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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29호] 201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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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중우정치가 가르쳐준 것… 테미스토클레스와 아르기누세의 비극

글·사진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 아테네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망명지 마그네시아. 이곳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낡은 생각일지 몰라도 ‘역사의 의미=교훈’이라 믿고 있다. 역사 속의 사건이나 인물, 배경에서 교훈을 얻어 현재나 곧 닥칠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나침반으로 삼자는 것이 역사에 주목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을 보면 ‘역사=절대권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를 코너로 몰아세우기 위한 칼과 명분으로 역사를 활용한다. 반성하고 보충하고 배우자는 자세가 아니다. 상대방을 무릎 꿇리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를 활용한다. 모두의 역사가 아니라 나만의 역사, 우리 편만의 역사다.
   
   주관적 판단이지만, ‘30%론’은 인류 역사 전부에 통용될 수 있는 상식일 듯하다. 역사상 큰 사건이나 격변기를 보면 결국 성공과 실패의 길로 이끈 세력이 각각 30%씩 있고 나머지 40%는 중간 회색지대다.
   
   역사의 성공을 이끄는 세력에는 당대가 아니면 후대에 이르러서라도 박수가 쏟아지지만, 실패의 측면만 들여다보는 30%는 늘 불평불만을 일삼기 십상이다. 문제는 성공을 이끄는 30%가 중간의 40%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이들의 설득이 먹히지 못해 30% 불만세력들의 목소리가 커질 경우 그 사회는 후퇴한다. 반대로 성공을 이끄는 30%의 논리와 생각이 중간 40%에 어필할 경우 그 사회는 발전과 번영이 약속된다. 고맙게도 인류의 역사는 성공을 이끌어온 30%의 역사이기도 하다. 평가에 인색해지거나 잠시 주춤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두의 역사는 성공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 로마는 누구나 인정하듯 우리 모두의 역사다. 21세기를 사는 개인의 이해관계와 무관한 멀고 먼 과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교훈으로서의 역사는 절대적 시간의 경과를 필요로 한다. 프랑스인에게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아직 시기상조다. 독재자, 유럽의 해방자 등 상반된 평가가 아직 50 대 50이다. 하지만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좌우, 진보와 보수, 갑을의 논리가 끼어들기 어려운 역사가 그리스 로마사다. 모두의 개입에서 자유로운 역사적 사건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교훈으로 활용될 수 있다.
   
   
   ‘사기’보다 700년 앞선 역사서
   
▲ 테미스토클레스 흉상
그리스 로마 탐구는 필자의 개인적 취미이자 삶이다. 이 글이 담긴 주간조선 창간 50주년 특집호가 나오는 시간에도 고대 그리스 로마 땅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예정이다. 대략 2000년 전의 역사지만, 국가는 물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단초가 그리스 로마 역사 속에 존재한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수학과 철학, 윤리와 도덕, 나아가 신과 우주에 이르는 삼라만상 모든 것이 녹아 있다.
   
   풍부한 자료와 엄청난 유물 유적은 그리스 로마 탐구에 도움을 주는 최대 장점 중 하나다. 텍스트에 기초한 동양 역사서는 기원전 1세기에 완성된 중국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대표적이다. 그리스의 경우 ‘사기’보다 700년 앞선, 기원전 8세기에 이미 역사서가 나온다. 장님 시인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다. 기독교의 ‘바이블’에 앞선, 서방 역사의 ‘바이블’과 같은 존재가 ‘일리아스’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Herodotos)의 활동시기도 중국보다 400년 앞선 기원전 5세기다. 동양에서 역사에 관한 얘기를 시작하기 수백 년 전부터, 서구에서는 보통 사람들도 역사에 주목했다.
   
   ‘일리아스’가 그러하듯, 그리스 역사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등장하는 주요 인물에 대한 일방적 찬미가 없다는 점에 있다. 특별히 내세우는 주인공이 없다. 승리를 이끈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 그리스에 패한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 모두 위대한 영웅으로 그려진다. 승자를 찬미하기 위한 용비어천가, 패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흑백의 역사가 아니다. 승자 패자 관계없이 결국 모두가 비극적인 죽음으로 향하는, 세상과 인생 전체를 꿰뚫는 교훈서로서의 역사다.
   
