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씨 시조인 가락국 수로왕의 황후 허황옥의 어진.
허씨 시조인 가락국 수로왕의 황후 허황옥의 어진.

우리나라 국제결혼 1호 커플은? 무려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가락국을 세운 김수로왕과 아유타국 공주로 알려진 허황옥 커플이 그 주인공이다. 허황옥은 먼바다를 건너온 외국인 신부였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에 따르면 서기 48년 7월 27일, 붉은 돛을 휘날리며 배 한 척이 당시 가야국인 김해 남쪽 해안에 도착한다. 20여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배에서 내린 여인은 “나는 아유타국 공주로 성은 許(허), 이름은 黃玉(황옥), 나이는 16세”라고 소개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로왕은 신하를 보내 성대하게 이들을 맞고 허황옥을 황후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국내 최초 다문화가정의 탄생이었다. 다문화가정은 지난해 기준 31만9000가구, 구성원 수는 100만명에 달한다.

김수로왕과 보주태후로도 불리는 허황옥은 모두 10남2녀를 낳았다. 이들이 김해 김씨의 뿌리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김유신이 수로왕의 12대손이다. 그런데 10남2녀 중 아버지의 성이 아닌 어머니 허씨 성을 따른 아들이 있었다. 만리타국에 와서 자신의 성 하나 남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허황옥이 수로왕에게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허황옥을 시조로 모시는 허씨는 양천, 김해, 하양, 태인, 한산 5개 본관이 있다. 허씨 성을 따른 아들이 두 명이라는 설도 있으나 허씨 문중에서는 둘째 아들만 허씨 성을 이은 것으로 보고 있다.

모계 성을 따른 하양 허씨의 문경공파가 국내 최초로 모계혈통 중심의 족보를 만든다. 지금까지 족보는 무조건 부계혈통, 남성 중심이었다. 사위 이름은 올려도 딸 이름은 못 올렸다. 며느리는 ‘누구의 여식’이라고 올렸을 뿐 역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반면 하양 허씨 문경공파가 새로 만드는 족보는 남녀 구분 없이 모두 올라간다. 딸, 외손은 물론이고 외국인 며느리 이름도 족보에 오를 수 있다.

“시대가 바뀐 만큼 남존여비 족보도 남녀평등 족보로 변해야 합니다. 또 다문화가정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최초의 다문화가정에서 나온 성씨로서 먼저 귀감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한국에 시집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외국인 며느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모계혈통 세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양 허씨 문경공파 종친회장인 허광열(71)씨의 말이다.

문경공파는 황희, 맹사성과 함께 세종시대 3정승으로 불리던 경암 허조(許稠·1369~1439)의 후손들이다. 경암은 태조부터 세종까지 네 임금을 거쳤다.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으로 왕들의 신임이 두터웠다. 세종 때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간택-평론-중의’ 3단계의 혁신적 인사시스템을 만들어냈다. 허광열 회장은 문경공 허조의 21대손이다. 지난 2012년 허씨 문중에서는 왕지, 각대, 호패 등 경암 허조의 유물 27점을 함양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하양 허씨 문경공파는 현재 25대손까지 2만여명에 이른다. 문중에서는 10년 전부터 모계혈통 세보를 준비해왔다. 모계혈통 세보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대부터 딸, 며느리의 이름을 모두 찾아야 한다. 문중 총무를 맡고 있는 허문환(62)씨는 80%는 작업이 끝났다고 말했다. “문헌, 문집, 묘갈명(묘비에 새겨진 글), 비문 등에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명단을 수집해왔습니다. 제적등본을 떼면 3~4대 위 100년 이전부터는 기록이 남아 있는 한 추적을 할 수 있습니다. 선대들을 찾는 작업은 거의 마무리가 돼갑니다. 문제는 현재 살고 있는 후손들입니다. 이들을 파악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하양 허씨 문경공파 허광열 종친회장(오른쪽)과 허문환 총무가 모계혈통 족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하양 허씨 문경공파 허광열 종친회장(오른쪽)과 허문환 총무가 모계혈통 족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족보는 나의 뿌리를 찾는 일”

족보에 대한 관심이 없다 보니 후손들의 협조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죽은 사람 찾는 것보다 산 사람 찾기가 더 어렵다. 11월부터 족보편찬위원회를 중심으로 명단 확보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내년까지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이 목표이다. 예정대로 진행되면 내년 연말쯤이면 국내 첫 모계혈통 족보를 구경할 수 있게 된다.

“40년 전만 해도 경찰 진급도 그렇고 군에서 장성급에 진급할 때 족보가 없으면 진급을 안 시켜줬습니다. 과거에는 그만큼 족보가 중요했습니다. 족보가 없는 대령들은 장군 진급 때가 되면 돈 보따리 싸들고 다니면서 남의 족보에 이름 올리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요즘엔 족보 찾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 일도 우리 대가 끝나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걱정입니다.” 허문환씨의 말이다. 허씨가 살고 있는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부호동 일대는 허씨 집성촌이다. 부호1동의 경우 과거 95가구 중 93가구가 허씨였는데 현재는 20여가구만 남았다고 한다.

허씨 시조인 허황옥 설화는 소설처럼 들리지만 실제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많다.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수로왕비릉 옆에 있는 가야시대의 ‘파사석탑’이 대표적이다. 허황옥이 바다를 건널 때 풍랑을 다스리기 위해 싣고 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227호이다. 돌멩이를 쌓아올린 것이 우리나라 석탑과는 전혀 다른 양식인 데다 붉은 반점에 부드러운 석질이 국내에서는 찾기 힘든 돌이라고 한다. 또 2012년 김해시 봉황동 연립주택 신축 부지에서 3~4세기 가야시대 배의 일부로 보이는 나무 조각이 발견됐다. 가락국의 상징인 ‘쌍어문(雙魚紋)’도 허황옥 도래설의 증거로 꼽힌다. 두 마리의 물고기가 양쪽에 서 있는 쌍어문(신어문)은 고대 인도에서 성행하던 장식이다. 지금도 인도에서 쌍어문 장식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경남 김해시는 지난 9월 허황옥이 처음 도착했다고 전해지는 ‘망산도’ 가야유적 발굴조사에 나섰다. 학계서는 망산도 추정지로 김해시 전산마을 뒤편 언덕, 김해시 칠산 등을 꼽고 있다. 이번에 김해시가 발굴에 나선 곳은 김해평야 한쪽에 위치한 삼정동 일대 전산마을 뒤편이다.

허황옥이 왔다는 아유타국이 어디인가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인도 북부의 고대 왕국으로 지금의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아요디아(Ayodhya)라는 설과 인도 이주민이 세운 태국의 아유타야설, 중국 쓰촨성 보주(현 안웨현) 출신설이다. 허씨 문중은 인도 아요디아가 시조 할머니의 고향이라고 믿고 있다. 아요디아시에는 허황옥 기념공원도 있다. 매년 3월 김해 김씨와 허씨 문중에서는 이곳에 찾아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 공부하고 심부름하다 50년 가까이 문중 일을 했다는 허광열 종친회장은 족보는 우리 시대에도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요즘 세대는 할아버지 함자도 제대로 쓸 줄 모릅니다. 씨족사회에서는 사촌, 팔촌이 섞여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른에 대한 공경과 도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뿌리가 튼튼하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족보는 나의 뿌리를 찾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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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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