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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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의 한 아파트에서 청소용역 일을 2년 가까이 해왔던 정순자(가명)씨는 얼마 전 추석연휴를 기점으로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일흔을 2년 앞둔 나이지만 아직 취직하지 못한 막내아들을 대신해 일하던 정씨가 갖은 고민 끝에 일을 그만두게 된 이유는 한 입주민의 ‘갑질’ 때문이었다. 이 입주민은 늘 쓰레기봉투를 아파트 현관 앞 복도에 내놓곤 했다. 처음에야 쓰레기 버리는 것을 잊은 줄 알고 대신 치워줬지만 점차 밖에 내놓기만 하는 쓰레기가 늘어났다. 분리가 안 된 재활용쓰레기부터 여름에는 음식물쓰레기까지 내놓고는 정씨와 마주치면 ‘대신 버려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어서 용역회사에서는 ‘쓰레기까지 버려드리지는 않는다’고 대답하라고 알려주기도 했지만 막상 닥치니 아무 쓸모없더군요. ‘복도 청소해주시는 거 아니냐’며 당당히 되묻는데 그냥 ‘알겠습니다’ 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소한 갑질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세기도 힘들어요.”

여행가방을 들고 내려가다가 ‘들어달라’고 부탁해놓고는 감사 인사도 표시하지 않고 휙 떠나버리는 대학생부터 구두에 대걸레가 스쳤다며 짜증 내는 회사원까지 있었다. 정씨는 “내가 청소하는 쓰레기보다 못한 인간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청소용역 근로자를 낮추어 보고 갑질하는 사례는 드문 일이 아니다. 최근 들어 갑질은 직업과 계층을 불문하고 나타난다. 서울 강북 지역의 한 구청 교통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공무원 이경진(가명)씨가 만난 ‘갑질’ 민원인을 꼽으라면 수도 없이 많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올해 초에 있었던 일이다. 장애인주차구역에 상습적으로 주차해 여러 차례 과태료 통지서를 받은 민원인은 전화로 갖은 횡포를 부렸다.

어디서나 발생하는 갑질

“그냥 전화로 욕설만 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어떻게 알았는지 제 개인 이메일로도 엄청나게 많은 민원 메일을 보내기 시작하더군요. 국민신문고에 글을 올리지 않나, 우편으로도 항의를 하는 통에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지요. 이메일이나 우편마다 적힌 문장은 외울 정도예요. ‘민원인 본인은 40년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민원인은 자신이 공무원 선배라며 ‘선배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어요.”

갑질 사례를 조사하다 보면 온갖 영역에서 갑질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갑질이라는 용어 자체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갑(甲)으로 봤을 때 생기는 불합리한 일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요즘 전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갑질은 상사와 부하, 교수와 학생, 고용인과 피고용인 같은 명시적인 권력 관계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아주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권력 관계, 이를테면 점원과 손님 사이에서도 갑질이 일어난다. 공무원과 민원인이나 교사와 학부모처럼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조그마한 우열 관계만 생겨도 갑질이 일어나는 상황이다.

갑질이 본격적으로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것은 4년 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일으킨 ‘땅콩회항’ 사건이다. 이후로도 잊을 만하면 새롭게 불거지는 사건 때문에 갑질 문제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정치권에서는 ‘갑질 방지법’이 끊임없이 발의되고 시민단체에서는 갑질에 대항하는 조직이 만들어지고 있다. 공공기관에서는 갑질 고발센터가 세워지고 실제로 ‘갑질 전수조사’ 같은 실태조사도 계속해 시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질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갑질이 병적인 몇몇 사람만이 일으키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평등과 민주주의 연구센터’가 여론조사기관 한국리서치와 지난 8월 갑질문제에 대해 총체적인 여론조사를 한 결과를 보자. 갑질을 당해본 적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90%에 달했다. 정치권이나 대기업, 공무원 같은 권력집단에 의한 갑질이 상당수였지만 생활형 갑질도 만만치 않은 심각성을 보였다. 감정노동 종사자나 비정규직, 임차인, 부하직원이 겪는 갑질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를 “모두가 갑이 되고 싶은 사회”라고 정의했다. 갑질의 피해자가 다시 다른 갑질의 가해자가 되기를 서슴지 않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도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게 최 교수의 지적이다. 손님의 갑질에 피해를 입던 자영업자는 다시 아파트 경비원에게 갑질을 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갑질이 있는 사회, 한국을 ‘갑질사회’라고 불러도 될 상황이다.

