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임상시험이 이뤄지는 도시다. 한국임상시험산업본부가 지난 1월 밝힌 바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전 세계 임상시험 점유율 순위에서 서울은 1.4%로 1위를 차지했다. 2위인 미국 휴스턴(1.0%)을 큰 차로 따돌렸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는 임상시험이 줄어들고 있다. 2017년 상반기에만 전년 대비 21%가 감소했을 정도다. 그러나 서울에서 이뤄진 임상시험은 오히려 늘어났다. 전체 임상시험 건수가 658건으로 2016년 628건에 비해 늘었다.

다른 도시보다 서울에서 이렇게 많은 임상시험이 이뤄지는 이유를 분석하기 전에 임상시험이란 무엇인지부터 바로 알 필요가 있다. 대개 임상시험을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효능과 부작용을 알아보는 단계’라고 간단하게 정의하곤 하는데 사실 임상시험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지자면 족히 10년은 걸리는 일이다.

임상시험은 후보물질을 발굴해 임상시험 계획을 신청한 후 1상, 2상, 3상을 거쳐 이뤄진다. 1상에서 ‘상’이란 단계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phase’을 번역한 단어다. 보통 1상에서는 수십 명의 건강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기초연구를 끝낸 약물의 안전성을 주로 점검한다. 약물의 투여량을 확인하는 단계인데 상당히 높은 성공률을 자랑한다. 일반적으로 1상 성공률은 60~70%에 달한다.

2상에 가서는 신약의 효능과 부작용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하게 된다. 임상시험 대상자도 수백 명 단위로 많아진다. 건강한 사람뿐 아니라 환자도 대상자가 된다. 임상시험 기간도 꽤 길다. 연 단위로 이뤄지는데 약물의 부작용과 적정한 투약량, 용법 등이 대강 정해진다. 성공률은 다른 단계에 비해서도 낮은 편이다. 대개 30%의 약물만이 이 단계를 통과한다고 알려져 있다.

3상에서는 환자만을 대상으로 수천 명의 많은 인원이 임상시험에 참여한다. 2상에서 대략적으로 결정된 투약량과 용법 등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약물의 효능, 부작용, 안전성을 점검하는 시기다. 최소한 한 번은 더 임상시험을 하는 편이라 성공률 50~60%의 3상을 통과하려면 3~5년이 걸린다. 그러고 나서도 신약 승인 단계를 밟아야 시판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임상시험 전체를 통과하는 약물의 수는 매우 적다는 것이다. 미국바이오협회의 보고서를 보면 미국에서 임상 1상을 통과한 약물 중 최종적으로 신약 승인까지 받는 것은 9.6%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 미국 임상시험의 경우 1상을 통과할 확률은 63.2%지만 2상은 30.7%에 불과하다. 3상에서는 58.1%로 확률이 높아지지만 신약 승인단계에서도 85%만 통과해 전체적으로 보면 10%에 못 미친다.

3상에서는 통과된다는 것을 전제로 시판 직전의 약물을 쓰기 때문에 절박한 환자들이 많이 참여한다. 보건 당국의 허가가 떨어지기 전이라도 약물을 꼭 사용해야겠다는 의지가 있는 환자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더 이상 항암제가 듣지 않는 말기 암환자에게 3상 임상시험 중인 면역항암제는 부작용을 무릅쓰고라도 시도해보고 싶은 기회다. 다만 예상되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닥칠 수 있다. 임상시험 중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는 단계가 바로 3상이다. 글로벌 제약회사에서 연구팀을 맡아 이끌던 전직 연구원 A의 설명이다.

“환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빼고 본다면 무조건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3상에서는 부작용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물의 안전성을 점검할 수 없어요. 환자들은 임상시험 중인 약물이 안전성이 점검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임상시험에 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명과 관련 없는 신약이라 할지라도 3상에 임하는 환자들은 대개 치료 의지가 매우 강한 편입니다.”

임상시험에 적극적인 환자들

이와 같은 임상 진행 단계를 이해하고 나면 왜 서울에서 임상시험이 많이 이뤄지는지 원인을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한국임상시험산업본부의 자료를 보면 한국에서 이뤄지는 대다수의 임상시험이 3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17년을 기준으로 다국가 임상시험, 그러니까 주로 글로벌 제약회사가 포함된 임상시험 중 1, 2상은 113건이었다. 그러나 3상은 178건이다.

3상 임상이 많이 이뤄지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의 낮은 신약 접근성이다. 의약품 시장조사기관 IMS헬스 보고서를 인용하면 한국의 신약 접근성은 20%에 그친다. 전 세계 평균 49%에 훨씬 못 미친다. 의료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멕시코나 러시아와 비슷한 수준이다. 모두가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는 국민개보험(Universal Health Care) 제도에서는 신약이 고가로 유통될 수밖에 없다. 보험 재정을 위해서는 검증되지 않은 신약에 보험을 적용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려고 할 것이고 환자들이 보다 저렴하게 신약을 사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3상 임상시험을 현재도 진행 중인 서울의 대형 병원 종양내과 의사 B의 설명이다.

