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사회의 ‘시국선언’이나 ‘공동성명’ 같은 집단행동은 보통 정부 권력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는 방법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전 세계를 휩쓸며 여성 인권 문제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과 관련해서 서구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지지 선언을 했다. 프랑스 대표 일간지 르몽드지에 지난 1월 남성 지식인 30여명이 “미투 캠페인의 지지에 공개적으로 동참하라”고 기고문을 실은 것이 대표적이다. 크고 작은 사회적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지식인들은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서 사회의 ‘길잡이’ 역할을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지식인이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여론이 확 변화하거나 정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식인의 목소리는 사회에 일정한 방향을 제시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 진보 진영 지식인들이 줄기차게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시국선언을 했던 이유는 그 자체가 위력적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 대중의 생각과 행동에 길잡이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내외적으로 늘상 혼란을 겪고 있는 미국 트럼프 정부하에서도 지식인들은 줄기차게 집단발언을 하고 있다. 한국 사회 역시 못지않은 이슈가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지식인 사회는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가 변한 것일까.

최근 만난 A 교수에게서는 뿌리 깊은 무력감 같은 감정이 느껴졌다. 정년퇴임을 5년 앞둔 A 교수는 전공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인물 중 하나다. 존경받는 스승이자 ‘지식인’으로 대접받으며 지낼 것 같던 A 교수는 그러나, 자신의 직업과 업무를 단조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관성처럼 연구실을 오고 갑니다. 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저들이나 나나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식인이라고요? 그저 제 분야에서 오래 머무른 전문가 정도일 뿐이죠. 저뿐 아니라 이제 더 이상 지식인은 없습니다.”

종종 언론이나 학회 등에서 전공 분야에 대해 발언할 기회가 생길 때도 있다. 예전에는 교수 직함을 달고 공적인 자리에 나가면 모두가 자신에게 답을 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전문가로서 자리를 채워주는 존재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제 발언 한두 마디가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 거라 생각하지도 않아요. 강단에 서는 동료들 중에는 우리가 예전과 같은 지식인이 아니라고 냉소적인 자세를 취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저 개인적 만족감을 위해 강단에 서고 발언할 뿐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의무감을 가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A 교수의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발언은 지금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요즘 들어서는 누가 지식인인지, 지식인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일조차 고루하게 여길 때가 많다. 아예 “지식인은 없다”고 선언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지식이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닌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인(知識人)과 같은 발음을 가진 한국 최대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지식iN’은 모호한 경계를 더욱 흐트러트렸다. 누구나 질문에 대답할 수 있고 누구든 정보를 구할 수 있는 지식iN은 지식인을 대체했다.

지식인을 대체한 지식iN

우선 지식인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지식인은 전문가와 다르다. 지배층과도 다르다. 사실 유사 이래로 수많은 학자들이 지식인을 정의하기 위해 말을 덧붙여온 만큼 단정 지어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여러 학자들이 내린 지식인에 대한 정의에서 공통점을 찾아볼 수는 있다. 지식 자체가 권력으로 사용되던 근대 이전의 지식인은 무지한 대중을 깨우치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대 이후는 다르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핵무기의 연구와 사용에 빗대어 지식인에 대해 설명했다. 책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그는 핵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핵분열을 연구하는 사람은 지식인이 아니라 그저 학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대신 핵무기를 만든 학자가 핵무기의 파괴적 능력을 목격하고 “핵무기 사용을 억제하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회합을 갖고 선언문에 서명할 때 그들은 비로소 지식인이 된다”고 했다.

지식인이 단순히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의견은 수도 없이 많다. 누구나 쉽게 정보를 획득할 수 있고 지식(知識)이 더 이상 특정인의 소유물이 아니게 된 지금도 그렇다. 지난해 별세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예전처럼 대중을 계몽하고 사회의 기틀을 마련하는 지식인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대신 현대의 지식인은 전문가와 대중 간의 소통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인물이다.

말하자면 지식인은 어떤 식으로든 전문적 지식을 사회 내에서 풀어쓰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지식인의 범위는 인문·사회학에 그치지 않는다. 꼭 논쟁적인 역할만이 지식인의 역할이 아닐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 반드시 갈등을 조정하거나 합의를 도출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화를 하건, 글을 쓰건, 누군가를 가르치건 사회에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연과학자, 공학자도 지식인으로서 책임감을 갖는다. 사이드에 따르면 지식인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이고 완전할 수 없는 존재다. 늘 사회를 향해 열려 있고 어떤 역할이든 자신의 몫을 수행한다.

