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별미’ 민물털게. ⓒphoto 바이두
‘가을의 별미’ 민물털게. ⓒphoto 바이두

상하이에서 차로 1시간 반 떨어진 쿤산(昆山)에는 양청후(陽澄湖)라는 호수가 있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진 요즘 같은 주말이면 상하이와 쑤저우 사이에 위치한 이 호수를 찾는 차량들이 줄을 잇는다. 양청후에서 나오는 민물털게를 맛보러 가는 식도락 행렬이다.

‘다자셰(大閘蟹)’라고 불리는 이 털게는 상하이 일대에서 알아주는 가을철 별미다. 상하이 일대 호수와 강에서는 어디든 털게가 나오지만, 그중 양청후에서 나오는 것을 최고로 친다. 9월은 암게, 10월은 수게라고 하지만, 미식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철은 찬바람이 제법 매서워지는 11월이다. ‘홍루몽’에서도 언급되는데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 불리는 국화가 피는 이맘때 붉은 빛깔이 감돌게 쪄낸 털게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황주(黃酒)를 곁들이면 고관대작도 부럽지 않다.

요즘 상하이의 고급 중식당에도 어딜 가나 털게 사진이 붙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상하이 푸저우루(福州路)에 있는 왕보화주가(王寶和酒家)란 중식당이다. 왕보화주가의 모태는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44년, 황주로 유명한 저장성 샤오싱(紹興) 출신의 왕계신(王桂臣)이란 상인이 연 술도가다. 샤오싱에서 황주와 함께 민물털게를 쪄서 팔던 왕씨의 후예들은 민국(民國) 시절 상하이 푸저우루까지 진출해 털게요리로 대히트를 쳤다.

1949년 공산당이 상하이를 접수하면서 공사(公私) 합영으로 바뀌고, 문화대혁명 때 ‘상하이주점’으로 간판까지 바꿔 다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털게요리의 독보적 명성은 수백 년째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개혁개방과 함께 한창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1999년에는 상하이 난징루 한복판에 왕보화대주점이란 호텔까지 열었고, 2009년에는 바로 옆에 상하이대주점이란 또 다른 5성급 호텔까지 세웠다. 베이징에도 ‘왕보화 1744’라는 고급 털게식당을 열었다.

지금은 주력이 왕보화주가에서 고급요리를 파는 왕보화대주점으로 바뀌었는데, 난징루의 왕보화대주점은 그 외관이 마치 털게의 속살을 빼먹는 집게와 같이 생겼다. 털게요리 하나로 ‘중화제일가(中華第一街)’라고 불리는 난징루에 호텔을 두 개나 세울 정도가 됐으니 털게로 일가를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보화대주점에서는 매년 가을 털게철이면 모든 요리를 털게와 그 부산물로 만들어 ‘게 연회’라고 불리는 ‘해연(蟹宴)’을 선보인다. ‘해연’은 2013년 ‘상하이시 비(非)물질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데, 최근 해연을 직접 체험해볼 기회가 있었다.

‘상하이에서 게를 맛보는 최고의 집’이란 뜻의 ‘호상품해제일가(沪上品蟹第一家)’란 편액이 내걸린 식당에 들어가니 털게를 맛보러 온 손님들로 가득했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지 털게를 해체하는 영문설명서까지 비치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치과 도구처럼 생긴 털게 해체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어설프게 털게를 해체하고 있으니, 여종업원이 다가와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해체를 거들어줬다. 집게로 털게의 살과 누런 알을 빼먹으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황주를 곁들이니 ‘과연’이란 말이 절로 나왔다.