무한경쟁이 불러온 갑질사회

보통 갑질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갑질이 한 개인의 일탈적 행동이라고 간주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갑질 문화 개선을 위해서는 갑질 행위자 무관용 파면 같은 강력한 인사상 불이익이 선행돼야” “갑질 논란 있어도 형사처벌 안 받으면…” 같은 언론 보도를 보면 갑질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은 강력한 처벌인 것처럼 보인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사회 곳곳에서 암묵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갑질을 없애기 위해서는 갑질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에게 엄중하게 처벌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갑질이 어떤 과정으로 이뤄지는지를 분석하는 일이다. 사회 지도층 몇몇의 갑질은 개인의 정서적·심리적 문제인 것이 맞지만 사회 전반에서 갑질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러 ‘갑질사회’가 된 원인을 두고 지도층의 갑질을 모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지도층이 먼저 갑질하는 것을 보고 일반 시민들까지 “약간만 우월한 위치여도 타인에 대한 인신모독과 언어폭력이” 자행된다는 분석도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최항섭 교수 역시 ‘보상심리’와 ‘한풀이’의 개념으로 갑질사회를 설명했다.

“한풀이는 한을 맺게 한 사람에게 직접 복수하면서 이뤄질 때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면서 풀어낼 때도 있습니다. 또는 자신이 당했던 갑질을 자신보다 열세에 있는 사람에게 똑같이 하면서 보상심리로 만족해한다고 볼 수도 있죠. 어느 쪽이든 ‘나도 당했는데 나라고 못할쏘냐’는 심정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갑질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 박종태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감정노동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한국감정노동인증원의 추계에 따르면 국내 2500만 근로자 중 유통업계 판매원, 소비자 상담원, 간병인 등 감정노동 종사자는 8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정노동 종사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감정을 감추도록 교육받았고 고객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박 교수는 “어디를 가나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손쉽게 자신의 감정을 풀어낼 사람이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감정노동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감정의 갑질이 더욱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더욱 깊이 들여다보면 ‘갑질사회’의 원인은 사회구조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항섭 교수는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상대적 박탈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야기하는 치열한 경쟁, 계급 상승의 욕구를 짚었다.

한동안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계급 이동이 다른 어떤 사회보다 활발히 이뤄졌다는 점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치열한 경쟁의 결과였다. 누구나 기회를 잘 잡으면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타인은 모두 경쟁자다. 특히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자녀교육에 ‘올인’하는 학부모들을 보면 우리 사회가 무한경쟁 사회라는 것, 타인을 모두 경쟁자로 생각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나보다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은 동경의 대상이고 나보다 낮은 사람은 경계합니다. 보통이라면 높은 사람에 경쟁의식을 갖고 낮은 사람을 배려하겠지요. 계급 상승욕구가 어느 사회보다 강한 한국에서는 나보다 낮은 사람을 경계하는 풍토가 매우 강합니다.”

노·노 갑질이 의미하는 것

노(勞)·노(勞) 간 갑질이 대표적인 사례다. 비정규직 직원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갑질 사건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지난 5월 대구 중구청의 한 공무원이 몇 년간 기간제 근로자들을 개인적인 일에 마음대로 동원한 사실이 드러나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이 공무원은 1년마다 계약이 갱신되는 기간제 근로자들의 계약을 담당하는 ‘갑’으로 근로자들을 본인의 조상 묘소를 벌초하게 하거나 부인이 운영하는 어린이집 일에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같은 시기 서울 김포공항에서 근무하는 비정규직 보안요원에게 언어폭력을 상습적으로 해온 세관 직원의 사건이 알려지기도 했다.

