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0일 쌍십일(광군제) 전야제가 열린 상하이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
지난 11월 10일 쌍십일(광군제) 전야제가 열린 상하이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

지난 11월 10일 저녁, 상하이 엑스포단지 내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 세계 최대 쇼핑축제인 ‘쌍십일(광군제)’ 전야제 공연을 앞두고 입장권은 일찌감치 매진된 터였다. 호기심에 전야제 당일 공연장 근처를 배회하다가 암표상의 도움으로 공연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1만8000석 규모의 상하이 최대 실내공연장은 야광봉을 손에 든 관객들의 열기와 함성으로 터질 듯했다. ‘국제상업올림픽’이란 사회자의 소개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쌍십일(11월 11일) 전야제는 ‘광군제’를 하루 앞둔 11월 10일 저녁부터 자정 무렵까지 유명 연예인들이 등장해 공연과 쇼, 게임 등으로 쇼핑 분위기를 띄우는 행사다. 약장수들이 약을 팔기 전 차력쇼 등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행사의 현대판이다. 이날 상하이와 항저우의 최대 방송국인 동방위성TV와 저장위성TV, 중국판 유튜브인 여우쿠는 5시간가량 이어진 공연을 생중계했다.

쌍십일 1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최종 거래액 2135억위안(약 34조원)으로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를 능가해버린 국제상업올림픽 전야제에 해외 연예인들도 대거 참석했다. 대만 출신의 일본 개그우먼 와타나베 나오미는 95㎏의 육중한 몸을 흔들며 비욘세의 ‘크레이지 인 러브’를 열창해 관객들의 혼을 빼놓았다.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팀, 호주 패션모델 미란다 커, 미국 가수 머라이어 캐리까지 차례로 등장해 무대를 장식했다.

이날 아쉽게도 한국 연예인은 사드(THAAD) 사태 후 내려진 ‘한한령(限韓令)’ 때문인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쌍십일 전야제는 한한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한류의 영향력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대표적인 것이 쌍십일 전야제의 메인 게스트들이다. 5시간의 전야제 내내 자리를 함께하며 중간중간 게임과 노래, 댄스로 흥을 돋운 연예인들은 중국의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극한도전’과 ‘달려라 형제’의 출연진들이었다.

‘극한도전’ ‘달려라 형제’란 제목에서 연상되듯 이들 프로그램은 한국의 대표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과 ‘런닝맨’의 쌍둥이 프로그램이다. 전야제 주관 방송사인 상하이 동방위성TV에서 방영되는 ‘극한도전’은 6명의 남자 연예인들이 불가능해 보이는 각종 미션에 도전하는 오락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출연진 구성이나 소재, 촬영기법 등이 무한도전과 거의 흡사하다. 무한도전의 방송사인 한국의 MBC와 해당 포맷을 정식 수입한 CCTV 측과 3자 간 국제분쟁까지 오간 프로그램이다.

또 다른 쌍십일 주관 방송사인 저장위성TV의 대표 예능프로그램인 ‘달려라 형제’는 ‘런닝맨’ 방송사인 한국의 SBS와 정식 계약을 맺고 제작협력을 통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달려라 형제’ 역시 남성 출연자 사이에 홍일점(안젤라 베이비)이 끼여 있는 출연진 구성부터 소재, 촬영기법 등이 런닝맨과 대동소이하다.

이 중 ‘극한도전’에는 한국 아이돌그룹 엑소의 중국인 멤버 레이도 고정 출연하고 있다. 레이는 엑소의 중국인 멤버였던 크리스, 루한, 타오가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 분쟁 끝에 탈퇴하고 마지막까지 잔류한 중국인 멤버다. 레이는 쌍십일 전야제에 장이싱(張藝興)이란 중국 이름으로 출연해 5시간 공연 내내 자리했다. 공연 중 레이는 최근 미국에서 출시한 신곡과 함께 특유의 파워풀한 댄스도 선보였다.

