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간조선 로고

상단주메뉴

  • [스페셜] 조선시대 경연처럼 공부하는 청와대를 보고 싶다
  • facebook twiter
  • 검색
  1. 사회
[2544호] 2019.02.11
관련 연재물

[스페셜] 조선시대 경연처럼 공부하는 청와대를 보고 싶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 작가미상, ‘성균관친림강론도’, 종이에 채색, 49×111.4㎝, 고려대학교박물관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라 해도 사회의 모든 분야를 다 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할까. 이런 문제가 궁금하던 찰나 짤막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2018년 12월 6일자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실린 래리 커들로(Larry Kudlow)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에 대해 언급한 기사였다. 커들로 위원장은 “시 주석이 미·중 정상회담에서 내 지위에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통상 문제 디테일(detail·세부사항)에 관여하면서 미국을 설득했다”고 평가했다. 그런 태도는 “한 국가 지도자로서 매우 이례적”인 만큼 그는 “잘 준비된 지도자”라는 찬사도 덧붙였다. 디테일에 강하다는 것은, 어떤 사안에 대해 그 분야의 실무자들만이 알 수 있는 구체적인 통계 수치를 정확히 알고 있고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뜻이다.
   
   시진핑은 어떻게 그렇게 디테일에 강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집체(集體)학습’의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집체학습은 시진핑 국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를 포함한 25명의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원들이 한 달에 한 번꼴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러 정치·경제·과학기술 등의 사안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는 학습방법이다. 학습주제는 다양하다. 2019년 1월 25일 제12차 집체학습에서는 ‘옴니미디어 시대와 미디어의 융합 발전’에 관한 이슈가 주제였다. 2018년 12월에는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국가전략’이, 11월에는 ‘인공지능(AI) 발전 현황 및 추세’가 학습주제였다. 집체학습의 주제만 봐도 중국 국가전략의 의도와 산업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평가받는다. 그중에서도 25명의 정치국원은 브레인 중의 브레인이다. 시진핑 주석은 법학 박사이고 리커창 총리는 경제학 박사다. 나머지 정치국원의 30%에 가까운 7명이 박사학위 소지자이며 56%에 해당하는 14명이 석사학위 소지자다.<주간조선 2538호 참조> 그런 엘리트들이 박사학위 취득 후에도 쉬지 않고 공부한다. 금상첨화에 도랑 치고 가재 잡고다. 시진핑이 트럼프와 무역협상을 할 때 경제력 규모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미국에 주눅들지 않고 맞짱 뜰 수 있는 힘도 바로 집체학습 덕분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과연 청와대에서는 중국의 집체학습 같은 스터디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우리 역사에는 집체학습의 경험이 아예 없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으로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을 뒤적이면서 경연(經筵)에 관한 자료를 찾게 되었다.
   
   
   왕의 일상은 경연서 시작해 경연으로 끝나
   
   실록에는 경연 기록이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경연에 나아갔다’ ‘정사(政事)를 보고 경연에 나아갔다’ ‘조회를 받고 경연에 나아갔다’ ‘조참을 받고, 경연에 나아가다’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고, 윤대(輪對)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가다’ ‘일강(日講)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주강(晝講)하였다’ ‘별강(別講)하였다’ ‘진강(進講)하였다’ ‘권강(勸講)하였다’ 등등 경연과 관련된 기록을 일기예보처럼 발견할 수 있다. 경연은 ‘경전(經典)을 강론하는 자리(筵)’라는 뜻이다. 경연 자리는 왕이 국가를 잘 운용할 수 있도록 고전과 역사와 철학 등의 인문학을 교육시키고 신료들과 토론하고 담론하는 모임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집체학습인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의 집체학습이 25명의 중앙정치국원이 학습하는 자리라면 조선시대의 경연은 왕 한 사람만을 위한 강론 자리라는 점이다. 강론 이후 신료들과 토론이 이루어졌다 해도 어디까지나 경연의 대상은 왕 한 사람이었다. 경연은 고려 예종(睿宗·1105~1122) 때 처음 실시되었으나 하나의 제도로 기틀이 잡힌 것은 조선시대였다. 조선의 경연은 태조 이성계가 1392년 7월 17일에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백관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지 두 달 후인 9월 21일에 성균대사성 유경(劉敬)에게 명하여 ‘대학연의’를 강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연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왕조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경연은 강론을 하는 시간에 따라 조강(朝講), 주강, 석강(夕講)으로 나눈다. 조강은 해가 뜰 무렵에 하는 경연이고 주강은 정오에, 석강은 오후 2시에 열린다. 조강, 주강, 석강을 삼시강(三時講)이라 하는데, 삼시강은 공식적인 경연으로 법강(法講)이라고도 부른다. 삼시강은 매일 열린 것은 아니어서 흔히 말하는 경연은 조강을 지칭한다. 삼시강 외에도 소대와 야대(夜對)가 있다. 소대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특강이나 보강이고, 야대는 밤에 열리는 소대를 일컫는다. 법강이 아닌 소대나 야대는 학덕이 뛰어난 학자나 은퇴한 원로학자가 초빙되어 왕과 담론을 하기도 한다. 물론 명망 있는 학자를 개별적으로 만나 정치 현안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독대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는 금기된 형식이었다. 경연은 상참(常參)에 이어 바로 시행되었다. 상참은 매일 아침 열리는 약식조회를 뜻한다. 영조 이후에는 경연이 끝난 후에 상참을 했다. 경연을 하는 도중 국사를 의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경연 전이나 경연이 끝난 후에 조회가 시작되었다.
   
