구리무’를 제조해 국제시장에 내다팔았는데, 처음 그걸 바른 사람들의 얼굴에 부스럼이 돋아났다는 항의를 받고 엄청 놀랐지요. 즉각 판매를 중단하고 사태를 수습한 후에 밤샘을 해가며 원료 배합을 다시 해 ‘구리무’를 새로 제조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물자가 부족했던 시대여서 만들어놓기만 하면 무섭게 팔려나갔어요. 내가 자전거를 몰고 국제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수금한 돈이 미리 싣고 간 가마니 하나에 가득 찼습니다.”
   
   “아이쿠, 가마니에서 들었던 돈 냄새가 지독했겠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가마니에서 꺼낸 더러운 돈을 물걸레로 살짝 닦은 다음에 밤늦게까지 다림질을 했습니다. 큰형님(구인회 창업회장)의 지론은 ‘돈이란 대접하지 않으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러움의 대상 잼 바른 토스트
   
   초등학교 시절의 구본무 소년은 매우 소박한 모습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매일 점심 도시락에 밥 대신 토스트를 담아 등교했다. 국제시장의 깡통골목 상인 등과도 거래하는 집안이라 미제 딸기잼과 포도잼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랬겠지만, 그런 잼을 바른 토스트는 다른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 주위에 아이들이 모여들어 그에게 “하나 도(줘)!” “나도!”라고 하면 구본무 소년은 으레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 졸업 때까지 늘 도시락을 절반만 먹었던 셈이다. 그때 나는 성깔 한 번 부리지 않았던 그의 참을성을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그런 그가 다른 아이들과 언쟁을 하거나 주먹질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당시 동무들 사이에서 구본무 소년은 ‘부잣집 아이’의 티를 내지 않았고 가정교사를 모셔놓고 과외공부 같은 것을 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구본무의 집에 딱 한 번 놀러간 적이 있다. 동대신동 3가 동신초등학교 북쪽 담벼락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집이었다. 대문이 있는 집이 아니고 슬라이딩 문을 그냥 옆으로 밀고 들어가는 가옥이었다.
   
   너른 다다미(일본식 방에 까는 두꺼운 깔개)방에서는 여공 10여명이 빙 둘러앉아 플라스틱 제품을 투명한 비닐포장지로 싸는 출하 직전의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날, 그의 부친인 구자경 회장을 집 앞에서 마주쳐 인사를 드렸다. 구자경 회장은 그때 군복 바지에 군화 차림으로 소형 트럭에 물건을 싣는 일을 거들고 계셨다. 진주사범학교 출신인 구자경 회장은 가업에 투신하기 전에는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했다고 한다.
   
   6·25전쟁 이후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는 당시 우리나라 부자들의 자제가 다니는 학교로 소문났었다. 예컨대 구인회 회장의 손자·손녀 5〜6명, 이건희(삼성그룹 회장)·이명희(신세계 회장) 등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의 자녀들, 효성그룹의 자제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한 학년의 학급 수는 2~3개였으며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들어가는 학교였다.(지금은 화랑초등학교로 바뀌었음)
   
   당시 동대신동 1가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에서 부평동 국제시장으로 가려면 검정다리를 건너 보수동 길을 거쳐 가야 했다. 보수동 길에는 도포 차림에 높은 갓을 쓴 ‘촤라 할배’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했다. 도포 차림에 높은 갓을 쓴 ‘촤라 할배’는 자신의 눈으로 차림새가 좀 야한 여성을 보기만 하면 그녀의 코 끝에 자신의 지팡이를 들이대면서 “몽당치마 치아라!” “꼬시랑머리 치아라!”라고 고함쳤다. ‘몽당치마’란 발목 이상이 드러나는 치마, ‘꼬시랑머리’는 파마머리를 말한다. 미니스커트나 배꼽티가 예사인 오늘날에 ‘촤라 할배’가 살았다면 필시 기절초풍을 했을 터이다.
   
