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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르포
[2543호] 201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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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특집]4인 가족이냐, 1인 가족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정여울  ‘마흔에 관하여’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저자 

▲ 일러스트 허인회
얼마 전 한 모임 자리에서 결혼 3년 차 남편의 이야기를 들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말쑥한 정장 차림, 친절한 미소와 빈틈없는 에티켓. 그는 한마디로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아이가 있냐’고 물어보자,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 없는 삶, 저는 정말 ‘강추’예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보통 젊은 부부에게 아이가 없는 경우 ‘아직 아이를 낳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이다’ ‘아이가 없지만 우리는 괜찮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마련인데, 이 부부는 처음부터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합의를 했으며, 남편이 부인보다 먼저 ‘아이 없는 삶을 강력히 추천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없을 경우 아무래도 남편보다는 부인이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마련인데 남편이 이렇게 먼저 적극적으로 아이 없는 삶의 가치를 옹호하고 있으니 부인은 스트레스를 훨씬 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였고, 아이 없는 삶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그 부부보다 대여섯 살 많은 나는 어린 시절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를 보고 자란 세대이기 때문에 ‘나도 언젠가는 둘만 낳아 잘 기르겠지’ 하는 무의식적인 학습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나도 ‘아이 없는 삶’에 이제는 익숙해져버렸고, 내 주변에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친구나 선후배들도 많다. ‘명절 스트레스’만 없다면 30~40대의 ‘아이 없는 커플로서의 삶’이나 ‘싱글라이프’에 대한 만족도는 더욱 올라갈 것이다. 결혼을 안 했으면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고, 아이가 없으면 ‘언제 아이를 가질 것이냐’고 물으며, 첫째를 낳으면 ‘언제 둘째 가질 거냐’고 묻는 친척들의 성화만 없다면, 사람들은 결혼이나 출산에 대한 스트레스를 훨씬 덜 느낄 것이다.
   
   이제는 ‘미혼(未婚)’보다는 ‘비혼(非婚)’이라는 단어가 더욱 사람들의 자율적인 의사를 존중해주는 단어임을 이해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미혼이라는 단어에는 ‘아직 결혼을 안 했지만, 언젠가는 결혼할 것이다’라는 기대감이 서려 있고, 비혼이라는 단어에는 ‘본인이 결혼을 하지 않기로 자발적으로 결정을 한 것’이라는 뉘앙스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불과 20여년 만에 한국 사회의 가족 구조가 이렇게 빠르게 변모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많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 빠른 변화에 급격하게 적응하고 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혼밥’과 ‘혼술’ 문화의 급속한 대중화이다. 혼자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것은 더 이상 외로움의 상징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탈바꿈했다. 항상 네다섯 명 이상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밥을 먹으며 자랐던 우리 세대도 지금은 ‘어떻게 하면 혼자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향기로운 술을 맛있는 안주와 함께, 상사 눈치를 안 보고 혼자서 재미있게 마실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제는 가족이 있어도 혼자 먹는 식사와 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는 시간이 줄어들고, 자녀는 자녀대로, 부부는 서로 각자, 자신의 스케줄에 맞추어 혼자 밥을 먹는 일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초핵가족화에 따른 또 하나의 변화는 2대, 3대를 통틀어 아이가 한두 명밖에 없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마케팅 업계에서는 이를 일컬어 ‘에잇포켓족’의 급증으로 본다. 최근 출산율 급감으로 유아동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백화점을 비롯한 아동용품 매장의 판매고는 오히려 늘고 있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른바 에잇포켓이라 불리는 유아용품시장의 때아닌 호황은 집안을 통틀어 아이가 한 명뿐인 가구가 많아지다 보니 아이는 하나인데 장난감과 학용품을 사주려는 사람들이 부모,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 이모나 고모, 삼촌에 이르기까지 현저하게 늘어나게 된 현상을 가리킨다. 비싸고 화려한 아동복들, 아이들의 창조성을 자극하기보다는 어른들의 지갑 두께를 걱정하게 만드는 값비싼 장난감들은,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보다는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당연하다’는 안일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결핍이 없는 아이들은 타인의 결핍을 이해하는 공감능력도 떨어지게 되고, 결핍을 벗어나기 위해 혼자 궁리를 하며 창의력을 발달시키는 자기주도적 학습능력도 떨어지기 쉽다. 교육이 성적을 올리기 위한 도구로만 활용되면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처럼 ‘인간다운 삶’은 깡그리 접어둔 채 오직 명문대 입학만이 지상목표가 되는 무미건조하고 살벌한 가족문화가 일상화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인생의 문제를 홀로 헤쳐나가는 힘’을 기르는 교육이 대가족 시대에는 저절로 이루어졌던 반면 지금은 철저히 부모세대에만 의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의 시대에서 ‘하나도 제대로 기르기 어려운 시대’로의 이동은 자녀교육의 풍속도마저 바꾸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를 통한 가상현실의 보편화
   