완전히 다른 두 지식인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지금 한국의 ‘지식인’에게서 그런 열린 자세를 찾아보기 쉽지 않다. 지식인 사회를 가만히 관찰하다 보면 크게 두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갑내기인 B 교수와 C 교수는 비슷한 시기에 대학에 자리 잡은 중견 교수다. 한 사람은 정치학, 한 사람은 사회복지학으로 연구 분야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서로 교류한 적은 없지만 알고 보면 닮은 부분이 무척 많다. 어릴 때부터 영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 비슷한 시기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정교수 자리에 오른 지 오래됐다. 둘 다 서울 서초구 비슷한 가격대의 아파트에 살고 있고, 고급 외제 세단을 몰고 다니며, 자식들을 모두 유학 보냈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확연히 다른 점도 있다. 방문객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다.

B 교수가 연구실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은 편이다. B 교수가 쓰고 있는 감투가 여럿 되는데 관련 일정을 다 따라다니다 보면 연구실에는 얼굴도 못 비추는 날이 많다. 연구실에 앉아 있는 시간에는 언제나 문을 살짝 열어두는 편이다. 상당히 많은 방문객이 연구실 문을 드나들기 때문이다. 그는 언론에서도 인기가 있다. 기자들은 취재 내용에 대해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것을 두고 ‘멘트를 딴다’고 표현하는데 멘트를 따기 쉬운 교수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방문객을 맞다가 전화를 받는 일은 일상이다.

“지식인으로서 내 역할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연구실에 처박혀서 글만 끄적이는 건 배우고 익힌 지식인이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쓰임이 있는 곳에서 사회에 보탬이 되도록 활동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B 교수도 자신이 학생 지도와 같은 교수의 ‘전통적’인 역할을 잘 수행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지식인은 단지 책 열심히 읽고 글 열심히 쓰면 되는 백면서생과는 다릅니다. 일각에서는 저처럼 목소리를 많이 내는 교수들을 비판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인과 백면서생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 중 하나는 사회적 책임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저는 제가 필요한 곳에 기꺼이 찾아갑니다.”

C 교수의 생활은 바쁘지만 단조로운 편이다. C 교수가 일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연구활동이다. 그는 ‘실적’이 좋은 교수 중 하나다. 학술지에 논문을 자주 싣는 편이다. 강의 평가도 나쁘지 않다. 주로 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보니 대개 접하는 사람이라곤 학계 동료, 대학원생이다. 그는 교수가 학교 밖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학자의 본분은 연구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잘 전달해야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대중을 위한 학문을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죠.”

그는 종종 전공 분야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언론인, 시민들의 연락을 받곤 하지만 거의 응답하지 않는다고 한다.

“멋모를 때 한 번 기자의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가 제가 의도한 바와 상관없이 인용이 된 경험을 하고 난 뒤에는 언론의 요청을 일절 다 거절하고 있어요. 가끔씩 일반인들이 저에게 이것저것 묻는 메일을 보내기도 하는데 함부로 대답해줬다가 ‘어느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더라’ 떠돌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편입니다. 대신 논문을 열심히 써내고 학생 지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저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어떤 지식인이 바른 지식인인가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답은 확연히 달랐다. 이 간극이 지금 우리 지식인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대중과 매우 멀거나 매우 가까운 지식인, 그 사이에 놓인 지식인은 극히 적다.

지난 11월 19일 홍콩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찬킨만 홍콩중문대 교수, 베니 타이 홍콩대 교수 등이 홍콩 법원에 재판을 받으러 출석하며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노란 우산을 들어보이고 있다. ⓒphoto AP
지난 11월 19일 홍콩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찬킨만 홍콩중문대 교수, 베니 타이 홍콩대 교수 등이 홍콩 법원에 재판을 받으러 출석하며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노란 우산을 들어보이고 있다. ⓒphoto AP

특수성을 강화하는 엘리트주의자들

최근 들어 눈에 띄는 지식인 유형 중 하나는 ‘더욱 폐쇄적인’ 지식인이다. 원래 지식인, 특히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형성 과정에서부터 폐쇄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식인 사회에 편입하려면 일반 대중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 경험이 지식인만의 폐쇄적인 사회를 만들었다. 사회학자 김종영 경희대 교수가 쓴 ‘지배받는 지배자’(돌베개)에서는 미국 유학이 폐쇄적인 한국 지식인 사회를 만드는 주요한 과정이라는 점을 짚는다.