지난해 같은 자리에서 열린 쌍십일 전야제에는 엑소의 전 중국인 멤버였던 크리스가 우이판(吳亦凡)이란 중국 이름으로 출연해 솔로 공연을 펼쳤었다. 비록 2년 연속 한국 연예인은 초대받지 못했어도 한국에서 배운 춤과 노래 실력으로 무장한 중국 스타들은 건재를 과시한 셈이다.

쌍십일 전야제는 알리바바의 B2C(기업 대 소비자) 쇼핑 플랫폼 ‘톈마오(天猫·티몰)’의 이브닝파티(晩會)란 뜻에서 ‘마오완(猫晩)’이란 약칭으로 불린다. 2015년 베이징에서 1회를 시작한 이래 2016년에는 선전, 지난해와 올해는 모두 상하이에서 개최했다.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 전날 저녁 중국 관영방송 CCTV에서 생중계하는 특별공연 ‘춘완(春晩)’과 비슷하다. 다만 ‘춘완’에 중국 전통 명절인 춘절과 관련된 중국적 요소들이 농후하다면, 신흥 명절로 부상한 쌍십일을 기념하는 ‘마오완’은 철저히 상업적 요소들로 채워진다. 올해 마오완의 시청률은 18%로 대략 2억4000만명이 지켜봤다. 이런 초대형 프로그램의 곳곳에 한류 코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 지난 수년간 인기 있었던 프로그램 중에는 한국의 유명 프로그램과 거의 흡사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무한도전’과 ‘런닝맨’은 물론 ‘우리 결혼했어요’ ‘나는 가수다’ ‘아빠 어디가’ ‘복면가왕’ ‘1박2일’ ‘꽃보다 할배’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듀스 101’ 등 방송사를 가리지 않고 한국 프로그램을 모방한 프로그램이 속속 등장했다. 프로그램 포맷을 정식 수입해 제작한 것도 있지만, 개중에는 무단으로 베껴간 프로그램도 있다. 상하이의 동방위성TV를 비롯해 저장위성TV, 후난위성TV 등 지방 방송사들은 한국 프로그램 포맷을 도입해 적지 않은 재미를 봤다. 과거 한국 방송사들이 일본에서 프로그램을 베껴 만들던 시절과 흡사하다.

‘쌍십일’ 전야제 공연 장면.
‘쌍십일’ 전야제 공연 장면.

한국 아이돌 따라하기

중국의 아이돌 스타들도 점점 한국의 아이돌 스타들과 흡사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과거 중국 무술을 연상시키는 뻣뻣한 춤을 추던 가수들이 점차 기획사에서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한국 아이돌 그룹의 칼군무 스타일로 변했다. 요즘 중국의 ‘주링허우(90後)’ 가수들 중에는 한국의 남자 연예인들처럼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곱상한 얼굴이 한둘이 아니다. 춤과 외모만 보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도무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연예인들을 향한 팬덤도 한국과 유사하게 형성되고 있다. 필자 역시 이날 공연장에서 톈마오의 홍보모델이자 중국의 아이돌 그룹 ‘TFBOYS’의 멤버 ‘이양첸시’의 팬클럽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탓에 5시간 내내 괴성을 지르며 열광하는 중국 여학생 팬클럽 사이에서 귀가 얼얼해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소위 팬만 1억명에 달한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아이돌 스타 양성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아직은 한국이 중국에 비해 근소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도 점차 한국의 기획사 시스템과 유사한 체제로 아이돌 스타들을 찍어내고 있다. 여기에는 적지 않은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 종사자들이 노하우를 제공하고 있다. 나쁘게 보면 영업비밀, 기술유출이지만, 좋게 보면 한류(韓流)의 영향력 확대라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지난 10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의 아시아판 표지에 올랐다고 화제가 됐다. 하지만 13억 시장의 거대한 규모를 생각해보면 한류가 키워낸 중국의 아이돌 그룹이 타임 표지를 장식할 날도 그리 머지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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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미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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