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들)은 한결같이 국회와 야당의 비협조를 비난하며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정치를 선호한다. 실제로 여의도는 언제나 투쟁을 벌이며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킨다. 이로 말미암아 시민들도 ‘일하려는 청와대, 발목 잡는 여의도’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런 ‘여의도 발목론’에 이의를 제기하며. 우리 민주주의의 실질적 병원(病源)을 날카롭게 파고든 문제작이 있다. 바로 정치학자 박상훈의 ‘청와대 정부’(2018)다. 청와대 정부란, ‘청와대에 권력을 집중시켜 정부를 운영하는 일종의 자의적 통치체제’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는 지체되고 대통령의 불행이 반복된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국민만 바라보겠다.” 대통령이 흔히 애용하는 수사다. 하지만 국민은 다양한 시민들로 구성된다. 그중에는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민들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수시로 남발되는 이 수사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 이를 통해 대통령은 자신과 국민을 일치시키며, 국회나 야당을 ‘민심에 반하는 집단’이라고 매도하고자 한다.

이처럼 대통령은 협조를 구하기는커녕 여의도를 압박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는 정치문화 특성상 대통령을 제왕적 존재로 여기는 풍토다. 그리하여 대통령은 현실정치를 초월하여 ‘고상한’ 통치를 펼치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권력 속성상 ‘나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망상이다. 이 소박한 믿음은 현실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만 선하다’는 독선으로 변질된다.

그런 이유들은 결국 하나다. 곧 ‘제왕의 선의’다. 그것은 전제군주제의 유물이다. 실제로 대통령은 전제군주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그들은 어김없이 청와대라는 자의적 기구를 내세워 국정을 쥐락펴락한다. 더구나 현재의 청와대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청와대 정부가 근거하는 것이 그저 제왕의 선의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제왕의 선의를 타도함으로써 탄생한 제도다. 그것은 오히려 ‘완전하지 않은’ 인간을 전제로 한다. 그러기에 목적의 달성 못지않게 절차의 확립을 추구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절차가 확립되면 그 효과가 지속적이며, 장기적으로 더 큰 효율성이 발휘된다. 이런 인식을 결여하고 선의에 사로잡히면, 민주적 절차는 한낱 장식으로 여겨진다.

청와대 정부는 절차를 귀찮아하고 대통령의 선의를 신속하게 구현하려는 비민주적 욕망의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가치가 훼손되고 대통령과 국회 또는 야당 간에 불화가 생긴다. 더구나 대통령의 비호 아래 청와대 고위참모들이 실질적으로 국정을 주도하고, 장관과 방대한 정부기구는 무력화된다. 대통령은 “국민만 바라보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로 인해 장관, 부처, 국회, 정당 등으로 이어지는 제도적인 수평적 연결고리는 파괴된다. 그 대신 대통령, 청와대, 국민으로 이어지는 동원적인 수직적 연결고리가 강화된다. 대통령은 이런 수직적 관계를 선호하며 즉효성 여론정치에 매력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극렬집단이 양산된다. 그들은 통제되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익명적이다. 이로 인해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고 그 양상도 살벌해진다. 소셜미디어 환경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추긴다.

일각에서는 직접민주주의를 운운한다. 본래 직접민주주의는 시민이 ‘모두’ 참여하고, 동시에 ‘모두’ 공직을 담당하는 정치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 총회가 열렸고 공직은 추첨으로 번갈아 맡았다. 임기는 하루거나 기껏해야 1년이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는 극히 ‘일부’ 자유민만의 잔치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비민주적’이다. 지금도 직접민주주의 운운하며 참여하는 것이 실제로 극히 ‘일부’ 극렬집단뿐인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이런 ‘유사’ 직접민주주의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높을 때 위세가 등등하다. 그러나 지지도가 하락하여 수직적 연결고리가 약화되면 대통령은 일순간에 고립무원이 되고 만다. 제도적인 수평적 연결고리는 이미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적 현상은 우리 대통령제에서 이미 공식처럼 굳어져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나는 예외’라고 망상한다.

한편 우리 시민들의 뇌리에는 정당과 국회가 부정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고정관념 역시 대통령제가 만들어낸 부당한 낙인이다. 실제로 그동안 민주주의를 질식시킨 것은 국회나 정당이 아니라 바로 대통령 자신이다. 오히려 여의도는 열악한 여건을 극복하고 정권교체의 전통까지 일궈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차분히 곱씹어볼 만한 탁견이다.

대통령이 국회를 통치의 보조물로 여기고 여당을 그런 역할의 첨병으로 대하는 한, 국회는 전쟁터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여론을 장악한 대통령은 끊임없이 정치권을 비난하고 책임을 떠넘긴다. 시민들도 정치인이 감옥에 보내지고 공천에서 잘리는 것을 보며 환호한다. 이런 왜곡된 의식은 정치를 후퇴시키고 제왕적 대통령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악순환되고 있다.

청와대 정부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대통령은 선의를 독점한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그도 한 정당의 후보자로 나서서 국민의 일부(다수)의 지지로 당선된 정치인일 뿐이다. 대통령이 되어도 그런 속성이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변함없이 국회나 정당과 소통하며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오히려 그러한 현실정치가 대통령의 주업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또한 청와대는 내각에 일일이 대응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청와대가 실질적으로 내각을 통할하지만 법적인 책임은 내각이 진다. 어디서든 ‘책임지지 않는 권력’은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이고 비정치적이다. 실제로 청와대 정부는 타협을 꺼리고 독주를 고집한다. 당연히 정치는 실종되고 갈등은 증폭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시민들의 정치의식 역시 강퍅해진다.

따라서 청와대는 대통령의 필수적 보좌업무에 국한해 대폭 축소돼야 마땅하다. 그 대신에, 여당이 전면에 나서서 정책기능을 담당한다. 아울러 총리, 장관이 국정을 책임 있게 이끌도록 실권을 보장해 내각을 활성화한다. 국회나 정당을 대등한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고 협조를 구하는 일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이 청와대 정부라는 자의적 제도를 탈피하여 책임정부라는 민주적 제도를 구현하는 길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관건은 의지요, 실천이다.

‘청와대 정부’는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한마디로 그것은 우리 민주주의의 실천적 바이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민주화는 과잉되고 민주주의는 부족한 시대에 갇혀 있다. 조급한 마음에, 대통령의 선의에 박수를 치며 여의도 정치를 원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민주주의를 지체시키는 주범이 바로 제왕적 대통령의 선의와 그에 입각한 청와대 정부라는 진단은 우리에게 새로운 성찰을 선사한다.

‘일하려는 청와대, 발목 잡는 여의도’ 이미지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만들어낸 조작적 허상이다. 물론 여의도도 고칠 점이 많다. 하지만 여의도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오진(誤診)이다. 오히려 실질적 병원(病源)은 여의도가 아니라 청와대다. 청와대 정부가 폭주하는 한, 우리의 정치나 민주주의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이런 사고의 전환이 성숙한 민주주의 건설을 위한 대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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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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