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인물] 해군 예비역 대령 도배기술자 된 이유
  • facebook twiter
  • 검색
  1. 사회
[2541호] 2019.01.14
관련 연재물

[인물] 해군 예비역 대령 도배기술자 된 이유

제주 해군기지·천안함 구조·세월호 수습 해군 최고 잠수 전문가의 인생 2막

곽승한  수습기자 

▲ 지난 1월 9일 군포시의 한 아파트에서 송무진씨가 도배 작업을 하고 있다. 송씨는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게 이 일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송무진씨의 명함. 뒷면에 해군 관련 이력이 빼곡히 적혀 있다. photo 송무진
송무진(52)씨는 2017년 6월 해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1991년 해군 소위(학군 36)로 임관해 장교생활을 시작한 그는 26년간 군에 있으면서 제주해군기지 건설, 천안함 폭침, 세월호 참사 등 해군이 연관됐던 여러 사건에서 주요 임무를 맡아왔다. 해군 최고의 잠수 전문가이기도 했던 그는 전역 후 인테리어 가게를 오픈했다. 도배가 그의 주된 일이다. 그가 대표로 있는 인테리어 업체 명함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명함 뒷면을 보고 깜짝 놀란다. ‘도배, 장판, 데코타일, 조명 전문’이라고 적혀 있는 명함 앞면을 뒤집으면 다음과 같은 이력이 빼곡하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심해잠수 1급 국가기술자격 보유, 前 천안함 구조작전 합참 특보, 前 해군 평택함 함장, 前 해군 SSU(구조작전대) 작전대대장, 前 세월호 수습작전 국방부 기획총괄, 해군 예비역 대령 전역’. 해군 장교로 화려한 군생활을 해왔던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걸까. 지난 1월 7일, 서울 영등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야인으로 조용히 살고 있는데 어떻게 알고 연락했느냐”며 기자를 맞이했다.
   
   - SSU 대대장으로 해군 대령까지 지내셨던 분이 ‘도배사’로 변신한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사실 지금 이런 카페에 앉아 있는 것도 썩 편하지는 않다. 군 생활을 하면서 워낙 사람한테 치여서 되도록 사람 많은 곳에는 가지 않는다. 나도 젊을 때는 입담 좋기로 소문 나서 회식 자리에 빠지지 않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그런데 2005년 제주해군기지 건설 사업에 참여하면서 인생이 비틀어졌다. 당시 제주해군기지 사업준비단 통제반장이라는 직책을 맡았었다. 제주에서만 10년 가까이 일했다. 직책은 통제반장이지만 사실상 갈등관리 전담이었다. 그러면서 정신이 피폐해졌다. 7년 가까이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나는 교육생 40%가 중도 퇴교한다는 SSU 훈련을 1등으로 수료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 훈련보다 더 힘들었던 게 제주해군기지 추진 사업을 할 때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 제주에서 무슨 일을 겪었나. “나는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교까지 제주에서 다닌 토박이다. 당시 정부에서 제주에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하는데 주민들이 들고일어나니 군 측에서 그 갈등을 조정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해군 교육사령부에 근무하고 있던 내가 갑자기 차출됐다. 그때 제주로 내려가 일한 시간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나는 부대원들과 살 부대끼며 훈련하는 걸 좋아하는 현장 체질인데, 공무원들도 가장 꺼리는 갈등관리 업무를 맡은 것이다.”
   
   -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반대가 심했던 사업 아니었나. “어쨌든 맡은 일이니 미친 듯이 일했다. 당시 제주도에 있는 3600개 시민단체 리스트를 받아서 마치 영업사원처럼 홍보책자 들고 일일이 찾아다녔다. ‘제주해군기지, 사실은 이렇습니다’ 같은 내용을 알린 거다. 그러면서 주민들에게 얻어맞은 적도 많다. 심지어 그때 초등학교 3~4학년이었던 우리 아이들 보는 앞에서도 맞았다. 아빠가 군인인데 민간인한테 얻어맞고 다니는 모습을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나. 그때 도저히 제주에서 가정생활을 이어갈 수 없어서 아내랑 아이들과 따로 살기 시작했다. 사실상 가정이 해체될 뻔했다.”
   