   고대 그리스는 중앙집권적인 왕권과 무관한, 지역마다 전부 독립된 폴리스(Polis) 체제의 민주정 사회였다. 왕에게 잘 보이거나 특정 세력에게만 우호적인 역사 기록이 나올 수 없는 환경이었다. 자유로운 세계관에 기초한 제자백가식 논쟁의 결과물이 역사 기록에 담겼다.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사건이나 인물이 넘치고 넘친다. 그리스 로마 연구가 유럽이나 미국의 석학들에게 인문미학의 최고봉으로 다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스 역사를 되돌아볼 때, 현재의 한국 상황에 비견되거나 교훈이 될 수 있는 두 개의 사건이 떠오른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테네의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라는 인물이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와 맞붙은 살라미스(Salamis)해전의 영웅이다. 서방으로 영토 확장에 나선 페르시아는 지중해로 나가는 요충지 그리스 정복에 올인한다. 기원전 490년, 2만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해 그리스를 공격한다. 마라톤 평원을 무대로 아테네군 1만명이 방어에 나선다. 그 유명한 마라톤전쟁이다. 당시 전쟁에서 패할 경우 대학살은 기본이다. 운 좋게 살아남아도 뿔뿔이 흩어진 채 노예로 팔려갈 뿐이다. 병력 규모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페르시아의 전력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아테네의 대승리다.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 뛰다 숨진 아테네 전사는 42.195㎞ 마라톤 탄생의 기원이 된다. 운동 하나에도 자신의 영광과 혼을 불어넣어 기리는 곳이 그리스다.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인 모두가 마라톤 승리에 도취해 있던 그때 단 한 명의 아테네인이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페르시아가 다시 공격할 것이라고 예언한 테미스토클레스다. 당시 아테네는 뜻밖의 ‘횡재’를 경험하게 된다. 아테네 주변 광산에서 은(銀)을 대량 채굴하게 된 것이다. 마라톤 승리와 함께 아테네 여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은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그리스는 철저한 민주정이다. 왕도 없고, 시민회의를 통해 결정하면 구성원 모두가 복종하는 체제다. 마라톤 승리에 들뜬 아테네의 정치가들은 아테네 여신이 내린 은을 시민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자고 제안한다. 포퓰리즘 정치는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이나 극우·극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스는 물론 인간이 모이는 곳 어디에서도 포퓰리즘 정치를 볼 수 있다. 그리스에서 웅변술이 중시된 이유도 포퓰리즘 정치에서 비롯된다. 얼마나 말을 잘하느냐가 곧 힘이었기 때문이다.
   
   
▲ 고대 그리스인은 전장에서 부상을 입거나 죽은 전우를 반드시 가족에게 인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리더십
   
   아테네 시민 모두가 일확천금 꿈에 부풀어 있을 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정반대편에 서서 대응한다. “페르시아는 육지가 아닌, 배를 타고 다시 침략해올 것이다. 미리 배를 만들어 준비해야 한다.” 당시만 해도 그리스는 육군 중심의 체제였다. 배를 통해 보급선을 차단하고 페르시아 해군과 싸우자는 얘기는 황당한 시나리오로 받아들여졌다. 포퓰리즘 정치가는 물론 육군 지지자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시민들도 처음에는 미친 소리라며 웃어넘겼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탁월한 논리와 연설 덕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광산의 은을 기반으로 200척의 배가 급히 건조된다.
   
   마라톤전쟁 10년 뒤 테미스토클레스의 예언이 적중한다. 페르시아가 엄청난 해군을 이끌고 그리스 공격에 나선다. 전부 684척이 동원돼 200척의 그리스 해군에 비해 3배 이상 강한 전력이었다. 그리스 주변 바다에서 수많은 전투가 벌어지지만, 결정타가 된 것은 기원전 480년 9월의 살라미스해전이다. 해류와 지형을 이용하고 거짓 항복작전을 펴면서 그리스의 승리로 끝난다. 페르시아 배 200척이 파손된 데 반해, 그리스는 불과 40척만 피해를 입은 압도적 승리였다. 파손된 배를 피해 헤엄을 쳐 육지에 오른 페르시아군 모두는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군에 학살된다. 살라미스 바다만이 아니라 주변 해역 모두 페르시아인의 피로 물들여진 잔인한 전쟁이었다.
   
