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미디어를 통해 손자들과 그림편지로 소통하는 이찬재·안경자씨 부부.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소셜미디어를 통해 손자들과 그림편지로 소통하는 이찬재·안경자씨 부부.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1963년이었나 보다. 학교 문학 동아리에서 시화전을 연다고 연락이 왔어. 나보고 그림을 맡아달라는 거야. 모임에 갔지. 한 여학생이 자기 시를 내게 주며 그려달라고 하더라. 제목은 ‘사과’. 짧은 시였어. 그 여학생이 맘에 들었는지 시 ‘사과’가 맘에 들었는지 그건 모르겠어. 난 그림을 그렸고 그 여학생은 만족한 표정이었어. 전시회가 끝나는 날 모두 강냉이로 파티를 했어. 그 여학생이 누구게? 얘들아, 그렇게 역사가 시작됐단다.”

그 역사는 55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주인공은 이찬재(76)·안경자(76)씨 부부. ‘나’는 이찬재, ‘그 여학생’은 안경자씨다. 이찬재씨는 손자를 위한 그림편지를 인스타그램에 매일 올려 글로벌 스타가 된 브라질 동포 ‘찬 할아버지’다. 앞에 소개한 글도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다. 상파울루에 살면서 미국 뉴욕과 한국에 사는 손자들을 그리워하며 그림을 그린 사연이 한국은 물론이고 영국 BBC, 가디언지, 미국 NBC 등에 소개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현재 ‘찬 할아버지’의 그림편지를 기다리는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35만명에 달한다. 그림편지의 시작은 2015년 4월 2일. 3년여 만에 인스타그램의 ‘drawings_for_my_grandchildren’ 계정에는 740개의 그림편지가 올라와 있다. 주로 할아버지의 눈으로 본 손자들의 모습이다. 그림과 글에는 손자들에 대한 사랑이 넘친다. 찬 할아버지의 그림을 더 살려주는 것은 그림에 붙은 맛깔난 글이다. 이 글은 안경자씨 담당이다. 55년 역사의 ‘환상 궁합’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찬 할아버지’의 그림을 소셜미디어에서가 아니라 직접 볼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브라질대사관 내 브라질홀에서 전시회(6월 1일~7월 29일)가 열리고 있다. 부부는 지난해 10월 브라질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민을 떠난 지 36년 만이다. 전시에는 한국에 와서 그린 미공개 원화도 걸려 있다.

그림으로 ‘찬 할아버지’가 유명해졌지만 브라질 한인 사회에서는 안경자씨가 더 유명인사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한 일이 많다. 그 공로로 지난해 10월 5일 세계한인의 날을 맞아 한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한국에서 인생 3막을 시작하는 부부를 지난 6월 4일 만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은 브라질을 너무 모르고, 브라질도 한국을 너무 몰라요.”

부부는 인생의 절반씩을 한국과 브라질에 살았으니 양국이 서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부부는 서울대 사범대 캠퍼스커플이었다. 이씨는 지구과학과, 안씨는 국어교육과였다. 부부교사를 하다 느닷없이 브라질 이민을 떠나게 된 것은 1981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다음해였다. 브라질로 5년 먼저 이민을 간 안씨의 친정부모가 부부를 상파울루로 불러들였다. 브라질 TV를 통해 광주 뉴스를 접한 친정부모는 한국에 전쟁이 일어난 줄 알고 놀라 딸 내외를 데리러 나왔다. 안정된 교직을 내던지고 낯선 나라로 가기는 쉽지 않았을 터인데 이씨는 두말없이 따라 나섰다.

“40년을 한곳에서 살았는데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자 했지 뭐.”