   당시 우리 반 아이들 사이에 자주 오른 화제는 ‘촤라 할배의 활약상’이었다. ‘촤라 할배’의 뒤에는 항상 우리 또래들이 구경 삼아 졸졸 따라다녔다. 우리 반 아이들도 자주 ‘촤라 할배’의 얘기로 꽃을 피웠지만 구본무 소년만은 그냥 빙긋 웃기만 하고 숫제 말이 없었다. 당시 필자의 어머니(현재 95세)도 ‘촤라 할배’와의 조우가 겁나 국제시장에 갈 때 보수동 검정다리를 건너 지름길로 바로 가지 못하고 동대신동 1가에서 경남도청(현재의 동아대학교 부민동 캠퍼스) 을 지나 토성동 경남중학교 앞으로 빙 우회해 다니셨다.
   
   ‘촤라 할배’가 활약하던 시대의 부산은 6·25 발발 이후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후방 병참기지로서 국내에서 경기가 가장 흥청거린 곳이어서 자칫하면 미풍양속이 깨질 우려가 있던 시기였다. 그런 시절에 ‘촤라 할배’는 부산의 ‘규율부장’ 역할을 했던 셈이다.
   
   그때 우리 학교는 미군의 야전병원으로 징발되어 있었고, 우리들은 학교 인근 판잣집 가교사에서 공부했다. 4학년 2학기(1954년 9월) 때 미군의 야전병원이 철수한 후에야 우리들은 가교사 시대를 청산하고 본교사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본교사로 이전한 직후 우리들은 구구단을 외워야 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담임교사가 교실 문 앞 복도에 줄을 서 대기하는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칠칠(7×7)이?” 혹은 “팔팔(8×8)이?”라고 물으면 “49” 혹은 “64” 등으로 대답해야 교실에 입장시켰다. 그때 필자나 구본무는 몇 번 실패한 후에야 구구단 테스트를 겨우 통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동구리무와 플라스틱 제품에 이은 LG의 주력 제품은 럭키치약이었다. 럭키치약이 출시되기 전, 우리 집과 같은 보통 가정에서는 소금을 치약 대용으로 사용했다. 부잣집에서는 국제시장에서 매입한 ‘콜게이트’ 등 미제 치약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 시절에 출시된 럭키치약은 대번에 시장을 장악했다. 처음엔 일본에서 치약 원료를 가져와 간단한 공정만 거친 후 ‘럭키치약’으로 출시했다고 한다.
   
▲ 1958년 구인회 회장이 창립한 금성사(LG전자의 전신) 사옥. photo 뉴시스

   골드스타 트랜지스터 일화
   
   구인회 회장은 1958년 금성사를 설립하고 1960년대 들어 국산 라디오 ‘A-501’을 히트시키면서 국내 가전시장을 독점했다. 금성사의 라디오가 나오기 전까지 국내에서는 미제 라디오 ‘제니스’나 일제 소니 트랜지스터가 판을 치고 있었다.
   
   금성사가 제조한 ‘골드스타’ 트랜지스터는 그 후 10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첨단제품이 되었다. 다음 일화는 그런 시절에 최전방 DMZ(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일화 중 하나다.
   
   1968년 1·21사태 전까지만 해도 소대병력을 인솔하고 DMZ를 순찰하던 국군 소대장들은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북한군 순찰 소대장과 조우해도 서로 총질을 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피아의 소대원 간에 씨름 시합을 붙이기도 했다. 그런 접촉을 한 데 이어 국군 소대장은 미리 준비해 간 금성사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북한군 소대장에게 자랑스레 선물하기도 했다. 북한군 소대장의 반응은 “이거, 미 제국주의의 물건 아니오?”라면서도 슬그머니 챙겨갔다고 한다. 위의 일화는 필자 등 ROTC(학군단) 6기 출신 소위들에게 철책선(GOP) 부대의 소대장직을 인계하고 예편한 ROTC 4기생들의 경험담이다.
   