   탁월한 리더십과 비전을 통해 아테네, 나아가 그리스 전부를 지켜낸 일등공신이 바로 테미스토클레스다. 포퓰리스트 정치가의 감언이설을 멀리하고, 유비무환 정신으로 무장한 아테네 시민의 냉철한 판단력도 압권이다. ‘살라미스해전의 승패가 달라졌다면’이란 질문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던지는 가설 중 하나다. 이 질문에 대한 대부분의 결론은 ‘서구식 민주주의 부재’라는 식으로 모아진다. 패했을 경우 1인 왕을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 왕정체제가 그리스를 넘어 유럽 전체로 확산됐을 것이라는 의미다. 지금과 같은 개인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 제도의 탄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환경이 자리 잡았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러나 살라미스해전의 핵심은 단순히 그리스가 이겼다는 점에 있지 않다. 지혜로운 지도자와 용감한 시민들이 합작해 함께 준비하고 함께 싸운 전쟁이었다는 점이 하이라이트다.
   
   
   영웅의 추락
   
   하지만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는 아테네의 자랑인 동시에, 그리스 몰락의 서막으로 와닿는다. 국운도 시간의 흐름에 의해 변해가기 마련이다. 오를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다. 완전히 바닥에 떨어져 회복 불가능하게 되면 한 나라가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진다. 살라미스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 국운의 잣대로 느껴진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유무에 따라 아테네의 영광이 갈렸기 때문이다. 흔히들 기원전 443년 페리클레스(Pericles) 시대를 아테네 최고 황금기로 이해한다. 파르테논신전 건설에 들어간 해이다. 그러나 그 같은 시대가 열린 계기는 37년 전에 벌어진 살라미스해전의 대승리에 있었다. 페르시아를 꺾으며 아테네가 그리스 맹주로 나서면서 황금기에 들어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페리클레스의 영광은 테미스토클레스 리더십의 결과였을 뿐이다. 그러나 에게해의 작은 폴리스들이 페리클레스에게 머리를 숙이기 시작하기 직전, 이미 아테네 내부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바로 테미스토클레스의 추락이다.
   
   그리스 고대도시 마그네시아(Magnesia)는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비극적 삶의 마지막 무대쯤에 해당한다. 마그네시아는 그리스 로마 탐구와 관련해 필자가 자주 찾는 여행지다. 그리스의 다른 고대도시와 달리 교통편이 좋다. 현재 터키 동부 이즈미르(Izmir)에서 남쪽으로 10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광물 마그네슘은 지명 마그네시아에서 따온 것이다. 마그네슘의 대표적 산지가 마그네시아다. 점토에 마그네슘을 배합할 경우 강하면서도 얇고 가벼운 그릇을 만들 수 있다. 아직도 마그네시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부서진 그릇의 파편을 보면 가볍고 세련된 모습이다. 마그네슘을 섞은 고급 그릇 생산지로, 그리스 로마 당시 부자 도시로 통하던 곳이 마그네시아다. 2000년 전의 흔적만 남은 곳이지만, 아르테미스 신전을 중심으로 도시 전체가 대리석으로 치장돼 있다. 로마시대 활용됐던 2만명 수용 규모의 스타디움도 최근 발굴됐다. 말이 끄는 수레, 경마의 원조는 로마가 아니라 그리스다. 그리스부터 시작한 경마가 로마시대까지 이어졌다. 거의 매일 말 경주가 벌어지던 도시가 마그네시아다.
   
   마그네시아는 테미스토클레스 최후의 거주지다.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비운의 땅이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당시 마그네시아는 페르시아 땅이다. 아테네의 영웅이 어떻게 해서 페르시아 영토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을까.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해전 후 영웅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영광은 잠시, 곧바로 적에게 둘러싸인다. 포퓰리스트 정치가와 전통적인 육군 지지 정치가들의 반역이다. 오스트라시즘(Ostracism), 즉 도편추방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특징 중 하나다. 시민들이 모여 그릇 파편에다 독재자로 흐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의 이름을 써넣어 10년간 국외로 쫓아내는 법이다. 테미스토클레스에게 힘이 몰리자 반대파들은 오스트라시즘을 이용해 추방한다. 아테네의 영웅은 아테네 밖으로 쫓겨난다. 이후 테미스토클레스는 망명지에서 다른 폴리스를 돕는 일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 이익에 반하는 반역자로 낙인찍힌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산이 아닌 집에 있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힘세고 머리 좋은 산토끼 열 마리라도 집토끼 한 마리를 못 당한다.
   