상하이 푸저우루의 왕보화주가. ⓒphoto 백춘미
상하이 푸저우루의 왕보화주가. ⓒphoto 백춘미

방중한 일왕의 식탁에 털게가 빠진 이유

1992년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상하이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장쩌민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초청으로 중국을 찾은 아키히토 일왕은 베이징과 시안을 거쳐 마지막 방문지로 상하이를 들렀다. 상하이 출신 장쩌민을 배려한 일정이었다. 일왕의 방중 당시 중국은 1989년 천안문사태의 여파로 국제사회의 비난과 대중투자 중단으로 개혁개방이 좌초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 이후 20년 만에 성사된 아키히토 일왕의 방중은 개혁개방의 지속을 대내외에 알리고 중국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일왕을 위한 만찬장은 상하이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화이하이루의 신금강대주점 41층 회전식당이었다. 당시는 황푸강 동쪽 푸둥(浦東)에 마천루들이 들어서기 전으로 1990년 개관한 신금강대주점은 당시 상하이의 최고층 빌딩이었다. 개혁개방 직후 상하이의 발전상을 보여주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마침 일왕이 방중한 시기는 10월 말로 털게의 살이 차오르는 때였다. 일왕 일행을 무슨 요리로 융숭히 대접할까 고민하던 상하이시 당국은 일왕의 만찬상에 털게를 올리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상하이를 찾은 일왕 일행의 만찬상에 털게는 결국 올라가지 못했다. 일본에서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대접받아온 일왕이 털게를 해체한 뒤 통통한 살과 누런 알을 빨아먹는 장면이 사진 등 기록으로 남을 것을 우려한 일본 측의 반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만찬상에 털게가 올라왔다면 상하이의 중식당에는 털게 살을 빼먹는 일왕의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양청후는 중국 강남 지역에 흔하디 흔한 호수 중 하나다. 중국 최대의 공업벨트인 상하이와 쑤저우 사이에 있는 담수호에서 양식되는 털게의 품질에 조금 의문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털게가 양식과 가공 과정에서 항생제와 공업용 세척제 등 각종 발암물질에 노출됐다는 뉴스도 과거에 나온 적이 있다. 대부분 양식으로 키우는 터라 굳이 양청후까지 안 가도 털게를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쑤저우의 타이후(太湖)를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풍광 좋은 호숫가 옆 식당에는 군데군데 털게를 뜻하는 ‘게 해(蟹)’ 자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로 바다만큼이나 너른 타이후에서 자라는 털게는 양청후 털게보다 덩치는 더 크지만 가격은 저렴하고 맛은 별반 차이가 없다. 요즘 대형마트에서는 타이후산 털게가 양청후산보다 더 많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양청후산 털게를 워낙 알아주는 터라 타이후 등 인근 호수에서 길러진 털게를 양청후산으로 속여 파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털게의 외관상 구별은 사실상 불가능한데, 인근의 다른 호수나 강에서 잡아온 털게에 ‘양청후’라는 이름만 붙이면 몸값이 배 이상 뛰어오른다.

양청후 수질관리를 위해 진짜 양청후산 털게의 생산량은 2016년 2100t에서 지난해 1600t, 올해 1300t으로 매년 줄어들고 있다. 수년 전부터는 가짜 양청후 털게 유통을 방지하기 위해 게다리에 진위감별 라벨까지 붙여서 유통 중인데, 이 진위감별 라벨조차 가짜가 대량으로 유통된다고 한다. 양청후 털게의 생산량과 시중 유통량을 비교해 “양청후 털게의 99%는 가짜”라고 결론 내린 중국 현지 언론 보도도 있었다.

서해산 꽃게나 동해산 대게 혹은 러시아산 킹크랩 같은 바다에서 나는 게를 주로 접하는 한국인들은 사실 민물털게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 값비싼 양청후 털게를 대접받으면서도 덩치도 조그맣고 사실 먹을 것도 별로 없는 털게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요즘 상하이의 한국 교민들 사이에서도 가을이면 양청후 털게를 공수해 먹는 집이 점점 늘고 있다. 결국 ‘가을의 별미’라는 것도 두둑해진 주머니에 입소문이 결합돼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계속될수록 양청후 털게의 몸값 역시 나날이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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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춘미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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