   - 제주 토박이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주민들도 많았을 텐데, 고향 사람들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도 내가 내려가서 1년여 지나자 주민들 여론이 많이 호의적으로 변했다. 한 분 한 분 붙잡고 울다시피 호소한 진심이 통했다. 제주도에는 ‘여당 야당도 아니고 괸당이다’라는 말이 있다. (‘괸당’은 친인척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같은 지역 사람을 중요시하는 제주도 문화 때문에, 주민들이 장군은 안 만나도 일단 나는 만나주려고 했다. 그렇게 일을 처리해내면 군에서 ‘잘했다, 수고했다’ 할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해사(해군사관학교) 출신도 아니면서’ 이런 목소리만 뒤에서 들렸다. 언론에도 자주 노출되니 시기하는 눈빛들도 있었고. 또 하루에 수십 명씩 사람들을 만나면 최소한 밥이나 커피라도 사야 하지 않나. 그 돈을 전부 사비(私費)로 했다. 한 달에만 수백만원을 썼다.”
   
   - 1조원이 투입된 사업이었는데, 군에서 그 정도 예산이 안 나왔나. “공식적으로 편성되지 않은 부대였으니 예산이 있을 리가 없었다. 국회와 정치권에서 4년 동안 예산을 부결시켜 돈이 나오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군에서는 ‘송 소령, 나중에 보전해줄게. 이거 잘 해결하고 진급해야지’ 같은 말만 했다. 하지만 보전해주지 않았다. 군인이라는 직업 성격상 본인 사비는 얼마를 써도 문제가 안 되지만, 세금은 10원이라도 잘못 쓰면 욕먹고 징계받지 않나. 명예와 공명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격상 돈 문제에 얽히기 싫었다.”
   
   - 제주 해군기지는 국가적 사업이었는데, 정부가 개인에게 너무 큰 책임을 지운 것 아닌가. “제주해군기지가 얼마나 큰 사업이었나. 그래도 자부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있는 동안에는 흔한 비리사건 하나 없었다는 사실이다. 군 건설사업을 하면 업자들한테 법인카드를 받아서 쓰고 다니는 군인들이 종종 있었다. 법인카드는커녕, 나는 제주에 몇 년 있는 동안 빚만 잔뜩 얻었다.”
   
   - 잠수 전문 해군인데, 어울리지 않는 일을 맡은 거 아닌가. “나는 바다를 사랑해서 해군이 된 사람이다. 장교 중에 잠수 경험이 2000번 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제주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때부터 팔자에 없는 일을 많이 했다.”
   
▲ 2016년 11월 송씨의 전역 전 마지막 심해잠수 훈련 모습. 송씨는 “보통 50살 넘으면 심해잠수는 안 하는데 전역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 천안함 구조작전 합참 특보, 세월호 수습작전 기획총괄 일도 맡았다. 해군 관련한 큰 사건 때마다 주요 보직에 있었던 것 같은데. “제주에 있으면서 언론 상대를 많이 한 경험 때문이다. 또 당시 장교 중에 실전 잠수 경험이 나만큼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천안함, 세월호 때도 군 지휘관들과 현장 구조대원들 사이에서 상황을 조율하고 언론에 상황을 설명할 적임자로 배치된 것이다. 잠수는 실전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 세월호 사고 당시 구조작업을 두고 지금까지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나온다. 지금 돌이켜본다면. “급하게 진도로 내려가보니, 사고 자체는 해양경찰 관할임에도 국방부가 맡아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구조하고 수습할 인력이 해경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해군 SSU 대원들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도 수습작전 기획총괄을 맡고 국방부 재난과로 파견을 간 것이다. 2014년 4월 사고가 난 뒤 2014년 11월 말까지, 매일 밤 12시까지 상황실에서 보고업무를 했다. 장관에게 보고서 작성하고 브리핑하는 일을 맡았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대원들이었다. SSU 출신이라고 바닷속이 두렵지 않은 게 아니다. 몇십㎝ 앞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닷속에서 찌그러진 구멍이나 작은 틈새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수색해야 한다. 또 시신의 형상은 얼마나 처참한가. 다들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2014년 11월 말 국방부 장관에게 마지막 보고서를 쓸 때 두 장짜리 포상 건의서를 제출했다. 우리 대원들 6~7개월 집에 못 가면서 구조작업을 했으니 노고를 인정해달라고. 그러나 작은 포상 하나 받지 못했다. 국민적 여론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다. 당시 민간 잠수사들은 일당 98만원을 책정받았다. 우리 대원들은 하루 생명 수당이 1만원이었다.
   
