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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37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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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우리 시대의 모든 부적응자들을 위해

프레디 머큐리와 추사 김정희의 위로

조정육  미술평론가 

▲ 1985년 호주 시드니 콘서트에서 공연하는 프레디 머큐리. photo 뉴시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봤다. 겨우 두 시간 동안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그날 이후 내 생활은 완전히 다르게 변했다. 틈만 나면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를 틀어놓고, 기회만 되면 그에 관한 기사를 찾고 듣고 또 찾고를 반복했다. 머큐리 중독증에 걸린 사람 같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그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증상이란 말인가. 그를 통해 잊고 있던 과거를 되찾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의 음악이 50대 후반 중년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만큼의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증세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영화를 보면서 주책없이 눈물을 흘렸던 민망함이 조금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나는 그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프레디 머큐리라는 이름도 제대로 몰랐다. 멜로디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아, 저 노래!’ 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이 머큐리 중독증에 걸렸을 정도이니 관람객 700만명을 넘어선 지금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신드롬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그의 음악을 듣는 동안 몇몇의 조선시대 화가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삶을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 가사 몇 줄만으로도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알고 큰 위안을 얻었다. 내게 이 화가들은 또 다른 조선 미술계의 프레디 머큐리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
   
   능호관 이인상(李麟祥·1710~1760)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다. 그는 고조부인 이경여(李敬輿)가 영의정을 지낸 노론계(老論系)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이인상의 증조부 이민계(李敏啓)가 서자(庶子)였다. 이인상도 적자(嫡子) 라인에서 비켜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생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반쪽짜리 양반이라는 신분적인 한계 속에서 번뇌하며 살았다. 벼슬은 현감까지 지냈는데 관찰사와 사이가 좋지 않아 일찍 사퇴했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렵고 몸은 병약했지만 성격은 강직했고 과도할 정도로 고지식했다. 아무리 급한 일로 외출을 하더라도 당색(黨色)이 다른 사람과 마주치면 바로 되돌아서 와버릴 정도였다. 비록 서자라 할지라도, 어쩌면 서자였기 때문에 적자보다 더 적자답게 살고자 했다. 뼈대 있는 가문에 폐를 끼치거나 누가 되는 행위는 질색을 하며 멀리했다. 그의 성격은 그림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의 그림은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고 담백하여 속기(俗氣)라고는 눈꼽만큼도 발견할 수 없다. 한 선비가 소나무 아래 있는 바위에 앉아 쏟아지는 폭포를 감상하는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배경이나 주변 분위기 따위는 거두절미하고 한겨울 눈 맞은 소나무 두 그루만을 단도직입적으로 화면에 세워놓은 ‘설송도(雪松圖)’, 엇갈리는 두 그루 노송(老松) 앞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앉은 선인(仙人)을 그린 ‘검선도(劍仙圖)’ 등 그의 그림에는 서릿발 같은 선비의 문기(文氣)가 꼿꼿하게 배어 있다. 목숨을 던질지언정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준엄한 선비정신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작품에 유독 푸르른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많이 등장한 것만 봐도 그가 지향하는 세계가 어떤 색깔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심사정(沈師正·1707~1769)은 증조부 심지원(沈之源)이 영의정을 지낸 청송심씨 가문으로 이인상 못지않게 족보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물론 당색은 정반대였다. 이인상이 노론계였다면 심사정은 소론계(少論系)였다. 그런데 조부인 심익창(沈益昌)이 과거시험에서 부정을 저질러 일시에 손가락질당하는 집안으로 전락했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괜찮았다. 심익창은 경종(景宗)과 왕세제(王世弟·훗날의 영조)의 권력싸움에 줄을 잘못 섰다가 왕세제 시해 음모에 가담했다 하여 극형을 당했다. 파렴치범의 집안에서 졸지에 역모 집안의 죄인으로 나가떨어졌다. 42세 때 세조(世祖) 어진(御眞)을 중수하는 감동(監董)으로 선발되었지만 대역죄인의 자손이라는 상소 때문에 파면되었다. 조선시대 때 그림 그리는 행위는 천기로 취급받았다. 양반들은 그림을 그리되 심심풀이 삼아 붓을 들었을 뿐 천한 재주로 이름을 얻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사정도 폐족이 아니었더라면 어진 감동 자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양반이라면 자리가 주어져도 사양해야 마땅하거늘 그 자리조차도 얻을 수 없었으니 그의 처지가 어느 정도였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집안사람인 심익운(沈翼雲)이 쓴 묘지명에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50여년 동안 근심과 걱정뿐, 낙이라곤 없는 쓸쓸한 날을 보냈다’고 쓴 것처럼 그가 발 담고 있는 현실은 잔혹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지를 절망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외부로 뻗어나갈 에너지를 그림에 집중해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가 그린 진경산수화 ‘경구팔경도첩(京口八景圖帖)’을 보고 예원(藝苑)의 총수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대단히 기절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인상과 심사정이 도달한 높은 경지의 작품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을 억압했던 삶의 굴레가 그다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비극을 속수무책 당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력하게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림에서만큼은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라는 심정으로 당당하게 붓을 들었다. 서족이든 폐족이든 상관없이 예술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한 양반이 최북(崔北·1712~ 1786년경)을 찾아와 그림을 요구했다. 반상(班常)의 구별이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중인(中人)인 최북이 양반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 작자였다. 최북이 머뭇거리자 양반은 재차 그림을 요구했고 최북은 자신의 눈을 찔러버리는 것으로 그의 갑질을 막아냈다.
   
