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6일 스위스 융프라우 아래 알레치 빙하에 ‘지구를 구하자’는 대형 포스트카드가 새겨져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11월 16일 스위스 융프라우 아래 알레치 빙하에 ‘지구를 구하자’는 대형 포스트카드가 새겨져 있다. ⓒphoto 뉴시스

트럼프 미 대통령이 기후변화에 의한 미국의 피해 가능성을 분석한 연방정부의 최근 공식 보고서를 ‘믿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로 묵살해버렸다. 기후변화 논란이 환경 관리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미국에 떠넘겨서 미국의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려는 중국과 같은 비양심적인 국가들의 음모일 뿐이라는 것이다. 미국 언론이 발끈했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미국의 대통령이 명백한 ‘과학’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허한 ‘친환경’의 환상을 핑계로 우리 과학의 힘으로 개발한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기술을 포기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단호하게 거부해버린 보고서는 국립해양대기국(NOAA)을 비롯한 13개 기후변화 관련 연방기관들이 300명의 과학자를 동원해서 완성한 1600쪽 분량의 ‘제4차 기후변화 평가서’다. 미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1000명의 데이터 분석 전문가들이 수집한 자료를 면밀하게 분석한 결과를 담고 있다. 1990년에 제정된 ‘기후변화연구법’에 따라 연방정부가 4년마다 발간하는 초당적 성격의 정례 보고서이기도 하다. 그런 보고서를 하필이면 예정을 한 달이나 앞당겨 추수감사절 이튿날이고 ‘블랙프라이데이’로 어수선했던 지난 11월 23일에 공개한 것도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구온난화에 의한 기후변화는 이미 상식으로 알려진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4차 기후변화 평가서’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20세기 이후 지구의 평균기온이 섭씨 1도나 상승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온실가스 배출을 비롯한 인류의 활동이라는 결론이 핵심이다. 다른 대안적 원인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온실가스 과다 배출의 폐해가 광범위하고 심각하다는 것도 중요한 결론이다.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올라가고, 바다가 산성화되고, 대기 중의 수증기가 늘어난 것도 모두 인류의 활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상황은 절박하다. 온실가스 배출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계속된다면 세기말의 기온은 무려 섭씨 5도 이상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해수면이 2m 이상 올라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걸프만 지역의 해안은 대규모 침수를 피하기 어렵게 된다. 미국 전역에서 기후변화에 의한 자연환경 피해가 심각하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보고서의 암울한 주장이다.

기후변화가 미국인의 삶에 미치게 될 영향은 더욱 충격적이다. 무분별한 온실가스 배출에 의한 기후변화의 영향이 단순히 자연환경의 훼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미국인의 거주와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고 한다. 농업과 수산업,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 국토·수자원의 활용, 교통, 보건, 의료, 복지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영향이 나타난다.

세기말 기온 5도 상승할 것

보고서에 담긴 과학자들의 예측은 공포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기말이 되면 폭염·폭우·허리케인과 같은 극한 기상에 의한 사망자가 2000명을 넘어설 것이고,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성 질병도 크게 늘어나게 된다. 미국의 남동부에서는 무더위로 근로자의 노동시간을 큰 폭으로 줄일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자연환경과 기후조건에 민감한 농업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다. 중서부의 옥수수와 남부의 콩이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수확량이 25% 이상 줄어든다. 역시 자연조건에 민감한 낙농·목축에서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다.

산불 피해도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캘리포니아는 지금도 건조한 사막지대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산타아나 계절풍’ 때문에 발생하는 대규모 산불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시에라네바다산맥의 산자락에서 발생해 무려 17일 동안 계속됐던 ‘캠프 화재’의 피해는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최소 85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고, 249명의 주민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서울 면적에 해당하는 620㎢의 숲과 1만4000여채의 건물이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런 산불이 앞으로 6배나 더 늘어나고, 피해 면적도 2배 이상 커진다. 미국 전체가 거센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는 뜻이다.

경제·환경·건강·복지 부문에서 발생하는 피해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매년 수천억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 특히 농업 분야에서의 피해가 극심할 것이다. 자칫하면 미국의 GDP가 성장은 고사하고, 10% 이상 줄어들 것이라는 엄중한 경고도 있다. 피해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이게 된다는 지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공개된 보고서에는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 담겨 있지 않다. 의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따라 보고서를 발간하지만, 개인적 신념을 앞세워 과학을 무시하는 대통령의 의중을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고서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보고서에서는 파리기후협정에서 탈퇴해버린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 결정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느껴진다. 오늘날 미국은 기후변화에 대한 전 지구적 대응 노력을 거부하는 유일한 국가가 돼버렸다.

인간의 온실가스 배출에 의한 기후변화는 이제 아무도 쉽게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다. 현실에 대한 과학적 진단을 거부하면 치유의 길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추수감사절 동안 미국 동부가 이례적으로 추웠다고 해서 지구온난화를 부정할 수는 없다. 기후의 변화는 일시적 기상 현상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겨울이 점점 더 추워지는 것도 지구온난화의 결과다. 역설적이지만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다.