갑질을 단속해야 할 경찰공무원까지 의무경찰 같은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직원을 상대로 갑질을 한다. 지난 9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재정 의원실(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2014년부터 올해까지 전국 지방경찰청에서 의경을 대상으로 갑질을 해 징계를 받은 경찰만 51명이었다. 의경들에게 빨래를 시키거나 자녀의 대입 자기소개서 작성을 요구하는 등 사적인 업무를 시키는 사례가 가장 많았고 성추행을 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이 문제를 경찰공무원 몇몇의 일탈적인 행위로 보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처벌하는 사후적인 처리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시각에서, 비정규직이나 기간제 근로자 등 자신보다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직원을 ‘갑질 대상’으로 보는 사회적인 분위기부터 교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구조가 만든 병리적 현상

중소기업에서 일하다 운전기사로 전직한 후 네 명을 ‘모셨다’는 운전기사 이경덕(가명)씨는 가장 최악의 고용주로 대구의 한 중소기업 사장 A씨를 꼽았다. 직원 100여명의 비교적 건실한 회사를 운영하던 A씨는 밑바닥에서 시작해 자수성가한 자신의 업적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했다. 보통은 A씨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다니다 보면 별일 없이 하루가 끝났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A 사장은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서 뒤늦게 한 대학의 경영자최고위과정을 이수했습니다. 동기모임에 다녀오는 날은 유독 갑질이 심했는데 주로 막말을 하거나 자잘한 것으로 괴롭히곤 했습니다. 차에서 냄새가 나니까 새벽 1시에 세차를 하고 오라거나, 집으로 가자고 했다가 다시 술집에 가자고 하면서 자정이 넘어도 퇴근을 시켜주지 않는다든가. 동기 중에서는 A 사장이 가장 작은 규모의 기업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문제에 민감하게 굴었습니다. ‘부모 잘 만나서 어부지리로 사장 단 사람이 노력해 성공한 사람을 무시한다’는 얘기는 레퍼토리처럼 많이 들었습니다.”

결국 상대적 박탈감의 문제다. 한국인들은 낮은 계급의 사람을 무시하는 대신, 항상 상위 계급의 사람을 비교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당장 스스로의 경제적 계급을 판단하는 조사 결과만 봐도 그렇다. 여론조사기관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해 조사한 바를 보면 본인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체의 29.9%에 불과했다. 하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43.0%에 달하는 것과 비교되는 결과다.

미국 갤럽이 조사한 바는 눈여겨볼 만하다. 갤럽이 2017년 조사했을 때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은 62%에 달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일어난 후 몇 년을 제외하면, 갤럽 조사에서 미국인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인식하는 비율은 60%를 항상 넘었다. 일본 내각부에서 조사한 결과를 봐도 중산층 인식은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자신을 중하위 계급 이하로 보는 사람은 전체의 26.7%에 그쳤다.

계급 상승욕구는 강하지만 항상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다고 볼 수 없다. OECD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신뢰도는 다른 국가에 비해 한참 낮은 수준이다. 타인을 믿는다는 사람이 26.6%로 OECD 평균보다 10% 낮았고 정부를 믿는다는 사람은 28%로 OECD 평균보다 14% 낮았다. 한국사회연구소가 2016년에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대해 조사한 바를 보면 개인주의가 22.2%로 가장 많았다. 공동체 의식 같은 이타적인 가치관은 8.9%로 최하위권이었다.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심리학적으로 병리적인 문제가 많이 나타난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 중 ‘자기애성 성격장애’에 주목한다. 성격장애 중 하나인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몇 가지 특징을 종합해보면 ‘지나친 자기애’로 요약할 수 있다. 자신의 성취를 과장하거나 성취가 없는데도 자신을 우월한 사람으로 인식하거나 특별한 대접을 기대하고 타인을 질투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이용하고 공감 능력이 결핍돼 있다. 임 교수는 이런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어릴 적부터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했을 때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지 못하고 충분한 연대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때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갑질 가해자를 보면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의심할 만한 행동을 많이 합니다. 자기애가 높을수록 공격성도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보면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성장과정에서의 결핍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보면 사회적 조건이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빈발하도록 만들고 공격성을 표출하기 쉽게 만드는 겁니다.”