한국 지식인의 대다수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 김종영 교수가 2015년 후기 사회학대회에서 발표한 바를 보면 당시 조사 대상이 된 사회학과 교수 236명 중 82%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교수가 된 사람은 전체의 28.5%에 그친다. 이 수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그저 ‘한국 학계는 미국 학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정도로 마무리될 만한 일이다. 여기에 숨어 있는 의미도 파악해야 한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이 많다는 것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김종영 교수의 책을 따라가자면 미국으로 유학 간 학생들은 거의 대다수 처음에는 언어 때문에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다. 한국에서는 마냥 수재 취급을 받다가 넓고 새로운 환경에서 열등한 유색 인종으로서 적응하느라 허덕이는 경험을 하고 나면 한국과 미국의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김 교수는 미국 유학생들이라면 공통적으로 미국 대학의 우수성과 미국 학계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미국 대학과 학문에 대해 “존경, 찬사, 경외, 사랑” 같은 감정까지 느낀다고 말한다. 마치 남성들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군대를 다녀왔지만 군생활에 대해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감정을 갖는 것처럼 한국 지식인들도 미국 유학생활을 비슷하게 기억한다는 얘기다.

이런 한국 지식인들은 일반 대중은 알 수 없는 동지의식 같은 것을 공유하면서 폐쇄적인 문화를 만든다. 지식인에 대한 일반 대중의 존경심이 줄어들고 지식인 사회가 홀대받을수록 폐쇄성은 더욱 커지기도 한다. 지방 사립대에서 언론정보학을 가르치는 D 교수의 설명이다.

“대중들은 일종의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지식인들만의 공고한 공동체를 강화하고 있고 자신들만의 언어로 자신들만의 지식 체계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지식은 일반적인 언어로 풀어쓴,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수준의 정보에 불과합니다. 다만 스스로 지식인에 접근해 있다고 착각할 정도는 되지요.”

우리는 보통 지식인의 위기는 정보 환경의 변화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누구나 쉽게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지식인만의 ‘특별한 지식’이 사라졌고 자연히 지식인의 특수한 위치도 해체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이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의 특수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진짜 지식과 가짜 지식을 구별하는 것이 그중 하나다. 1990년대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 대학에 자리 잡은 E 교수는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진짜 지식을 찾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유통되는 사회에서 대중들은 자신도 마치 지식인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니 발언의 기회도 공평하게 주어지죠. 그러니까 진짜 지식인과 가짜 지식인을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진짜 지식을 찾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대중들과 어떻게 나눌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다소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대중들의 시민의식이 좀 더 깨어나야 합니다. 자신들이 접하는 지식이 진짜 지식이 아닐 수 있다는 비판적인 자세가 없는 한은 지식인과 대중 간의 괴리는 점점 더 커질 겁니다.”

지식인이란 특별한 교육 과정을 거쳐 일반인들이 갖추지 못한 일정한 자격을 갖추고 그들이 미처 깨우치지 못한 것을 깨우친 사람, 다시 말해 이전의 계몽적 지식인과 같다는 얘기를 하는 셈이다.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지식인은 지식인의 자격을 새롭게 세우기도 한다. 대중들은 못 겪어본 유학 경험, 이를 통한 동료의식, 폐쇄적인 교수 임용 과정 등을 통해 ‘엘리트주의자 지식인’이 새롭게 탄생한다. 이들은 다시금 대중을 계몽되지 못한 집단으로 본다. 다만 이전의 계몽적 지식인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대중을 계몽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대중과의 소통은 또 다른 지식인 유형 ‘포퓰리스트 지식인’이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을 잃어가는 포퓰리스트 지식인

원래 포퓰리즘·포퓰리스트라는 단어는 지금처럼 두루 쓰이는 용어가 아니다. 책 ‘포퓰리즘’을 펴냈고, ‘포퓰리즘의 세계화’의 해제를 맡으며 포퓰리즘 연구에 천착해온 서병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원래 매우 복합적이고 정치적인 단어다. 다만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몇 가지 특성을 그대로 닮았다는 측면에서 비유하자면 ‘포퓰리스트 지식인’과 같은 용어도 쓸 수 있다.