   
▲ 허련 ‘완당 김정희 선생 초상’. 19세기, 지본담채. 손창근 기탁.

   부적응자를 위한 부적응자들의 위로
   
   보헤미안 랩소디는 ‘엄마, 방금 한 남자를 죽였어요’로 시작된다. 사람을 죽였다는 고백으로 가사가 시작되는 노래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처음일 것이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러면서 상심했을 엄마에게 ‘내일 이맘때 돌아오지 않더라도 계속 살아가라’고 한다. 자식을 앞세우고 살아갈 엄마의 심정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으리라. 이어서 계속되는 절규. ‘I don’t wanna die’였다. 사람을 죽여 놓고 너는 죽기 싫어? 이런 분노가 일어나야 마땅한데 분노 대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였을까? 그가 무슨 이유로 죽을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죽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는 그의 목소리를 눈 딱 감고 한 번만 들어주고 싶어졌다. 그만큼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는 절절했고 고통의 감정은 생생했다.
   
   최북의 칼끝은 자신의 눈을 겨냥했지만 마음의 칼끝은 그 양반을 향해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신분제 사회를 향했을지도 모른다. 최북은 그날의 자해로 외눈박이로 살았고, 술에 취하면 미친 듯 붓을 휘두르는 등 기이한 행적을 많이 남겨 ‘광생(狂生)’이라고 불렸다. ‘미치광이’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 ‘北’을 파자(破字)하여 ‘七七’이라는 자(字)를 썼는데 ‘칠칠하다’는 ‘일처리가 야무지고 반듯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성스러운 그릇’이라는 의미로 ‘성기(聖器)’, ‘쓸모가 있다’는 뜻의 ‘유용(有用)’도 그의 자이다. 그가 가장 많이 쓴 호(號)는 ‘호생관(毫生館)’이었는데 그 뜻은 ‘붓으로 먹고산다’는 의미다. 그가 호생관이란 호를 쓴 배경에 대해서는,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보여준다는 주장과 미천한 신분임을 반항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상반된 의견이 제기되었다. 어느 경우든 다른 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의식의 반영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최북은 그 당시 조선사회의 부적응자였다. 그의 최후도 부적응자다웠다. 그는 그림 한 폭을 팔고는 열흘을 굶더니 어느 날 크게 취해 돌아오던 길에 성곽 모퉁이에 쓰러져 삼장설(三丈雪)에 묻혀 죽었다.
   
   최북의 생애는 부적응자의 신산스러움으로 점철된 것에 반해 그의 그림은 대담하고 개성이 넘치는 작품이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공산무인(空山無人)’은 예술가로서의 필치가 무르익은 수작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은 나무 아래 빈 정자만을 그려 넣고 먹물을 풀어놓은 듯한 계곡 위에는 왕유(王維·699~759)의 시 구절을 휘갈겨놓았다. 텅 빈 정자를 보다 ‘빈 산에 사람은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라는 뜻의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제시(題詩)에 눈길이 가면 보는 사람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나 이렇게 살다 가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봄은 오고 꽃은 피겠지…’ 하는 쓸쓸함과 무상함이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게 만든다. 눈보라 치는 밤에 지팡이를 짚은 나그네가 고단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린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눈이 수북이 쌓인 날 삿갓 쓴 늙은이가 홀로 배를 타고 낚시질하는 장면을 그린 ‘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 등은 부적응자를 위해 붓을 든 부적응자의 위로다.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는 챔피언이다
   