치유를 위한 노력은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 지구적 기후변화 대응 노력을 선도하고 있는 UN 산하의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가 지난 10월에 채택한 ‘특별보고서’(SR)를 통해 과거 어느 때보다 공격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2100년까지 지구의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대비 섭씨 1.5도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면적에 해당하는 620㎢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미국 캘리포니아의 ‘캠프 화재’. 미 연방정부가 발간한 ‘4차 기후변화 평가서’는 지구온난화를 막지 못하면 앞으로 이런 대형 산불이 6배나 더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photo 뉴시스
서울 면적에 해당하는 620㎢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미국 캘리포니아의 ‘캠프 화재’. 미 연방정부가 발간한 ‘4차 기후변화 평가서’는 지구온난화를 막지 못하면 앞으로 이런 대형 산불이 6배나 더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photo 뉴시스

기온 0.5도 낮추면 1000만명 구한다

물론 분명한 이유가 있는 제안이다. 2100년까지 온도 상승의 목표를 0.5도 낮추면 1000만명의 사람들이 해수면 상승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전 지구적으로 수억 명의 인구가 식량 생산의 감소에 의한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되고, 수질 오염에 의한 식수 부족에 노출되는 사람도 절반 정도로 줄어든다. 그뿐이 아니다. 여름철 북극의 빙하가 녹을 가능성도 10배 이상 줄어든다. 그래야만 영구동토층의 해빙으로 발생하는 치명적인 온실가스 추가 배출의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멸종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산호의 생존 가능성도 높아진다.

물론 더 강화된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쉬울 수는 없다. 전 지구적으로 모든 부문에서 신속하고 광범위하면서도 적극적이고 전례 없는 변화의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온실가스의 배출을 훨씬 더 공격적으로 줄여야 한다. 2030년까지는 2010년 대비 최소 45% 감축해야 하고, 2050년에는 ‘순(純)제로 배출(net-zero emission)’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우리가 대기 중으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도 적극적으로 회수해야 한다. 적어도 인간에 의해 대기 중의 온실가스가 더 이상 늘어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온도 상승을 섭씨 1.5도 이하로 유지할 수 있다.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은 말로만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1.5도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2035년까지 2700조원에 이르는 투자가 필요하다. 에너지·산업·건물·교통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의 획기적인 기술 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의 에너지 수급 방식을 확실하게 바꿔야 한다. 2030년까지 석유 의존도를 2010년 대비 40% 가까이 줄여야 한다. 2050년까지 1차 에너지 공급량의 절반 이상과 전력 생산의 85%를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만 한다. 대기 중 온실가스 회수에 막중한 역할을 하는 산림의 보호와 복원에도 많은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

여전히 더욱 적극적인 기술 개발이 필요한 ‘미래의 에너지’인 태양광·풍력만 대안이라고 할 수는 없다. 20세기에 인류가 개발한 ‘현재의 에너지’인 원자력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물론 원전의 안전을 위한 더욱 적극적인 투자와 더욱 확실한 국민적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도 전 지구적인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파리기후변화협약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이미 우리는 2012년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배출전망치 대비 37%를 감축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자발적으로 약속을 해놓은 형편이기 때문이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을 견뎌내야 한다. 석탄·천연가스 중심의 전력생산 방식과 함께 산업구조와 우리의 생활방식도 근본적으로 바꿔야만 한다.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고, 개인 차원에서도 적지 않은 부담과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미국과 같은 국력(國力)과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쇠고집을 기대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우리의 현실은 참담하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영국·프랑스와 같은 선진국들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13~30%까지 줄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우리의 배출량은 거꾸로 24%나 늘어나버렸다. 말로만 ‘녹색성장’을 외치고 현실적으로는 과격한 ‘역주행’을 거듭했다는 뜻이다.

온실가스 역주행하는 한국

에너지 전환을 강조하는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좁은 국토와 열악한 자연환경을 무시하고 맹목적으로 태양광·풍력 광풍(狂風)에 휩싸여 있다. 값싼 중국산 태양광 패널을 이겨낼 수 있는 기술력도 갖추지 못했고, 그렇다고 선진국에 수출할 정도의 품질을 가진 패널 생산 기술을 확보한 것도 아니다. 더 이상의 기술 개발도 기대하기 어렵다. 20년 동안 수익을 보장해주고, 시설 폐기의 책임까지 면제해주는 현재의 제도가 문제다. 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이 더 효율적인 신기술 수용을 거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40년 동안의 무사고 안전 운전 경험과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설계·건설·운전 기술력을 통째로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성급한 탈원전정책도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탈원전의 명분을 ‘위험한 개도국형 기술’ 때문이라고 만천하에 밝힘으로써 원전 수출의 가능성도 확실하게 막아버렸다. 맹목적인 탈원전과 태양광·풍력 확대로 온실가스 배출량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부족한 전력을 충당하고, 가동률이 15% 수준인 태양광·풍력의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해 석탄과 LNG 발전의 비중을 확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미세먼지도 걸림돌이다. 미세먼지를 핑계로 연비가 좋아 온실가스 배출량이 더 적은 경유차를 LNG와 LPG 차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미세먼지가 정말 경유차 때문이라는 확실한 과학적 근거는 없다. 전기차가 사용하는 전력을 생산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우주의 75%를 채우고 있다는 황당한 궤변을 앞세운 수소에너지도 아직은 먼 훗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과학이 기후변화의 깊은 늪에 빠진 인류를 구해줄 수 있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개인적 신념이나,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비어 있는 맹목적인 친환경의 구호는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없다. “악령(惡靈)이 출몰하는 세상에서 오로지 ‘과학’만이 우리에게 ‘희미한 등불’이 되어줄 수 있다”는 노벨상 수상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주장을 믿어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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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환 서강대 교수·에교협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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