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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
[2524호] 2018.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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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스타트 예루살렘 한국대회’ 통해 본 ‘스타트업 네이션’ 이스라엘

의사·변호사보다 해커! 취업보다 창업!

노석조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전 예루살렘 카이로 특파원 

▲ 이스라엘판 실리콘밸리인 ‘실리콘와디’ 홍보물. photo disruption banking.com
전쟁과 분쟁의 나라로 각인된 이스라엘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미지 변신을 했다. ‘스타트업 네이션(startup nation·창업국가)’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뜬금없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아졌다. 인구가 800만명밖에 되지 않고 여전히 툭하면 전쟁이 터졌지만, 창업 성공 신화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이런 기현상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창업 정신은 해외에 수출됐다. 이스라엘은 면적이 한국의 25%밖에 되지 않은 작은 나라다. 석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흙수저 국가’다. 이런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머리만 잘 굴리면 얼마든지 비즈니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들의 스토리는 더욱 매력적으로 포장됐다. 이스라엘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세계 큰손들을 불러모았다. 거액의 외국 투자금은 사막에 내리는 단비였다.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현재 이스라엘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3만7000달러(약 4120만원)다. 3만8000달러인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2만7500달러인 한국보다 한참 앞서 있다.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않은 주변 아랍국가들마저 이들의 창업 육성 성공 비결을 알려고 몰래 요원을 보내 현장 조사하고 벤치마킹했다. 얄밉지만 배울 건 배워야 했다.
   
   이스라엘은 빈사(瀕死) 상태였던 한국의 창업 정신에 호흡을 불어넣었다. 한때 한국도 ‘스타트업 네이션’이었다. 1990년 말 ‘닷컴 붐’ ‘벤처 시대’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창업 열풍이 거세게 일었다. 정보통신기술(ICT) 벤처들이 쉴 새 없이 등장했다. 과학 수재들이 이 물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한국은 실패를 용납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파산하는 벤처가 하나둘 생겨나고 투자했던 이들의 금전적 피해 사례가 부각되자 닷컴 붐은 금세 사그라졌다. ‘괜히 창업했다가는 집안이 쫄딱 망한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커졌다. 과학 수재들은 대학 졸업장을 들고 월급 꼬박꼬박 주는 회사를 찾아가기 바빴다. 그렇게 15년간 창업 정신을 잃어가던 한국은 ‘스타트업 네이션’으로 우뚝 선 이스라엘에 자극을 받았다. ‘우리도 해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여전히 한국은 철밥통 공무원, 번듯한 대기업 직원을 최고의 직업으로 삼는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 같은 청년 창업가들이 점점 느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이 잘 헤엄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손길도 있다. 한국 창업진흥원과 주한(駐韓) 이스라엘대사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스타트 예루살렘 한국대회’가 하나의 예다. 이 대회의 목적은 유망한 한국 스타트업을 선발해, 오는 11월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국제창업경진대회인 ‘스타트 예루살렘’에 출전시키는 것이다. 한국 스타트업들이 세계 유명 기업들로부터 투자를 받거나 이스라엘 스타트업과 교류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창업진흥원은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13일까지 대회 참가 신청을 받고 있다. 양국 청년 창업가 사이에 다리가 놓인다니 희소식이지만,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하다. 서울이 ‘창업의 성지(聖地)’가 될 수는 없는 걸까? 한국 청년의 머리가 이스라엘보다 뒤지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무엇이 차이를 만든 걸까?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을 처음 가보곤 적잖게 놀란다. ‘머릿속에 그린 그림’과 달리 도시의 풍경은 모던하지 않다. ‘유대인은 세계 금융을 잡고 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정작 현지 은행을 가보면 이런 구닥다리가 없다. 통장 개설 같은 단순 업무를 보려 해도 한두 시간 기다리기 일쑤다. 직원들은 불친절하고, ‘뭘 이런 걸 달라 하나’ 싶은 문서들을 요구한다.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한국의 친절하고 편리한 서비스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다.
   
   이스라엘은 이런 자신들의 ‘불친절함’을 잘 안다. 적의 로켓이 언제 날아올 줄 모르는데 도시 겉모습을 가꿔봤자 쓸모없다는 것도 잘 안다. 아랍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와 민족이 자신들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안다. 실제로 유럽 등지에선 ‘메이드 인 이스라엘’ 제품 불매 운동을 벌이는 단체가 한둘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독보적인 기술적 우위를 갖지 않고선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다른 나라와 기업이 안 쓰고는 못 배기는 기술로 승부를 봐야 했다. 1945년 건국했을 때부터 농산물 자급자족을 위해 총력전을 벌였던 것도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수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따 국가’는 살아남으려면 사막에서라도 경작을 해내야 했던 것이다.
   
   기술 개발의 절박함이 남달랐던 이들은 1969년 경제부에 수석과학실을 세웠다. 안보와 직결되는 농업을 살리는 신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춘 특별 조직이다. 얼마 뒤 사막에서 망고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농업 안보’ 문제를 해결한 수석과학실은 1990년 무렵 다음 미션에 착수했다. 산업 육성이다. 어떤 산업을 키워야 할까? 제조업은 아니었다. 내수시장이 작고 수출 가능한 나라가 얼마 되지 않았다. 오토바이·자동차·선박을 만들 공업용수 확보도 어려웠다. 작지만 값비싼 기술 상품을 만들어야 했다. 마침 ICT 산업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나 배로 나르지 않고도 해외에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ICT 기술과 제품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ICT 시장을 뛰어다닐 ‘선수’가 필요했다. 기술전문 업체를 길러내기로 한 것이다. ‘스타트업 네이션’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수석과학실은 국가 자금과 민간 자금을 한데 모았다. 이걸로 창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청년들이 과감하게 창업에 뛰어들 수 있도록 실패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치하진 않았다. 기술·법률 전문가들을 고용해 창업에 필요한 각종 행정 업무를 도왔다. 참신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돈이 되도록 다듬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해외 진출의 길을 터주고 좋은 투자자를 소개했다. 창업의 씨앗을 뿌리고 이 씨앗에서 싹이 틀 수 있도록 땅에 거름을 주고 바람막이를 쳐준 것이다. 이들은 이 프로그램을 ‘창업 인큐베이터’라고 불렀다.
   
