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8일 하즈 시작 전날 메카의 카바신전을 돌고 있는 무슬림들. 장시간 노출로 찍은 사진이다. ⓒphoto 뉴시스
지난 8월 18일 하즈 시작 전날 메카의 카바신전을 돌고 있는 무슬림들. 장시간 노출로 찍은 사진이다. ⓒphoto 뉴시스

이슬람교의 최대 연례행사 ‘하즈(Hajj·성지순례)’가 지난 8월 19일부터 시작해 24일 막을 내렸다. 하즈는 이슬람 신자(무슬림)라면 지켜야 하는 ‘다섯 기둥(의무)’ 가운데 하나로, 7세기 선지자 무함마드가 죽기 전 아라비아반도(현 사우디)에서 행한 순례를 답습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을 통해 신자들은 종파·국적·인종과 상관없이 ‘이슬람 아래 우린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을 다지고 신앙의 의미를 되새긴다.

하즈가 5대 의무라고는 하지만 무조건 지켜야 하는 건 아니다. 순례지인 사우디 도시 ‘메카’까지 여행할 체력과 금전적 여유가 없다면 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가난하거나 병들어 하즈를 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신자도 많다. 하지만 다수는 어떻게든 ‘다섯 기둥’을 모두 지키고자 평소 건강을 관리하고 차곡차곡 돈을 모아 죽기 전 최소 한 번은 순례길에 오른다.

하즈를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슬람력으로 12번째 달인 ‘둘힛자’ 8~12(또는 13)일에 맞춰서 해야 한다. 지난 8월 19일이 올해 둘힛자 8일이었다. 이슬람력은 음력 체계라서 매년 하즈 시작과 종료일은 국제표준인 그레고리력으로 봤을 때 조금씩 달라진다. 하즈 기간도 보통 5일이지만 달의 모양에 따라 6일째 끝나는 경우도 있다.

사우디, 하즈 비자 200만명에게 발급

매년 둘힛자 8일이 다가오면 성지 메카를 관할하는 사우디 정부는 세계 무슬림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해진다. 사우디는 안전 등의 이유로 하즈 허용 인원을 대략 200만명으로 제한하고, 이에 맞춰 ‘하즈 비자’를 발급해주고 있다. 하즈 비자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는 매년 거의 변함없이 인도네시아다. 무슬림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2억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에 사우디 정부는 올해에도 약 22만명의 인도네시아인에게 하즈 비자를 발급했다. 사우디는 외교관계도 없는 적대국 이란에도 8만5000명분의 하즈 비자를 내줬다. 정치적 문제를 잠시 뒤로하고 ‘성지 관리국’으로서 중립적 모습을 보인 것이다.

기독교의 크리스마스(성탄절) 행사도 전야제가 있듯, 하즈에도 전날 행사가 있다. 공식적으로 시작하는 둘힛자 8일 이전부터 순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하즈 시작일 전날부터 종료일까지 순례를 어떻게 하는지 정리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하즈 순례자들. ⓒphoto 뉴시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하즈 순례자들. ⓒphoto 뉴시스

시작 전날 - 카바신전을 돌다

순례객은 목욕재계를 하고 바느질이 되지 않은 하얀 천 두 쪽을 각각 몸 위아래에 둘러 입는다. 국적·인종·지위 등에 상관없이 모든 무슬림 남성이 이 같은 복장을 동일하게 입는다. ‘모든 무슬림은 평등하다’는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다. 여성 무슬림은 남성처럼 하얀색 옷을 입지는 않지만, 머리카락을 가리는 스카프 ‘히잡’은 둘러야 한다. 평소 히잡을 쓰지 않는 무슬림 여성도 순례할 때는 히잡을 써야 하는 것이다. 순례 기간 부부는 성관계를 하지 않고 면도와 이발도 하지 않는다. 손톱도 깎지 않는다.

의복을 갖춘 순례자는 메카의 대(大)사원에 찾아간다. 이어 사원 중앙에 있는 ‘카바신전’을 반(反)시계방향으로 7바퀴 걸어서 돈다. 카바신전은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2m·10m·15m 정도다. 이 카바신전의 위치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제단을 쌓은 곳으로 알려져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다. 일부 순례자는 카바신전에 가까이 다가가 신전의 동쪽 모서리 아래에 박혀 있는 직경 약 30㎝의 검은 돌을 손으로 만지거나 입을 맞춘다. 이 돌이 오래전 천사가 신의 뜻을 받아 특별히 내려준 것이라는 설이 있어서다.

카바신전을 도는 건 이슬람 공동체가 하나가 돼 신을 예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바퀴 또는 100바퀴도 아닌 굳이 7바퀴를 도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중동에서 ‘7’이라는 숫자가 ‘완벽’ ‘온전함’ ‘많음·꽉 참’을 의미한다는 점과 관련 있다. 즉 신을 ‘온전히’ ‘완벽하게’ ‘꽉 차게’ 예배하겠다는 바람과 의지를 드러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상에서 천국까지 가는 데 7단계를 거친다는 이슬람의 믿음 때문이다. 7바퀴를 도는 의식은 신과 가까워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신전을 반시계방향으로 도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라고 구전됐기 때문에 이를 따르는 것이라 한다.

대사원 순례를 다한 이들은 인근의 두 언덕 ‘사파’와 ‘마르와’ 사이를 7번 왕복한다. 이는 아브라함의 아내 하갈이 갓난아기 이스마엘에게 먹일 물을 찾기 위해 헤맨 심정을 체험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대사원과 두 언덕 순례는 이슬람력 둘힛자 8일인 하즈 첫째 날 전날에 하지만 그보다 며칠 더 미리 하는 사람들도 있다.

