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헬리오시티 입주민들이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혁신학교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이한솔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송파구 헬리오시티 입주민들이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혁신학교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 이한솔 영상미디어 기자

“우리가 자사고나 특목고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일반학교를 바랄 뿐입니다!”(학부모)

지난 11월 30일 저녁 서울 송파구 송파구청소년수련관. ‘가락초·해누리초·해누리중 혁신학교 지정 공청회’에 참석한 한 학부모 대표가 이렇게 말하자, 공청회장 가득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이 학부모가 “좌우 이념 편향 없는 균형 잡힌 교육과정을 우리는 원한다”고 말하자, 사방에서 “혁신학교 싫다!”는 아우성이 나왔다. 서울시교육청 혁신학교 담당 국장이 마이크를 잡고 “혁신학교는 우리 공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설명할 땐 곳곳에서 “당신 자식이나 혁신학교 보내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이날 공청회에 참석한 학부모들은 곧 입주를 시작하는 서울 송파구 ‘헬리오시티’ 입주민들이다. 헬리오시티는 가락시영아파트를 헐고 9510가구 규모로 재건축한 국내 최대 아파트다. 그런데 서울시교육청이 내년 3월 단지 내에 개교하는 가락초와 해누리초·해누리중 세 곳을 ‘혁신학교’로 직권 지정하려 나서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해누리초·중은 서울에 처음 생기는 초·중 통합학교이고, 가락초는 재개발 공사로 2014년 휴교에 들어갔다가 내년에 재개교하는 학교다.

이날 공청회는 ‘혁신학교’를 둘러싼 진보 교육 당국과 학부모들 간 극에 달한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학부모들은 혁신학교 지정을 밀어붙이는 서울시교육청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쏟아냈다. 이런 갈등이 폭발한 게 지난 12월 12일 주민 공청회장 사태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혁신학교에 반대하는 헬리오시티 학부모로부터 등을 맞고 도망치듯 공청회장을 빠져나온 것이다. 교육계에서는 “사실상 실패로 끝난 혁신학교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반응이 많다.

혁신학교는 김상곤 전 교육부 장관이 2009년 경기도교육감 시절 도입한 학교 모델이다. 교장·교감이 아닌 교사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강의 중심이 아닌 체험·토론 수업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로 진보·좌파 교육감들이 확대를 지지한다. 2009년 당시 13개 학교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전국 1만1000여개 초·중·고교 중 1525곳으로 크게 늘었다. 문재인 정부 역시 혁신학교를 크게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학교서 배우는 게 없어 학원 보내야”

진보 성향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도 취임 이후 줄곧 혁신학교 확대 정책을 펴왔다. 현재 199개 혁신학교를 2022년까지 250곳으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이미 조 교육감은 2014년 이후 모든 신설 학교를 혁신학교로 지정해왔다. 현행 조례에 따르면 기존 학교를 혁신학교로 전환하려면 학부모 또는 교사의 50%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신설 학교는 교육감이 원하면 혁신학교로 직권 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기존 학교를 혁신학교로 전환하려면 학교 문화나 교육과정을 바꾸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신설 학교는 교장과 교사가 모든 걸 새롭게 구성하기 때문에 혁신학교 문화가 안착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고 했다.

이런 기존 방침에 따라 서울시교육청은 헬리오시티 내 새로 문을 여는 학교 세 곳도 혁신학교로 지정하는 계획을 추진해왔다. 그런데 헬리오시티에 입주할 예정이던 학부모들이 지난 3월 교육청의 이런 계획을 알고 “우리 학교는 절대 안 된다”고 민원을 제기한 것이다. 그러나 8개월 넘게 서울교육청이 확답을 하지 않자 결국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학부모들은 혁신학교 학생들의 학력이 다른 학교보다 낮다는 점을 우려한다. 혁신학교에선 협력·소통·인성 교육을 중시하기 때문에 지식전달 위주의 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헬리오시티의 한 학부모는 “내 아이를 경기도의 한 혁신학교에 보냈는데 애가 ‘학교에서 국어·수학 교과서를 다 못 끝냈다’고 하더라”며 “화가 나 담임한테 물어보니 ‘어머니, 교과서 진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또 다른 학부모도 “혁신학교는 담임이 1년 내내 단원평가도 안 한다”면서 “혁신초 6년 내내 놀다 중학교 첫 시험 성적 받아보고 충격받는 애들이 한둘이 아니다”고 했다.

지난 11월 30일 공청회에 나온 한 학부모도 “학교는 교사가 애들을 가르치는 곳인데, 애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게 없어서 부모가 다시 학원으로 돌려야 한다”며 “사교육비가 일반 학교 두 배가 드는데, 이게 당신들이 말하는 혁신교육이냐”고 했다. 서울교육청 관계자가 “반드시 공부하는 혁신학교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지만, 돌아온 건 “우리는 혁신학교를 원하지 않는다”는 학부모들의 거부였다. 한 초등학교 5학년 학부모는 “교육감이나 장관이나 본인 자녀들은 외고 보내고 위장전입까지 했으면서 우리 자녀는 무조건 혁신학교 가라는 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며 “혁신학교 지정 추진을 철회하지 않으면 등교 거부 운동도 벌이겠다”고 했다.