   
▲ 기원전 4세기에 제작된 그리스 전사 입상(좌)과 ‘일리아스’의 저자 호메로스 흉상(우).

   전쟁 영웅을 단죄한 중우정치
   
   반역자 테미스토클레스를 반겨준 곳은 딱 한 군데였다. 살라미스해전에서 패한 페르시아 왕이다. 페르시아를 격파한 아테네 영웅이 페르시아 왕에게 무릎을 꿇은 채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전향’이 에게해 전체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물론이다. ‘자비로운’ 페르시아 왕은 한발 더 나아가 테미스토클레스를 지방장관으로 임명해 파견한다. 바로 마그네시아다. 그러나 망명객에 대한 예상 밖의 따뜻한 처우는 오래가지 못했다. 페르시아가 다시 아테네 공격에 나서면서 테미스토클레스를 페르시아군 지휘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과거 조국을 침략할 작전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불면의 밤이 이어졌을 것이다. 결론은 자살이다. 자신을 믿고 200척의 배를 만들어준 아테네 시민에 대한 마지막 예의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자살이 아테네 국운 하락의 출발점이라고 할 때, 아르기누세(Arginusae)전투는 아테네의 국운을 완전히 떨어트린 최후의 비극이다. 기원전 406년에 벌어진 아르기누세전투는 아테네를 지도에서 지운,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다. 서방 역사가 대부분은 ‘있어서는 안 될 그리스 최후의 비극’으로 풀이한다.
   
   아르기누세전투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인 펠로폰네소스전쟁 기간 중 벌어졌다. 아테네 독주에 반발하는 스파르타가 120척의 배를 몰고 와 에게해의 레스보스(Lesbos)섬에 포진한다. 아테네는 155척의 배를 보내 전투에 나선다. 결과는 대승리다. 아테네 배는 불과 25척이 파손된 데 비해 스파르타는 70척이 수장된다. 당시 해전에 나선 8명의 아테네 장군은 승전보를 올리며 귀환한다. 그러나 영광과 기쁨은 한순간 끝난다. 배가 파손되면서 바다에 빠진 수백 명의 아테네 전사를 방관, 결국 숨지게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장군 8명에 대한 비난이 빗발친다. 물에 빠져 죽은 전사들의 가족과 그들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비난이었다. 장군 8명은 “눈앞의 스파르타와 싸우느라 구조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숨진 병사들의 가족과 정치인들은 장군 8명 모두를 재판에 세운다. 아테네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살인죄가 적용된다.
   
   당초 장군들에 대한 용의점은 감정에 치우친 일시적 소동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대부분 금방 끝날 해프닝 정도로 예상했다. 그러나 재판이 계속되면서 살벌한 분위기로 변해간다. 가족 모두가 모여 시간을 보내는, 그리스 특유의 전통축제일이 재판 기간과 겹치면서 숨진 병사들의 가족들이 폭발한 것이다. 시민들의 동정과 정치인들의 선동이 가세하면서 장군 8명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진다. 그것도 사형이었다. 당시 재판은 그리스 법과는 전혀 무관한 감정적 차원에서 이뤄진 일종의 인민재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장군들은 처형되기 직전 아테네 밖으로 망명한다. 그러나 장군 8명 가운데 최고사령관 격이었던 인물은 나중에 체포돼 감옥에서 굶어죽는다.
   
   아르기누세 비극은 그리스 몰락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비극적 결정타다. 이 사건 이후 그리스 장군들은 적과의 싸움보다 부하들 눈치를 살피는 풍조가 생기면서 목숨을 거는 작전을 피하게 된다. 아르기누세전투 후 정확히 1년 뒤, 스파르타를 상대로 한 해전에서 아테네는 대패한다. 170척 스파르타 배에 맞선 아테네의 배 180척 가운데 160척이 수장된다. 아테네의 번영이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최후의 전투다. 아테네 시민들은 모두 스파르타의 노예로 팔려간다. 그리스의 맹주로 스파르타가 올라선 것이다. 이후 기원전 4세기 중반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면서 스파르타의 영광도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아테네의 몰락으로 막을 내린 이 모두의 역사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분명하다. 포퓰리스트 정치가들, 그리고 그들에 휩쓸리는 중우정치의 위험이다. 이러한 교훈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역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리석음이 지금도 되풀이되는 것 또한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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