   고령화와 초핵가족화로 인한 다양한 문화적 트렌드의 변화는 사회구성원들의 가치관 변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1인용 엔터테인먼트의 증가 또한 초핵가족화로 인한 문화 변동의 한 사례다. 영화관에 직접 가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넷플릭스나 IPTV를 통해 집에서 편안하게 영화나 드라마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 사회생활이나 사교활동을 하는 것보다 집에서 혼자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것이 더욱 ‘편안하다’는 사고방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현실세계와 미디어 속의 가상세계를 자신도 모르게 혼동할 위험도 커지게 된다. 독일의 작가 프랑크 쉬르마허는 ‘가족, 부활이냐 몰락이냐’에서 실제 친구가 아닌 ‘TV 친구’가 늘어날수록 출산율은 더욱 떨어지고, 현실세계에서 진짜 위급한 상황이 되면 ‘부를 수 있는 현실의 친구’가 적어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TV는 시청자들을 정말 행복하게 만든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정말 멋진 우정을 쌓고 있다고 느낀다. 이 여성들이 TV 시청에 투자하는 전체 시간과 관련하여, 드라마와 시트콤(이 중 상당수에는 가족과 친족 그룹이 등장한다)을 많이 시청할수록 자신의 친구 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훨씬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의 자식을 낳지 않는 사회의 의식 속에는 가상의 친구들이 북적거린다. 놀라운 점은 이런 가상의 친구들이 한 가지 사회 역할만을 맡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돌프 그리메 연구소의 연구 결과대로 이들은 형부, 언니, 남동생, 조카, 여자친구 등 모든 역할을 동시에 해낸다.
   
   - 프랑크 쉬르마허, ‘가족, 부활이냐 몰락이냐’(장혜경 옮김·나무생각·2006) 중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귀찮고 피곤하게’ 느껴지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속 가상의 드라마 속 현실이 더욱 따뜻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 그로 인해 출산율은 물론 인간관계 자체가 축소된다. 이제 사람들은 시트콤 ‘프렌즈’처럼 적어도 6명의 친구들이 서로 가족 이상으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우정의 공동체’를 경험하기 어려워졌다. 유학과 이민, 잦은 이사와 이직 등 공간 이동이 많아지면서 이웃이나 친구들끼리의 우정과 연대감을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경험하기가 어려워졌다. 쉬르마허는 TV나 인터넷이 우리가 사회에 참여하는 방식 자체가 되면 ‘실제로는 우리가 사회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은폐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TV 속 친구 관계에 대한 주관적 만족도는 실제 생활에서의 만족도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성들은 시트콤과 드라마를 보면서, 남성들은 뉴스와 스포츠 프로그램을 보면서 친구들과 더 자주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어쨌든 우리의 뇌는 그렇게 믿고 있다. TV는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우리의 방식이다. 자신이 사회생활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랜선 이모, 랜선 삼촌’(TV·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알게 된 아이의 팬이 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TV 속 아이가 아닌 우리 곁의 진짜 아이들을 돌보고 배려할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게 된 것이다. 아무리 소셜미디어상의 ‘페북 친구’나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늘어나도, 현대사회의 우울증이나 고립감으로 인한 각종 질환을 치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회가 아무리 급변해도 인간에게 ‘최소한의 연대감’과 ‘인간적인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TV 친구나 랜선 이모는 아무리 ‘사랑’이 넘쳐도 위급한 순간 우리들을 구해줄 수 없고, 외로운 순간 우리의 등을 두드려줄 수 없다. 가족의 인구학적 다양성이 아무리 급변한다 할지라도 가족의 ‘역할’과 ‘필요성’을 대체할 만한 또 다른 인간관계와 심리적인 만족감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다문화 시대 새로운 가족문화를 꿈꾸며
   
