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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37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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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보헤미안 랩소디와 베토벤 ‘합창교향곡’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 

▲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묘사된 퀸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 모습. 위의 이미지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악보.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이 모두 퀸과 아바, 또는 특이하게 잉베이 말름스텐(당시는 잉위 맘스틴이라고 불렀다)과 같은 자극적인 음악에 열광하던 1980년대 말, 나는 보수적으로 클래식 음악에 몰두한 외톨이였다. 30년이 지난 지금, 흥행기록을 써가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열풍에 힘입어 퀸의 팬이랄 수도 없는 나까지 이런 글을 쓰는 것을 보니 어느덧 그들도 ‘클래식’이 된 모양이다.
   
   당시 친구가 귀에 꽂아준 ‘보헤미안 랩소디’(이하 프레디 머큐리와 브라이언 메이가 부른 대로 ‘보랩’이라 줄임)는 그에게는 경천동지할 새로운 음악으로 비쳤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미 ‘클래식’한 곡이었다. 랩소디(광시곡)라는 제목 때문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여러 양식을 이어붙인 악상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보랩’을 좋아하는 복고 성향의 독자들은 6분이라는, 팝음악으로는 무모할 만큼 긴 시간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게 느껴질 것이다. 1975년 프레디 머큐리가 ‘보랩’을 발표하기 150년 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귀가 들리지 않는 쉰네 살의 작곡가가 만든 아홉 번째 교향곡은 마지막 악장의 길이만 ‘보랩’의 네 배 길이였다. 거기에 교향곡의 정형을 무시하고 네 독창자와 합창까지 가세했다. 아연실색할 일이었다. 어디서도 머큐리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모델로 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내가 보기에 둘 사이의 유사성은 너무도 자명했다.
   
   ‘보랩’은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스 디스 더 리얼 라이프(Is this the real life)’라는 가사의 아카펠라(1)가 시작이다. 이어서 프레디가 ‘마마, 저스트 킬드 어 맨(Mama just killed a man)’이라는 발라드(2)로 등장한다. 건반의 간주 뒤로 같은 곡조를 한 차례 더 부르고 나면 ‘가끔씩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는 절규와 함께 브라이언 메이가 기타 솔로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세 번째가 이른바 오페라(3)에 해당하는 앙상블이다. 모차르트 오페라의 주인공 피가로는 말할 것도 없고 스카라무슈나 갈릴레오 모두 오페라를 상징하는 후렴구들이다. 스카라무슈(Scaramouche)는 오페라의 뿌리인 이탈리아 광대극,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주인공이다. 갈릴레오(Galileo)는 ‘갈릴리 태생’이라는 말로, ‘보랩’보다 4년 전에 나온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록오페라 ‘지저스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떠올리게 한다.
   
   문예 사상 첫 번째 오페라를 창작한 피렌체의 음악동호회 ‘카메라타’의 멤버 중에도 빈첸초 갈릴레이라는 음악가가 있었다. 바로 천문학자 갈릴레오의 아버지이다. 이런 상상의 나래가 ‘비스밀라(Bismillah)’나 ‘바알제붑(Beelzebub)’과 같은 이교도의 가사를 타고 날아오를 때, 네 번째 짧고 강렬한 하드록(4)으로 넘어간다. 끝으로 다시 한 번 발라드(5)가 돌아오는데 이때 곡을 마무리하는 가사는 맨 처음 아카펠라에 나왔던 ‘어쨌든 바람은 불고(Anyway the wind blows)’이다.
   
   이에 비춰 베토벤 ‘합창교향곡’의 드라마틱한 4악장을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서주-‘환희’의 주제와 변주, (2)바리톤 서창-‘환희의 송가’와 4중창의 변주, (3)행진곡과 테너 선창에 이은 변주, (4)새로운 악상의 후속 합창 ‘백만인이여, 포옹하라’, (5)‘환희의 송가’ ‘포옹하라’의 푸가와 코다.
   