남매를 데리고 부부는 브라질에 가서 옷 주문을 받아 공장에서 받아 나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브라질 한인 사회는 대부분 의류업에 종사했다. 주문·배달부터 시작해 가게 개업을 거쳐 제조업까지가 한인들의 성공 공식이었다. 솜씨 좋고 부지런한 한인들은 금방 자리를 잡았다. 안씨의 친정부모는 딸 내외가 학생들만 가르치다 몸 쓰는 일을 제대로 하겠나 싶었지만 이씨는 “아주 신났다”고 말했다. 이씨의 그림이 밝고 따뜻한 이유가 있었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편견 없고 자유로운 성격이 그림에 그대로 묻어나는 것이다.

부부는 한국의 동대문시장 같은 봉헤치로 지역에서 순조롭게 한인들의 성공 단계를 밟았다. 한인 커뮤니티는 끈끈했다. 브라질까지 수출된 ‘계모임’은 한인들이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부분 계를 통해 목돈을 만들어 가게를 차리고, 다음 단계인 제조업으로 사업을 불려갔다.

이찬재씨가 손자들을 그리며 그린 그림.
이찬재씨가 손자들을 그리며 그린 그림.

이씨가 사업을 이끄는 동안 안씨는 한인 사회에서 맹활약을 했다. 한글학교에서 국어 교사 출신인 안씨에게 먼저 도움을 청했다. 처음엔 평교사로 들어가 교장까지 10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글학교뿐만 아니라 브라질의 사립학교와 외국인 학교에서도 한글을 가르쳤다. 안씨는 현지 한인들의 대표 문예지인 ‘열대문화’의 주축이 돼 대표까지 맡았다. 한인회보도 몇 년 동안 맡았다. 틈틈이 동포사회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고 쓴 글들을 발표했다. 한 주간지에 실은 이민 적응기 ‘미루 엄마’는 인기가 많았다. 미루는 딸의 이름이다. 격의 없이 자유롭게 키운 아이들은 잘 자랐다. 이씨가 ‘찬 할아버지’로 유명해진 것은 아들 지별씨의 힘이 컸다. 뉴욕 파슨스스쿨을 나온 지별씨는 구글을 거쳐 페이스북에 근무하고 있다. 이씨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지별씨의 권유 때문이었다.

아들은 미국 뉴욕에 자리를 잡고, 곁에 살던 딸 내외마저 3년 전 한국으로 떠난 후 이씨는 갑자기 무기력해졌다. 사업 은퇴 후 손자들 등하교시켜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지별씨는 두 손 놓고 있는 아버지를 설득해 그림을 그려 인스타그램에 올리도록 했다. 그는 손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에 인스타그램 배우기에 도전했다.

“말도 못해. 돌아서면 잊어먹고 또 잊어먹고.”

그렇게 배워 올린 그림들이 오늘로 이어졌다. 고교 때 미술부에 적을 뒀지만 그림을 딱히 배운 적은 없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작품이 나오기까지 버린 그림들이 수없이 많았다. 알뚤, 알란, 아로(아스트로) 세 손자의 이름 첫 글자인 AAA를 그림 사인으로 만들었다. 그림을 그리면 안씨가 글을 쓰고, 아들 지별씨는 영어로, 딸 미루씨는 포르투갈어로 번역해 함께 올렸다. 한국, 브라질, 미국에서 힘을 모은 글로벌 프로젝트였다. 3년간의 그림들을 보면 세 손자의 성장 과정과 손자들과 함께 한 추억이 담겨 있다. 지별씨가 그 과정을 담아 만든 동영상은 전 세계에서 630만명이 지켜봤다.

“아이들이 성장해가면서 우리도 함께 크는 것 같아요. 동물의 세계를 알게 되고 환경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고 의식의 세계가 넓어지는 거죠. 손자들이 우리를 성장시켰어요.”

부부가 입을 모아 말했다. 그에게는 이제 수십만 명의 손자가 생겼다. ‘조단조단’ 옛날 이야기 들려주듯 가족의 사랑을 전하는 부부의 그림편지 밑에는 “내 할아버지가 돼주세요” “아버지가 생각난다”는 글들이 줄을 잇는다. 한국으로 돌아온 부부가 전 세계의 손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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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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