   전자사업에서 LG와 삼성의 라이벌 관계는 1968년 이후에 시작되어 그 후 50년간 지속되어왔다. 원래 삼성과 럭키금성은 사돈 간이었다. 1957년 이병철 회장의 차녀(이숙희)와 구인회 회장의 3남(구자학 아워홈 회장)이 결혼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삼성그룹은 주로 비료, 조미료, 설탕, 모직 등의 사업에 진출해 있었고 럭키금성그룹은 화학, 전자 등의 사업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런 판에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전자산업에 진출하겠다고 하자 럭키금성의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은 사돈이 하는 분야에 끼어든다면서 매우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그 후 LG그룹과 삼성그룹은 전자를 중심으로 통신, 화학, 금융 등 주요 사업마다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라이벌 구도를 이어왔다. 다음은 그때의 일화 한 토막이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자의 설립 구상 단계이던 1968년 봄 안양골프장(현재의 안양베네스트GC)에서 구인회 회장을 만났다.
   
   “구 회장, 삼성도 앞으로 전자사업을 할라카네.”
   
   이병철 회장은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구인회 회장으로서는 화가 날 만했다. 그래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이익이 남으니까 할라카는 거 아이가? 사돈이 논을 사믄 배 아프다 카더마는…. 옛말에 그른 기 하나도 없는 기라!”
   
   구 회장은 이렇게 내뱉고 작별인사도 없이 벌떡 일어섰고, 이 회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구 회장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서먹서먹하게 등을 진 두 사람은 이후 동양방송(지금의 KBS 2)의 동업자 관계까지 끊고 말았다.
   
   “그쪽에서 꼭 그리하겠다면 서운한 일이지만, 우짜겠노? 서로 자식을 주고 있는 처지인데 우짜노 말이다. 한 가지 섭섭한 점이 있다면 금성사가 지금 사업을 막 확대해 자금사정이 어려운 때란 말이야. 이런 점을 노려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자고 덤비는 거라. 나도 설탕 사업 할라카면 못 할 끼 뭐 있것노. 그래도 나는 사돈이 하는 사업에는 손대지 않을 끼다.”
   
▲ LG 창업자인 구인회 회장(가운데)이 1961년 국내 최초 국산화 자동전화기(모델명GS-1)로 시험 통화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구인회와 이병철의 결별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과 LG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다. 이 회장의 고향인 의령군 정곡면(正谷面)과 구 회장의 고향인 진주시의 지수면(智水面)은 같은 남강(南江) 생활권이었다. 두 사람은 동양방송을 공동 설립하고 사돈까지 맺으며 인생의 오랜 기간을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하지만 1968년 삼성이 일본 산요와 합작을 통해 삼성전자 설립을 준비하면서 서로 등을 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LG는 “삼성이 일본 업체를 끌어들여 국내에 막 움트기 시작한 전자산업의 싹을 제거하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정부는 “생산물량 전부를 해외에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을 허가했다.
   
   그런 지 1년 후인 1969년 12월 31일 구인회 회장은 별세하고 그의 장남 구자경 회장이 LG그룹의 총수가 되었다. LG는 이때부터 삼성의 신기술 제품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서로 물고 물리는 혈투를 벌인다.
   
   구인회 창업자의 장손인 구본무는 연세대 재학 중 군에 입대해 만기 제대하는 등 사회적 룰을 제대로 지킨 재벌 3세이다. 평소 “편법? 차라리 1등을 안 하고 말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대학에 유학해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다음 해인 1975년 럭키(현재의 LG화학)에 입사했고, 입사 10년째인 1984년 금성사(현 LG전자)의 상무가 되었다. 그 무렵 필자는 우연히 초등학교 동기동창 D를 만나 구본무 상무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당시 D는 화주(貨主)와 선주(船主)를 연결해주는 해운주선업체의 경영자였다. 그로서는 대 화주인 LG그룹의 실력자와 통하기만 하면 선박 적하 물량을 손쉽게 확보 가능할 것이라고 잔뜩 기대했던 듯했다. D는 여러 절차를 거친 다음에야 구본무 상무와 전화통화가 가능했다. 다음 그 통화 내용이다.
   
   “구본무 상무님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본무가? 나 D다.”
   