   귀로 들을 것을 말로 하자니 복잡하지만 매년 연말이면 세계 도처에서 반복되는 제전의 음악이다. 나는 아직도 ‘보랩’이 ‘합창교향곡’에 대한 오마주라고 굳게 생각한다.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를 위해 그러면 엄연한 사실을 살펴보자. 프레디 머큐리의 어록을 정리한 그레그 브룩스와 사이먼 럽턴의 책 ‘퀸의 리드 싱어, 프레디 머큐리’(뮤진트리 출간)와 남아 있는 음악 자료들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가 평생 동경한 두 가지가 오페라와 발레임을 부인할 수 없다.
   
   
   프레디가 사랑했던 수퍼디바 카바예
   
▲ 스위스 제네바 몽트뢰 호숫가에 세워진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 photo 정준호
영화에서 프레디는 EMI 음반사의 매니저에게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카르멘의 아리아를 들려주며 오페라의 영감을 받은 ‘보랩’을 싱글앨범 수록곡으로 제시한다. 6분짜리 곡을 틀어줄 라디오 방송은 없다며 “미친 짓”이라 말하는 매니저 역은 오스틴 파워이자 슈렉의 목소리로 유명한 배우 마이크 마이어스가 맡았다. 그 또한 ‘보랩’을 삽입한 영화 ‘웨인스 월드’를 만들었을 만큼 퀸의 열광적인 팬이었다.
   
   ‘보랩’은 결국 찬반의 격론을 불러온 문제작이 되었지만, 이 곡을 통해 분명해진 것은 누구도 퀸이 하려는 것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프레디에게 오페라를 대표하는 인물은 그가 ‘수퍼디바’라고 부른 스페인 소프라노 몽셰라 카바예였다.(그녀의 모국 발음으로는 몬세라트 카발례이다.) 프레디는 방송을 통해 카바예를 존경한다는 인터뷰를 했고, 그것을 본 카바예가 직접 전화를 걸어 ‘콜라보’를 청했다. 프레디는 뛸 듯이 기뻤고, 꿈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가 청바지나 쫄쫄이가 아닌 턱시도를 입고 수염까지 깔끔하게 민 것만 봐도 카바예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본 프레디의 모습 가운데 가장 어색하지만 그래도 진심이 엿보여 귀엽기까지 하다.
   
   이렇게 해서 1988년, 풍운의 로커 프레디 머큐리와 세기의 프리마돈나인 몽셰라 카바예의 합작 앨범 ‘바르셀로나’가 탄생했다. 그보다 7년 전에 나온 크로스오버의 효시 ‘퍼햅스 러브(Perhaps Love)’에서 포크가수 존 덴버와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의 이중창이 서로 따로 노래하고 나중에 합성한 것처럼 너무 이질적으로 들렸다면, 프레디와 카바예는 마치 오페라의 듀엣처럼 자연스럽고 환상적으로 디바의 고향 ‘바로셀로나’를 찬양했다. 그것은 마치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연인이 눈빛만으로 사랑을 나누는 데 아무런 장벽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았다.
   
   퀸의 팬이라면 프레디가 ‘바르셀로나’에 ‘보랩’의 세 번째 부분 ‘오페라’의 멜로디 ‘아이 시 어 리틀 실루에토 오브 어 맨(I see a little silhouetto of a man)’을 회고하는 것을 금방 알아챌 것이다. 프레디의 우상이던 그 카바예가 올해 10월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영화 속에서 프레디가 길 건너편의 연인 메리를 향해 푸치니의 ‘투란도트’ 가운데 ‘왕자님 들어보세요’를 틀 때 레코드에서 자기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프레디에게 오페라가 곧 카바예였다면 루돌프 누레예프는 발레 그 자체였다. 위대한 러시아 발레 유산의 계승자인 이 발레리노는 몸짓과 의상, 무대 매너 등 모든 면에서 프레디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레디가 무대에 즐겨 입고 등장한 쫄쫄이, 전문용어로 레오타드(그것을 처음 입은 곡예사의 이름을 딴 것)가 발레를 동경한 데서 비롯된 것임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글을 쓰기 전, 나에게 30년 전에 퀸을 처음 소개한 친구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도 금시초문이란다.
   