▲ 김정희, ‘불이선란도’, 1853~1855년 추정, 종이에 먹, 55×31.1㎝,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姜世晃)은 관로가 차단된 힘없는 소북(小北) 남인(南人)에 불과했다. 강세황은 21세에 부친을 여의고 다시 25세에 모친을 여의자 32세 때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터전을 옮긴 후 61세까지 살았다. 노론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미관말직에 목숨 걸고 구차하게 사느니 책이나 읽고 그림이나 그리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심정이었다. 물론 61세에 영조의 배려로 관직에 나아가 고속승진을 거듭한 결과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까지 오르지만 안산 시절에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캄캄했다. 당시 안산에는 처남이자 절친한 벗인 유경종(柳慶種·1714~1784)이 있었고, 기호 남인의 학맥을 계승한 성호 이익(李瀷·1681~1763), 정몽주의 후손으로 조선 양명학의 체계를 세운 정제두(鄭齊斗·1649~1736)가 중심을 잡는 가운데 이용휴(李用休·1708~1782), 허필(許佖·1709~1768), 신광수(申光洙·1712~1775), 엄경응(嚴慶膺·?), 임희성(任希聖·1712~1783) 등의 젊은 멤버들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대부분이 현실정치권에서 배제된 소북 남인들이었다. 그들은 문학과 예술을 매개로 세속적인 욕망이 거세당한 자들의 울분과 한을 공유했다. 마음을 허락할 벗이 없었더라면, 좌절감을 달래줄 시가 없었더라면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세월이었다. 강세황은 30세부터 60세까지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시기의 대부분을 같은 처지의 벗들과 청유(淸遊)하며 살았다. 이때 안산을 드나들던 작가들 중에는 심사정과 최북이 있었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16 이후?)도 ‘젖니를 갈 나이’ 때부터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
   
   그런데 이들 ‘안산 패밀리’에서는 아주 특이한 문화가 생겼다. 바로 생지명(生誌銘)을 짓는 것이었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묘지명은 사람이 죽었을 때 쓰는 기록인 반면 생지명은 살아 있을 때 쓰는 생전(生傳)이다. 강세황은 이용휴의 생지명을, 이용휴는 허필의 생지명을, 허필은 엄경응의 생지명을 썼다. 이용휴, 강세황, 임희지는 자기 스스로가 자기 삶을 정리해 자찬묘지명을 썼다. 이들은 그렇게라도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존재에 대해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비록 모두 정계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지만 패배자가 아니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 ‘우리는 챔피언(We are the champions)’의 가사처럼 그들에게 ‘패배자를 위한 시간은 없었다’. 안산 패밀리는 패배자로 살기를 거부했다. 남들이 박수 쳐주고 ‘커튼콜’을 받는 삶도 좋겠지만, 스스로의 삶을 자각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삶도 소중하다. 그것이 바로 ‘나는 절대로 지지 않을 것(And I ain’t gonna lose)’이라고 말하는 자의 자기선언이고 자기확신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설령 조그만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조차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게 된다. 프레디 머큐리가 피아노를 치며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를 때 소위 ‘삑사리’라고 말하는 음이탈이 발생했다. 가수로서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실수였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 실수를 손가락질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대신 병든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 노래하는 그에게 더욱 더 감동하게 된다. 나도 살아가면서 저런 실수를 하더라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하면 욕을 먹지는 않겠구나, 하는 위로와 함께 말이다.
   
   
   우리가 그들을 잊지 못하는 이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손세기, 손창근 기증 명품 서화전’이 전시 중이다. 그중에는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걸작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가 포함되어 있다. 김정희 역시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잘나가다 50세가 넘어 제주도까지 유배를 다녀온 사연 많은 인물이다. 어디 그뿐인가. 66세에는 북청 유배까지 섭렵했다. 그런 사람이 인생의 부침을 전부 겪고 나서 무심한 심정으로 그린 작품이 ‘불이선란도’이다. 그 작품을 보고 있으면, 우리 또한 인생의 격랑을 뚫고 나아가면 저런 담담한 상태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위로를 받게 된다. 프레디 머큐리의 격려와 김정희의 위로. 올 한 해 최고의 선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이 후인들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기행(奇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으로 자신을 증거해야 한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리 기괴한 퍼포먼스를 벌인다 해도 그저 잠시 세간의 이목을 끌다 잊혀지게 된다. 예술가로서는 자격미달이다. 서른 살짜리 조카에게 프레디 머큐리에게 빠진 이유를 물었더니 그의 노래가 독보적으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일단 콘텐츠가 좋아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두 번째 이유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레디 머큐리도 이인상도 심사정도 강세황도, 심지어는 한쪽 눈을 찔러가면서까지 세상에 맞섰던 최북까지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우리 같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들은 그 어려운 일을 결국 해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살았기에 그 모습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용기와 희망을 준다. ‘나도 이렇게 살았으니 너도 쓰러지지 말고 살아!’라고 격려하는 것 같다. 이것이 우리가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앞장서서 온몸으로, 온 생으로 절절하게 외친 그들에 대한 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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