지난 6월 18일 ‘갑질 교수’ 파면을 요구하는 제주대학교 학생들. ⓒphoto 뉴시스
지난 6월 18일 ‘갑질 교수’ 파면을 요구하는 제주대학교 학생들. ⓒphoto 뉴시스

탈권위가 불러온 갑질사회

공격성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 역시 사회적 조건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최항섭 교수는 “공정성이 의심되는 사회가 부당한 갑질 행위를 늘렸다”고 설명했다. 사실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행정연구원이 매년 조사하는 ‘사회통합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사회의 공정성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문을 가지고 있다. 경제·사회 분배 구조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 취업기회나 균형발전 등에 대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30% 안팎으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

공정성이 낮은 사회에서 사람들은 혼자서 공정하게 사는 일이 불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 혼자 정의로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도덕적인 제재가 풀린다. “남들 다 그러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 갑질 가해자가 자주 하는 변명이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불평등과 민주주의 연구센터’가 조사한 바를 보면 갑질을 당한 빈도가 많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갑질한 경험이 많다. 갑질을 자주 받는다는 사람 중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한 번 이상 갑질한 경험이 있는 비율은 57%나 된다. 갑질을 한두 번 받아봤다는 사람은 갑질한 경험이 44%에 그쳤고, 갑질을 당해본 적 없는 사람은 겨우 19%만 갑질을 한 경험이 있었다. 불공정한 일을 겪어본 사람이 ‘나만 손해볼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다. 최항섭 교수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는 공정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데 면죄부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어떤 경우에 약자였던 사람이 강자가 될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습니다. 내가 받았던 불공정함을 돌려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갑질의 희생자가 되어 분노하던 사람이 갑질의 가해자가 돼 분노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이유는 ‘모두가 다 그렇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권위 사회가 만들어지는 분위기도 갑질사회를 만드는 데 한몫을 한다. 갑질이 어떤 행위인지 여러 가지로 정의하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복종에 대한 기대가 갑질에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나보다 아랫사람이 복종해야 한다’는 우월의식이 갑질의 기본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갑질은 오랫동안 소수의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에서 권위는 복종의 형태로 유지돼왔다고 말한다. 규칙이 복잡한 예절은 복종을 나타내는 수단이었다. 예절을 지키면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뜻을 표시하곤 했다. 확실한 권위주의 사회일 때 갑질은 권위자에게만 부여되는 특권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탈권위 사회로 이행되면서 도리어 권위를 행사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게 됐다.

‘손님은 왕이다’란 문구는 예전 같았으면 권위자가 아니던 일반 시민에게도 권위를 쥐여주는 말이 됐다. 가게 내에서는 ‘왕’이 된 손님들은 기꺼이 점원이 복종하기를 원하게 됐다. 만약 점원이 예의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왜 나에게 거역하느냐’고 갑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 송파구의 편의점에서 1년 넘게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있는 26세 대학생 김용석씨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제가 일하던 편의점 근처에 술집이 많았는데 술집이 문을 닫는 새벽 2~3시만 되면 술 한잔 걸치고 편의점에 와서 행패를 부리던 남자 손님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건너편 호프집 사장이었는데 일이 힘드니까 가게 문을 닫고 괜히 저에게 와서 갑질하는 거였거든요. 온갖 욕이란 욕을 다 듣다가 못 견딜 거 같아서 나중에는 친구들과 함께 그 호프집에 쳐들어갔어요.”

김씨는 술집에 가서 사장에게 갑질을 했다. 물이 시원하지 않다거나 음식이 맛없다면서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욕을 했다고 한다. “인터넷에 보니까 그렇게 하라는 얘기가 많더라고요. 확실히 속이 시원해졌고, 그 사람은 다시는 제가 일하는 편의점에 오지 않았어요.”

만인의 만인을 향한 갑질사회는 가해자도 피해자가 되고 갑질이 종식될 수 없는 사회로 치닫고 있다. 갑질의 피해자였다가 가해자가 되어서 “통쾌했다”고 말하는 20대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와도 같다. 최항섭 교수는 갑질사회의 근본 원인을 찾고 사회 전체의 갑질 인식을 바꾸지 않는 이상 사회통합은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갑질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 갑질행동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지만 왜 사람들이 갑질을 멈추지 않는지, 갑질사회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 최 교수의 말이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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