   구조작업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는 것은 나도 안타까운 부분이 있다.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된 사고였나. 다만 구조 현장 상황이 매우 위험하면 현장 지휘관은 주저할 수밖에 없다. 구조대원들이 목숨을 잃을 수 있으니까. 대원들도 사람이고 귀한 아들이자 한 가정의 아버지들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송씨는 세월호 참사와 종종 비교되는 1993년 서해 페리호 침몰사건 때는 아예 현장에서 구조대원으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그가 갓 중위를 달았던 1993년 10월이었다. 서해 페리호 사건 때도 292명의 사람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당시 송씨는 구조팀장으로 근무하며 하루에 수차례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시신 수습을 했다. 송씨는 “한번은 밤이 되고 대원들 피로도가 쌓여 잠시 수색을 중단하자 주변에 있던 일반인들이 ‘왜 수색을 더 안 하느냐’며 욕을 했다. 그때 내 상사가 그중 가장 젊은 사람을 불러 ‘좋다. 다시 들어가서 수색할 테니 당신이 같이 와서 우리가 시신을 수습하면 옮기는 것만 도와달라’고 했다. 우리가 시신 한 구를 수습해 배에 올렸더니 그 젊은이는 보자마자 구토를 했다. 그 시취를 일반인들은 견딜 수 없는데, SSU 대원들 역시 구역질을 참으면서 해나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페리호 구조작전을 끝낸 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 예비역 대령으로 예편하면 두둑한 연금 받으면서 노후를 보내거나 방산업체에 재취업할 수 있을 거라고 일반인들은 생각한다. 전역 후 ‘도배’ 일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앞서 말했듯 제주에서부터 시작된 경제적 어려움을 퇴직금으로 모두 정산하고 나니 남은 게 없었다. 이제 22살, 20살 된 두 아이 학비는 벌어야 하니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마침 누나가 매형과 함께 30년째 지물포를 운영하고 있다. 예전부터 어깨너머로 도배기술을 배웠는데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니 배우는 속도도 빠르고 솜씨가 있는 것 같다고 주변에서 그러더라. 무엇보다 몸은 고되지만 조용한 곳에서 나 혼자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 몸으로 하는 일이니 성과도 정직하게 나오고. 지금은 잠도 잘 자고 정말 행복하다. 그런 자리(방산업체) 제의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으려 한다.”
   
   - 특별한 경력이 영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나. “요즘 워낙 불경기다 보니 일이 많이 줄었다. 주변에서는 군 관사 아파트 상대로 영업을 해보라고 조언해주기도 하는데, 일절 안 한다. 블로그와 인테리어 커뮤니티를 통해 직접 홍보한다. 다행히 나한테 시공을 맡기신 고객분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워한다. 사실 이 일을 하면서 나의 지난 경력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명함 뒷면에 경력을 넣은 이유는 주변 업자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고 사기 치거나 돈 떼어먹으려 들지 못하게 하는 것, 그 정도였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건의 글이 있습니다.
  김종학  ( 2019-01-15 )    수정   삭제
송무진님
이 시대의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
앞으로도 진정으로 번창하시길 두손모아 기원합니다
  lonestar333  ( 2019-01-15 )    수정   삭제
수고 하셨습니다. 건강하시고 즐거운 여생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창간 50주년 영상

주간조선 SNS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기업소식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