   “D가 누고?”
   
   초등학교 시절의 D는 우리 반 반장이었고 공부도 제일 잘했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다. 그날 밤 목로주점에서 만난 D는 뭔지 서글픈 듯한 말을 자꾸 했다. 따지고 보면 D가 서글퍼할 까닭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필자는 D의 술잔에 소주를 자주 채워주며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젊음도 가면 세월은 흐르고 나는 취했다〜”는 누구의 시까지 들먹이며 D를 위로했다.
   
   
   초등학교 3년 선배 이건희와의 경쟁
   
   구본무 상무는 1989년 럭키금성그룹 부회장에 올랐고, 1995년에는 신병으로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구자경 회장의 뒤를 이어 LG그룹 총수가 되었다. 그의 경쟁 상대는 초등학교 3년 선배인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었다.
   
   흑백 TV에서 시작된 LG와 삼성 간의 ‘전쟁’은 컬러 TV, LCD TV, PDP TV 등을 거치며 전자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분야로 확대되었다. 1992년 삼성전자가 위성 수신 컬러 TV를 선보이자, 며칠 지나지 않아 LG도 똑같은 기능의 제품을 내놓았고, 1993년 삼성이 원적외선 바이오 TV를 출시하자 한 달 뒤 LG는 원적외선에 음이온까지 발생시키는 TV로 맞대응을 했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대형 TV 수요가 생겨나던 1995년 삼성이 ‘명품’이란 이름의 브랜드를 내놓자 LG는 ‘아트비전’으로 응수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새로운 라이벌전이 시작되어 삼성 디스플레이와 LG 디스플레이 모두 글로벌 1위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분야도 두 업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다. 이렇듯 두 기업은 많은 분야에서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지만, 매출규모는 삼성이 LG를 몇 배 이상 앞선다. 2003년 GS, LS, LIG그룹과 분리되고, 외환위기 이후 LG가 반도체 및 금융 사업 분야를 포기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삼성전자가 1983년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D램을 개발해 반도체 신화를 써 나가자 LG도 곧이어 반도체사업에 뛰어들며 삼성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LG의 반도체사업은 초기 시설투자 등에 의한 적자 누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LG의 반도체사업이 ‘빅딜’을 통해 현대로 넘어갔고, 또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제는 SK그룹에 넘어갔다. 이제 반도체는 SK의 주력 사업이 되었다.
   
   현재 한국 제조업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사업이 리드하고 있다. 올 1분기의 경우 두 회사(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이 전체 상장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50%에 육박할 정도다. LG로서는 가슴 아픈 대목이지만, 과거의 실패에 연연할 겨를이 없다.
   
   지금 한국은 머지않아 닥쳐올 미래산업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 등 경쟁국에 밀리고 있다. 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 미국의 실리콘밸리 기업은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가상서버), 자동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시장을 이미 선점했다.
   
   구본무 회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4조원을 투입해 별세 1개월 전에 국내 최대 규모의 융복합 연구단지를 출범시켰다. LG가 지난 4월 20일 구본무 회장의 마지막 작품인 ‘마곡 사이언스파크’를 가동시켰던 것이다. 서울시 강서구 마곡동에 소재한 이 융복합 단지(면적 17만㎡)에는 20개 연구동에 2만2000명의 R&D 인력이 투입되었다.
   
   이날 출범식 환영사에서 와병 중의 구본무 회장을 대리한 구본준 부회장은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자산은 사람과 기술이며,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기업이 영속하는 근본적인 해법도 인재를 키우고 R&D에 투자하는 것”이라 거듭 강조하고 “마곡 사이언스파크는 이러한 LG의 믿음을 실현하기 위한 공간”이라고 선언했다. 직원들을 존중하는 인간경영은 구본무 회장의 신념 중 첫손가락에 꼽혔던 것이다.
   
   한국은 목표 달성을 향한 집중력과 위험을 무릅쓴 도전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에서도 이런 집중력과 도전에 더하여 구본무 회장이 선도했던 인간과 사회적 룰 중시의 기업경영이 배합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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