“건강보험 등재를 결정하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신약이 급여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아무리 짧아도 1~2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환자들은 신약이 보험에 등재되기 전에 더 적극적으로 신약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도 환자들에게 임상시험 기회를 많이 주려고 합니다. 저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대개 말기 암 환자로 여명(餘命)이 길어봤자 몇 개월인 경우가 많은데 3상 임상시험이 자기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기회가 되는 거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어차피 신약 접근성이 떨어지는 환경에서 병원에서는 최대한 많은 3상 임상시험을 유치해 환자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도 있다. 한국에서 이뤄지는 임상시험 약물 중 상당수가 항암제에 쏠려 있다. 2017년에 임상시험을 한 약물 중 항암제는 251건으로 전체 38.1%를 차지했다. 심혈관계 약물이 61건, 중추신경계 약물이 54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확연히 많은 수치다. 게다가 대형병원에 환자의 대부분이 쏠려 있는 상황도 서울에서 이뤄지는 임상시험 수를 늘리는 요인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정책도 한몫을 했다. 2014년 설립된 한국임상시험산업본부는 아예 임상시험을 활성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기관이다. 국내 임상시험을 지원하고 다국가 임상시험을 유치하는 것이 주요 업무다. 2004년부터 세워진 전국 17개 임상시험센터를 운영하고 임상시험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임상시험을 표준화하고 환자 안전과 의료 윤리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국제적으로 이를 홍보하는 일을 도맡고 있다.

지동현 한국임상시험산업본부 이사장은 “임상시험을 늘린다는 것은 단순히 제약업계의 활성화를 넘어서 국민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우수한 의료기술을 확보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질병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의료 현장에 적용하는 일은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임상시험이 그만큼 널리 진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상시험이 활발히 이뤄진다는 것은 제약산업이 그만큼 활성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가 임상시험을 유치하고 지원하는 것은 바이오 강국으로 성장하겠다는 목표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임상시험을 하겠다고 나서는 외국 제약회사, 병원이 많은 이유는 그만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위암 같은 경우 서구에서는 사망률이 낮은 편인데 한국에서는 매우 흔한 질병이잖아요. 위암에 맞는 항암제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국가, 그중에서도 임상시험에 적극적인 한국에서 시행하는 것이 좋겠지요.”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글로벌 제약회사 임상시험에 참가 중인 위암 전문의 C의 말이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다”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아시아 국가의 제약시장 규모가 커질수록 임상시험도 늘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임상시험=마루타’?

그러나 한국에서 임상시험은 대개 부정적인 시선을 받기 마련이다. 지난 10월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한 국회의원은 주변에 “임상시험으로 인한 피해 사례를 모아달라”고 요청했다. “임상시험 부작용 때문에 고통받는 환자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한 사례를 찾고 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이어 열린 식품의약품안전처 국정감사에서는 임상시험 부작용 사례가 1000건이 넘고 사망자도 80여명에 달한다는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의 지적이 있기도 했다. 김 의원은 이 자리에서 “임상시험 이상자가 수천여 건이 발생했음에도 전국 188개에 달하는 임상심사위원회에 의해 중단된 사례가 단 한 차례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는 현실을 잘 모르는 지적이라는 반박도 나온다. 이른바 ‘빅5’로 꼽히는 서울 한 대형병원에서 임상시험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의사 D의 말이다.

“시민단체나 정치권에서는 몇십 년 전 시각으로, 임상시험을 마치 마루타 실험 보듯이 보고 있습니다. 임상시험은 위험하지 않은 사람을 안전성이 검증되지도 않은 방법으로 위험에 빠트리는 100여년 전 실험이 아닙니다. 매우 엄정하고 까다로운 규칙과 법률에 의거해서 분명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아주 과학적으로 진행되는 시험입니다. 부작용은 약물의 효능을 시험하기 위해 반드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질병이 없었던 사람에게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병원과 제약업체는 최선의 대안을 가지고 대처합니다.”

얼마 전 한 시민단체에서 ‘누구를 위한 임상시험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보고서는 여러 언론에서 인용되면서 임상시험의 위험성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 보고서는 “산업과 자본의 이익을 위하여 국민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고 지적하며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정부가… 특히 저소득층, 난치성 질환자들의 임상시험 참여 확대를 독려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글로벌 제약회사의 임원 E의 말이다.

“만약 윤리적으로 충분한 대안 없이 진행되는 임상시험이 있다면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될 겁니다. 난치성 질환자들이 임상시험에 많이 참여하는 이유는 개발되고 있는 신약 외에는 다른 치료방법이 마땅히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갓 개발돼 고가의 신약을 사용하기 어려운 저소득층 환자들 역시 접근하기 쉬운 임상시험에 지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돈이 부족한 젊은층이나 저소득층이 무작정 임상시험에 뛰어드는 사례도 분명히 있다. 이를 관리·감독하는 기관과 보완책의 마련에는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 이제는 임상시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암 전문의 B는 한국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바이오 강국’이라는 국가적 목표는 물론 국민 보건 증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임상시험에 대한 언론 보도 같은 것을 보면 주로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많을 뿐 임상시험의 증가가 어떤 발전을 이끌어낼 것인지에 대한 얘기가 거의 없습니다. 의료 시스템은 잘 갖춰져 있는데 근본적인 인프라 확충에는 미흡한 한국의 보건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신약 개발을 위해 R&D 예산을 늘리라고 독촉만 할 것이 아닙니다. 실제 개발한 신약을 임상시험하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게 장려할 때입니다.”

키워드

#뉴스 인 뉴스
김효정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