포퓰리스트의 특징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스트에게는 아군과 적(敵)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데, 대중에 쉽게 영합하기 위해서 포퓰리스트는 단순하게 세상을 대립적인 세계로 설명해버린다. 포퓰리스트에게 적이란 기득권층이다. 심지어 우파 포퓰리스트까지도 기득권층과 기득권층에 논리를 제공하는 지식인들을 공격한다. 기득권층이 적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득권층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 예를 들면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 같은 계층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분법적인 사고관은 포퓰리스트 지식인에게도 매우 잘 드러나는 모습이다. 포퓰리스트로서 지식인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진영을 구분한다. 좌·우 같은 이념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 원인과 결과를 매우 쉽게 설명하면서 포퓰리스트 지식인은 기존의 지식인들에게 불만을 갖는 대중들에게 논리를 제공해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 누구보다 성공한 경제 엘리트지만 결코 엘리트다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아군과 적이 뚜렷이 구분되는 쉬운 논리를 제공한다. 마치 그처럼 포퓰리스트 지식인들도 대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더욱 쉽고 더욱 간단하게 세상을 설명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던 ‘해석해주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복잡한 세상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게 아니라 단순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포퓰리스트 지식인은 생존을 위해 대중에 영합한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대학은 더 이상 학문의 터전이 아니라 경쟁의 전쟁터가 된 지 오래다. 교수들은 매년 점수를 획득해 일정 기준을 넘지 않으면 해고될 위기에 처해 있다. 대학도 좀 더 많은 학생을 유치해 좀 더 많은 돈을 벌지 않으면 살아 남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은 대중에게 더 친근하고 쉽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는 “포퓰리스트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지식인의 본질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미디어에서 단골손님으로 등장했던 황상민 전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배명진 숭실대 전자정보공학부 교수가 연구활동 이외의 대외활동으로 인해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던 사실을 떠올려보자. 포퓰리스트 지식인은 경쟁사회에서 여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한다. 최근 3년 사이 1편의 논문을 발표했지만 다섯 손가락 넘는 대외 직책을 맡고 있는 B 교수도 마찬가지다. 그가 대외활동으로 얻는 수익은 상당하다. 각종 미디어에서 청탁해오는 원고료, 단체의 강연료 등까지 포함하면 종종 본업만큼이나 부차적인 수익을 올리는 때도 있다.

이 두 유형의 지식인 모두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다. 꼭 모든 지식인이 사회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발언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식인이라면 본연의 활동, 그러니까 연구활동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 지식인이라면 학문과 자신의 위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에게서는 이 같은 모습이 보이는 경우가 많다. 보수 정권을 거치면서 진보 진영의 지식인 중에는 학문과 사회를 잇는 작업에 열중하며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한 사람이 많다. 지난해 보수 언론들까지 올해의 책으로 꼽기를 서슴지 않은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소수자 집단과 인권 문제에 천착해온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의 저서다. 김 교수만이 아니다. 저술활동이나 사회참여 활동을 통해 진보 지식인들은 지식인의 지지와 해설, 참여를 요구하는 대중의 요구에 응답해왔다.

반면 보수를 자처하는 지식인에게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은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보수적 발언을 거침없이 하는 언론정보학과 F 교수는 외부에 자신의 의견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일을 꺼리는 편이다. G 교수는 현실정치와 학교 사이를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더러는 아예 이분법적인 논리로 좌·우, 선·악을 손쉽게 갈라버리는 포퓰리스트 지식인의 모습을 짙게 드러내는 상황이다.

지식사회의 변화, 정보네트워크의 발달 같은 수많은 외적 요소가 지식인 사회를 흔들어대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시대에서든지 지식인은 자신의 역할을 깊이 고민해온 집단이라는 점이다. 능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지식인의 태도를 강조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을 읽어봄 직하다.

“내 생각에 가장 비난받아 마땅한 지식인의 사고 습관은, 옳은 일인 줄 알지만 선택하기는 어려운 원칙적 입장에서 등을 돌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습성입니다. 당신은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비쳐지기를 원하지 않으며, 논쟁적인 사람으로 보이기를 두려워합니다. 상관이나 권력자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고, 균형 있고 객관적이며 온건한 인물이라는 평판을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은 부름을 받고 자문 역할을 수행하며 이사회나 명예로운 위원회의 일원이 됨으로써 책임 있는 주류로 남는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은 명예 학위나 큰 상, 어쩌면 대사직까지도 얻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 습관은 지식인을 타락시킵니다.” (‘지식인의 표상’ 115쪽)

지식인이 말하는 지식인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은 누구에게서도 지식인의 역할을 위임받은 적이 없지만, 지식인이 한 사회의 부산물인 만큼 사회의 모순이 곧 지식인의 모순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지식인은 양면적인 존재다. 지식인이라는 이름에 걸맞기 위해서 문화 생산자는 두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지식인은 지적으로 자율적인 세계, 즉 종교·정치·경제 등의 힘에 종속되지 않은 세계에 속해야 하며 그 세계의 특별한 법칙을 준수해야 한다. 둘째, 지식인은 지적 영역에서 획득한 자신의 특별한 능력과 권위를 반드시 지적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활동에서 드러내야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

“지식인이란 갈등조정자나 합의도출자가 아니다. 지식인은 자신의 온몸을 비판적 감각에 내거는 존재, 즉 손쉬운 공식이나 미리 만들어진 진부한 생각들 혹은 권력이나 관습이 으레 말하고 행하는 것들을 거부하는 감각에 실존을 거는 존재다. 그저 수동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향해 거부를 적극적으로 밝히는 존재다.”

자료 : ‘지식인’ 이성재·책세상, ‘지식인의 표상’ 에드워드 사이드·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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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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