   KT 아현지사 화재로 인해 해당 지역 주민들의 모든 업무가 마비되었던 것처럼, ‘온라인 세계의 기반’은 의외로 취약하고 위험할 수 있다. 사고나 자연재해에 노출되었을 때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것은 기계적인 매뉴얼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인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의 손길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TV 속 친구가 아닌 살아 있는 진짜 사람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사람의 온기를 필요로 하고,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따스함을 대체할 수 있는 인공지능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족의 다양성 자체가 확장되고, 다문화가정이 늘어나고,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구비해야 할 가치들은 무엇일까. 첫째, 세대 차이, 남녀 간의 문화 격차와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는 열린 마음이다. 예컨대 초핵가족화로 인한 긍정적인 변화도 있다. 바로 여성이 모든 일을 도맡아 해야 했던 명절 문화가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대신 가족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성의 일방적인 노동과 희생으로 유지되던 가족의 평화가 아닌 여성도 자신의 일과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명절을 보다 가치 있게 보낼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가족의 인원이 줄어든다고 해서 가족의 역할 자체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타인을 향한 감정노동으로 점점 지쳐가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가족적인 연대감’이다. 피와 살을 나눈 가족이 아닐지라도 가족처럼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삶을 견뎌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초기기억’을 좌우하는 존재가 바로 가족임을 일깨운다. ‘이것이 네가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가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다.’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는 ‘초기기억’을 만들어주는 원형이자 뿌리는 여전히 ‘가족’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않을 때 가족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로부터 치유될 수가 있다. 예컨대 유년 시절에 화상을 입었을 경우 부모가 얼마나 빨리 응급처치를 하는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아이를 대하는지에 따라 그 일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고, ‘극복할 수 있는 인생의 시련’으로 남을 수도 있다.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로 가득한 초기기억, 그에 대한 가족들의 응원과 격려의 부족, 그로 인해 자존감과 자기애가 부족한 상태는 평생 지속될 수 있다. 유년 시절의 초기기억에서 ‘상처받은 내면아이’는 그 사람의 인생에 평생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 인생의 초기기억을 함께하는 사람들, 그 초기기억의 빛깔과 향기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가족’ 혹은 ‘유사가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좀 더 주변 사람들에게 따스한 마음과 열린 자세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셋째, 다문화 시대의 초국적가족(transnational family)이나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는 커플들이 늘어나면서 가족의 형태가 바뀌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이질적 문화’에 대한 더 커다란 관용과 환대가 절실하다. 외국인 며느리를 들여 그들에게 ‘한국인처럼, 그것도 시어머니 세대처럼 천기저귀로 아기를 키우고, 삼시 세끼 남편에게 밥을 해주라’고 강요하는 문화는 이 초국적가족의 시대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폐쇄적인 태도가 아닐까. 한국에서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가족인 남편이 시어머니의 편을 드는 순간, 외국인 아내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 이런 식의 문화적 갈등을 초래하는 ‘원가족(原家族)의 지나친 간섭과 개입’은 관용과 존중이 설 자리를 점점 좁아지게 만든다. 자녀가 독립하는 순간 완전히 그 자녀에 대한 간섭을 끝내는 것이 성숙한 부모의 자세라는 것을 잊지 않을 때 다문화 시대의 초국적가족도, 자녀 없이 살아가는 부부도,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커플도, 비혼을 선택한 자녀들도 자신만의 독립적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가족의 개념은 약해질지라도 ‘가족적인 연대감’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어른들은 많지만, 나 하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을 찾기 위한 배려와 존중의 자세를 가르치는 어른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쩌면 가족이 ‘4인 가족이냐 1인 가족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초핵가족과 초국적가족이 늘어갈수록, 더 많은 이해와 배려와 존중이 필요한 요즘, 각자도생의 살벌한 생존 논리가 아닌 ‘함께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행복한 상생과 공존의 가치’를 생각하는 지혜로움이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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