   싹이 파릇파릇하고 줄기가 튼실하더라도 토양의 영양분과 일조량이 부족하면 금세 시들기 마련이다. 수석과학실은 스타트업이 잘 커 나갈 수 있는 ‘건강한 창업 생태계’ 조성에 정성을 쏟았다. 대학 등 학계는 기술력의 저수지다. 민간 투자업체는 스타트업이 규모를 키우고 기술력을 상업화하는 데 필요한 돈의 공급처다. 정부 부처는 스타트업 성장에 장애가 되는 각종 제도를 재정비하는 수리공이다.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창업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효율성은 극대화했다. 이 같은 창업 생태계와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창업 붐이 지속가능한 이유다.
   
   
   해커 키우는 군대
   
   비결은 하나 더 있다. 군(軍)이다. 지난 2월 기자가 이스라엘에 스타트업 취재를 갔을 때다. 10여일간 현지 20개의 스타트업 대표와 직원들을 만났다. 인터넷 보안 업체부터 차량 내비게이션 개발사까지 업종이 다양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 모두 자신들이 창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군 복무 경험을 꼽는 것이 아닌가! 군에서 배웠던 통신·컴퓨터 프로그램 기술 또는 군에서 쌓은 인맥이 창업의 밑천이 됐다고 했다. “군대 가면 썩는다”는 말을 대통령이 할 정도로 군 복무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한국과는 딴판이다.
   
   이스라엘은 징병제 국가다.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 동안 의무적으로 군 복무를 한다. 특이한 건 거의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대한다는 점이다. 고3 때 대입(大入)이 아닌 입대(入隊) 준비를 한다. 대학은 제대 후 시험 준비를 해 들어간다. 10대 시절부터 군대에서 전우로 만난 이들은 평생 친구가 되고 훗날 사회인이 돼서도 어떻게든 연결된다. 사업 파트너가 되는 경우도 많다.
   
▲ 입대 선서를 하는 이스라엘 젊은이들. photo 뉴시스

   군에서 창업할 카드 하나씩을 챙겨 나올 수 있는 건 이들 군이 기본적으로 분야별로 전문화해 있기 때문이다. 상대할 적국·적대 단체는 많은데 병력은 얼마 없는 이스라엘은 정예군을 지향했다. 군 조직은 전문화·세분화했다. 부대마다 특징이 뚜렷해졌다. 병사들에게 삽질보다는 고급 기술을 익혀 이를 전쟁에 활용할 방편을 궁리했다. 2~3년간 이런 부대에 있다 보니 사회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뭐라도 하나 배워 나올 수 있게 됐다. 군 복무는 창업의 능력을 기르는 시간이 된 것이다.
   
   쉬모네메타임(히브리어로 8200) 부대 출신이 최근 이스라엘 스타트업계를 주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쉬모네메타임은 사이버 첩보부대로 최첨단 해킹 기술 등을 보유하고 있다. 이 부대에 들어갔다가 제대할 때면 유능한 해커가 돼 있는 것이다. 이 부대 출신은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세계 유수 IT업체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한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같은 최고의 명문대에 들어가는 데도 유리하다. 이에 고3들은 대입 경쟁이 아니라 좋은 부대 가려는 ‘입대 경쟁’을 한다. 자연스럽게 군은 실력 있는 병력으로 채워진다. 선순환이 일어나 군 복무자와 군 조직 모두 이득을 챙기게 된다. 수준 높은 군으로 인해 산업도 덩달아 수준이 높아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창업을 존중해주는 사회
   
   “의사, 변호사보다 해커!” 얼마 전 만난 60대 이스라엘인이 “요즘 이스라엘의 최고 직업이 뭔지 아느냐”며 한 말이다. 그는 해커 사위를 두고 싶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결혼할 적만 해도 결혼 상대로 인기 있는 직업은 변호사나 의사였지만, 지금은 해커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해커가 이제 웬만한 변호사·의사보다 돈을 잘 벌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세상만사가 인터넷과 컴퓨터로 연결되고 돌아가는 이 시대에서 해커는 창업해서 대박을 터트릴 가능성이 가장 큰 직업이라 할 수 있다.
   
   해커를 남의 컴퓨터를 침투하는 부정적 존재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은 반대로 적의 침투를 사전에 방어하는 ‘좋은 기술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해커가 사이버 안보 업체를 창업해 기업과 정부 시스템의 안전을 책임지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지난 6월 발간된 이스라엘 정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이스라엘에 사이버 안보 관련 스타트업은 166개에 달하며 이 가운데 16개사는 5000만달러(약 560억원) 이상의 투자금을 확보했다. 5000만달러 미만 3000만달러 이상의 투자를 받은 업체도 18개사나 된다.
   
   ‘의사·변호사보다 해커’라는 말은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이 사회에서 창업의 인식이 어떤지도 여실히 보여준다. 창업을 멋진 도전이자 성공의 첫걸음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진짜 실력 있는 젊은이들은 취업보다 창업을 우선으로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얄밉지만 영화 같은 이야기가 이 나라에선 매일같이 뉴스로 보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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