   
▲ 1979년 런던 로열발레단 초청으로 무대에 선 프레디 머큐리. photo 유튜브

   발레리노가 된 프레디 머큐리의 공연
   
   의심이 가는 사람은 당장 유튜브에 ‘Royal Ballet Bohemian Rhapsody’라고 쳐보기 바란다. 1979년 프레디가 런던 로열발레단의 초청으로 발레리노가 된 공연을 볼 수 있다. 그것을 어찌 말로 옮길 수 있을까!
   
   ‘보랩’보다 흥미로운 것은 ‘목신’(목축의 신 ‘판’을 말한다)으로 변신한 프레디 머큐리이다. 만년의 히트곡 ‘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I want to break free)’의 뮤직비디오는 멤버들의 여장(女裝)으로 유명하지만, 실상 더 의미심장한 부분이 바로 후반부 ‘목신의 오후’ 장면이다. 발레 사상 가장 큰 스캔들을 불러왔던 20세기 초 니진스키의 무대를 프레디가 재현한 것이다.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에 클로드 드뷔시가 붙인 ‘전주곡’은 벨에포크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파리에 온 러시아 발레단은 그 곡으로 발레를 만들었고, 얼룩얼룩한 목신 레오타드를 입은 니진스키는 외설적인 몸짓으로 고상한 오페라 무대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목신 의상을 입고 나팔을 부는 프레디의 모습은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가 작곡한 ‘더 쇼 머스트 고 온(The show must go on)’과 프레디 추모곡 ‘노 원 벗 유(Nonone but you)’에 다시 등장한다.
   
   그룹 퀸은 1979년에 스위스 제네바 호숫가 몽트뢰에 자신들의 스튜디오를 마련한다. 카지노 내부의 스튜디오는 지금은 퀸 박물관이 되었다. 여기서 이들은 ‘돈 스톱 미 나우(Don’t Stop Me Now)’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 그리고 ‘더 쇼 머스트 고 온’과 같은 걸작을 녹음했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가 프레디의 마지막 노래가 된 것도 드라마틱하다. 마치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팔리아치’에서 아내의 외도를 눈치챈 배우가 같은 상황을 무대 위에서 연기하다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와 연적을 살해하는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희극 배역 팔리아치는 스카라무슈의 동료이다. 이렇게 푸치니 여주인공 토스카의 말마따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산’ 프레디이다.
   
   1991년 11월 24일 프레디의 때 이른 죽음에 뒤이어 1993년 1월 6일 그가 존경한 루돌프 누레예프가 세상을 떠났다. 그들 사이에는 몽트뢰 인근 로잔에 있는 베자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호르헤 돈이 유명을 달리했다. 모두 사인은 에이즈였다.
   
   20세기 최고의 안무가였던 모리스 베자르는 자신의 연인인 돈과 누레예프 그리고 발레를 사랑한 프레디의 연이은 죽음을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고, 1996년 퀸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엮어 ‘발레 포 라이프(Ballet for Life)’를 안무했다. 잔니 베르사체가 의상을 맡은 이 발레는 2001년 세종문화회관의 내한공연에서도 많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지금은 유튜브에서 누구나 만날 수 있다.
   
   베자르의 ‘발레 포 라이프’가 춤을 통해 모든 사람이 퀸과 소통하기를 원한 작품이라면 그의 ‘9번 교향곡’은 만인을 베토벤과 만나게 하려는 시도였다. 1964년에 초연된 이 발레는 50년 뒤인 2014년 도쿄 발레단과 합작으로 일본에서 다시 공연되었다. 일본은 시큰둥한 미국보다 퀸에 훨씬 열광했고, 늘 쿨한 것을 좋아한 프레디도 게이샤나 다도와 같은 일본풍에 반했다. 그가 살아서 도쿄의 베자르 발레단 ‘9번’ 공연에 초대받았다면 아마도 자리에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고음불가가 되어 노래가 불가능하다면 마이크를 뽑아들고 주빈 메타 대신 지휘를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고적대장이 악단과 무용수를 동시에 지휘하는 최초의 베토벤 ‘합창교향곡’이 되었을 것이다. 몽트뢰 호숫가에 서 있는 프레디 머큐리 동상은 어쩌면 ‘환희의 송가’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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