첫째 날 - 미나계곡의 텐트촌

순례자들은 메카에서 동쪽으로 5㎞ 떨어진 미나계곡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경전 코란을 읽고 기도하면서 다음날 새벽 동이 틀 때까지 머문다. 과거엔 순례자들이 직접 텐트를 쳤지만, 요즘엔 사우디 정부가 순례자의 편의를 위해 미리 냉방 시설이 갖춰진 ‘신식 텐트’를 설치해 놓고 있다. 10만개가 넘는 텐트가 계곡 사이에 펼쳐져 있는 모습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둘째 날 - 아라파트산으로

동이 트기 전 캄캄한 새벽, 순례자들은 미나계곡에서 동쪽으로 15㎞가량 떨어진 아라파트산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소리 내 신을 찬양하거나 묵상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라파트산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바치려 한 곳이자, 무함마드가 생전 마지막 설교를 한 곳으로 알려졌다. 해가 지면 이들은 아라파트산과 미나 사이의 무즈달리파 평원에 가 밤을 새운다. 이들은 이곳 바닥에서 돌멩이 여러 개를 주워 챙겨놓는데, 이는 다음날 쓰기 위해서다.

셋째 날 - 돌멩이 7개를 던지다

아침이 되면 다시 미나계곡으로 돌아가 자마라아트라고 불리는 거대한 돌기둥(장벽 같기도 하다)을 향해 돌멩이 7개를 던진다. 악마를 내쫓는다는 의미다. 돌기둥의 위치는 사탄(악마)이 아브라함을 시험한 곳이라 여겨진다. 아브라함은 신의 뜻에 따라 아들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는데, 사탄이 나타나 그러지 말라고 유혹하자 물러가라며 돌을 던졌다고 한다. 이런 일화를 신자들이 몸소 따라하며 종교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그 다음, 순례자들은 양이나 염소 또는 소나 낙타를 번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를 치른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이려는 순간, 신이 이를 막고 준비해둔 양을 번제물로 쓰라며 아브라함에게 준 코란 일화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 일화는 이슬람뿐 아니라 기독교·유대교의 경전에도 나온다. 차이는 있다. 기독교·유대교 경전에는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드리려 한 아들이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으로 나온다.

희생제를 마치면 순례자는 머리를 박박 면도하거나 일부 머리카락을 자른다. 하얀 옷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하즈의 가장 중요한 의식이 치러지는 3일간의 일정을 마쳤다는 의미다. 이후 이들은 메카 대사원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카바신전 돌기를 한다. 그리고 미나계곡으로 가 하룻밤을 보낸다.

넷째·다섯째 날 - ‘하지’가 되다

미나계곡에 머물며 셋째 날 했던 것처럼 자마라아트 돌기둥을 향해 돌 던지는 의식을 반복한다. 휴식을 취하고 함께 순례한 이들과 식사를 하며 공동체 의식을 다진다. 카바신전에 가서 7바퀴 도는 의식을 더 하기도 한다.

하즈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하지’라는 호칭을 얻는다. 종종 한국에서 순례인 하즈를 하지라고 부르는데, 잘못된 것이다. 하지는 아랍어로 ‘하즈를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인들은 “하지!”라고 반복해 부르며 순례를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고 존경심을 보인다. 하지는 스스로 종교 의무를 다한 것에 뿌듯함을 느끼고 신께 감사한다는 뜻으로 가난한 이웃이나 지인들에게 양고기 등 음식을 대접한다.

압사 등 순례 중 수백 명 사망

간단한 일정인 것 같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우르르 몰려다니다 보니 순례자 사망 사건도 빈번하다. 이번에도 이집트인 30여명 등 총 수백 명이 순례를 하다 사망했다. 노인들이 저혈압 쇼크로 숨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 지병이 순간적으로 악화해 숨을 거두면 신께서 불러 하늘나라로 갔다며 종교적으로 긍정적 해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전사고로 인한 사망 사건은 유족을 큰 슬픔과 분노에 빠지게 한다. 실제로 2015년 하즈 때는 미나계곡에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무려 700여명이 압사했다. 이 사건은 하즈 기간 발생한 사고로는 1990년 1426명의 목숨을 앗아간 압사 사고 이후 역대 두 번째로 인명 피해가 큰 참사로 기록됐다. 1997년에는 미나계곡의 텐트촌에 화재가 발생해 343명이 숨지고 1500여명이 크게 다쳤다. 인재(人災)였다.

사우디 정부는 세계 이슬람 공동체를 대표해 하즈를 관리한다는 자긍심을 누린다. ‘하즈 비자’를 많이 좀 발급해달라고 부탁하는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을 상대로 ‘갑질’도 한다. 사우디가 지금의 위상을 가진 건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는 점뿐만이 아니다. 이슬람 성지를 가진 ‘종교적 자원 강국’이라는 점도 큰 몫을 한다. 사우디 국왕은 ‘성지의 수호자’라는 점을 내세우며 국내외적으로 왕권을 강화해왔다.

하지만 성지에서 발생하는 안전사고의 책임은 고스란히 사우디 왕가가 져야 하기 때문에 성지가 큰 부담이 되기도 한다. 2015년 압사 참사 때도 사우디 국왕은 ‘성지를 수호할 능력이 모자란 자’라는 소리를 듣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작년 사실상의 왕세자에 오른 무함마드 빈살만도 욕을 안 먹으려고 이번 하즈 행사 때 안전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을 것이다.

노석조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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