지난 12월 17일 ‘2018 행정혁신교육지원청 운영 결과 나눔’에 참석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photo 뉴시스
지난 12월 17일 ‘2018 행정혁신교육지원청 운영 결과 나눔’에 참석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photo 뉴시스

학력 저하 vs 자존감 키운다

혁신학교 학생들의 학력 저하는 정말 사실일까. 교육부에 따르면 2016년 혁신학교 고교생의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전국 평균(4.5%)의 세 배 가까운 11.9%에 달했다. 학력 하락 폭도 커서, 전국 고교생의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2015년에서 2016년 사이 평균 4.2%→4.5%로 소폭 늘었지만 혁신학교는 7.9%→11.9%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부모들 우려가 타당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교사가 교과서 외에 여러 보조교재를 활용해서 공부를 하는 데다 역할극이나 체험학습, 토론 위주로 수업을 진행해 결과적으로 학업성취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혁신학교 지지자들은 “기존 오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으로 혁신학교에서 추구하는 창의성·인성 교육을 측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혁신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자란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면서 “특히 요즘 대학 입시에서는 수시 학종(학생부종합전형)으로 학교생활이나 동아리 활동 등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대입에도 불리하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혁신학교가 일반학교보다 학업성취 면에서 불이익이 존재한다는 통계적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며 “수업참여도와 학교만족도, 교사와의 관계에서는 혁신학교가 더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연구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학부모들은 혁신학교 일부 교사들의 ‘편향성’도 문제 삼고 있다. 혁신학교가 친(親) 전교조 교육감들이 추진하는 학교이고, 전교조 교사들이 모인 학교라는 것이다. 혁신학교는 교장이 교사를 초빙할 수 있는 비율이 50%에 달하기 때문에 ‘토론식 수업’ ‘민주적 학교 운영’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학교에 전교조 교사들이 주로 지원한다는 것이다. 실제 모 혁신학교에 근무했던 한 전교조 출신 교사는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교사들이 학생 축제에서 남은 돈을 쌍용차 노조에 기부하자고 하고, 시험 전 교사가 학생들에게 쌍용차 노조 연극을 보러가자고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은 “초기에 전교조 교사들이 주축이 돼 혁신학교 기틀을 닦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국 초·중·고교의 10% 이상이 혁신학교로 지정된 지금은 전교조 교사들만 모인 혁신학교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말했다.

교육 당국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이 혁신학교 지정에 반대하는 일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송파구 송례중은 2015년 신설 직후 혁신학교가 됐지만 학부모들의 반대로 내년부터 일반학교가 된다. 지난해 충북 제천고도 교사들이 혁신학교 지정을 추진했지만, 학생·학부모·총동문회가 반대해 무산됐다. 광주광역시 대광여고, 서울 중산고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 같은 반발이 이어지자 서울교육청은 결국 헬리오시티 내 세 학교에 대한 혁신학교 지정을 보류하고 1년 뒤 학부모들에게 혁신학교 전환 여부를 묻기로 한 상태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서울교육청 앞에서 저녁마다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서울교육청이 세 학교에 대한 혁신학교 지정을 미루는 대신 혁신학교 시범 단계인 ‘예비 혁신학교’로 지정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예비 혁신학교’는 혁신학교로 지정되기 전 시범 단계 학교다. 교육청으로부터 연간 1000만원 예산을 받고 혁신학교 교육과정 일부를 운영한다.

한 학부모는 “예비 혁신학교도 사실상 혁신학교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이고, 전교조 교사들이 모여들면 1년 뒤 혁신학교 전환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며 “이런 식으로 우리 아이들을 실험용 쥐로 삼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는 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인기 없는 혁신학교가 들어오면 그 일대 집값이 떨어질까봐 학부모들이 저렇게 격렬하게 반대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집값을 이끄는 건 좋은 학군에 아이를 보내고자 하는 젊은 학부모 수요인데, 혁신학교에 대한 거부 정서 때문에 일대 집값이 부정적 영향을 입을까봐 걱정한다는 것이다. 특히 헬리오시티는 혁신초등학교뿐 아니라 혁신중학교까지 지정되면 ‘공부 안 시키는 동네’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라고 크게 우려하고 있다.

학부모 반발이 거세자 혁신학교를 확대하려는 교육 당국도 고민이 깊다. 그동안 학부모·교사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되는 신설학교 중심으로 혁신학교 숫자를 급격히 늘려왔는데 처음으로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앞으로도 재건축 단지 안에 생기는 신설 학교를 혁신학교로 임의 지정한다는 기존 방침은 변함이 없다”면서도 “그러나 학부모들 반발이 예상보다 강하고 혁신학교에 대한 오해가 깊어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난감하다”고 했다.

학부모 반발로 혁신학교 임의지정 계획을 철회하면 앞으로도 계속 비슷한 사례가 나올 것이고, 진보 교육 정책의 상징인 혁신학교 확대에 큰 차질이 빚어질 거라는 우려가 나온다. 그러나 교육계에서는 “혁신학교의 교육적 성과가 실질적으로 드러나면 학부모들이 알아서 지지하고 찬성할 텐데 교육 당국이 신설 학교 중심으로 밀어붙인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라는 평가가 많다. “혁신학교 도입 10년의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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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미 조선일보 사회정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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