   경연은 왕에 따라 다르지만 날마다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며칠에 한 번 하거나 한꺼번에 몰아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태종처럼 경연을 기피하거나 세조와 연산군처럼 경연을 폐지한 경우도 있었다. 세종과 성종처럼 경연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 왕도 있었고, 영조와 정조처럼 당대 석학들이 긴장할 정도로 박학다식한 왕도 있었다. 순조처럼 게으름을 피우다가 ‘학문의 강론에 힘쓰고 부지런히 자문’하라는 상소를 받는 왕도 있었다. 왕은 경연을 통해 갈고닦은 실력을 대소신료들과 젊은 유생들의 학문적 성취를 끌어올리는 데 활용할 때도 있었다.
   
   ‘성균관친림강론도’는 왕이 성균관 대성전에 행차하여 문묘의 공자 신위에 참배한 뒤 명륜당 마당에서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유교 경전에 대해 묻고 답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상단에는 명륜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회랑에 둘러싸여 있고, 중앙의 차일 아래에는 왕이 앉은 어좌를 중심으로 신하들과 호위 군사들이 서 있다.(왕의 모습은 직접 그리지 않고 어좌로 대신했다.) 그림 하단에는 강서관(講書官)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서안을 앞에 두고 표피 무늬 방석 위에 앉아 있다. 왕이 임어하였으니 경서를 강론하는 강서관이나 문답에 참여한 유생들의 준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비록 왕에 따라 부침은 심했지만 가뭄이 심하게 들거나 왕실에 흉사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경연은 조선왕조 내내 계속되었다. 문종 이전에는 하루 한 차례만 열렸고 단종 이후에는 삼시강제도가 확립되었다. 경연은 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왕위를 이을 세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세자가 하는 경연은 서연(書筵)이라 하였다. 서연은 어려서부터 당대 최고의 석학들에게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성인(聖人)에 버금가는 제왕을 만들고자 한 왕실의 마스터플랜이었다.
   
   그렇다면 경연에서는 어떤 교재를 사용했을까.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가 통치의 근본원리로 삼았기 때문에 커리큘럼 또한 유교적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군주를 길러낼 수 있도록 짜였다. 유교적 이념이라 하면 ‘대학’에서 천명했다시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가 골자였다. ‘대학’ ‘중용’ ‘맹자’ ‘논어’의 사서와, ‘시경’ ‘서경’ ‘역경’의 삼경은 기본이었다. ‘성리대전’ ‘근사록’ ‘좌전’ ‘춘추’ 등도 선택되었다. ‘자치통감’ ‘십팔사략’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등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서는 물론 ‘대학연의’ ‘근사록’ ‘성리대전’ 등 성리학을 풀이하고 정리한 책도 교재로 썼다.
   
   왕이라고 해서 경연의 교재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었다. 세종 15년(1433) 7월 7일 경연에서였다. 세종은 지적호기심이 많은 왕이었는데 경연에서 사서삼경뿐만 아니라 풍수학까지도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신하 안숭선(安崇善)이 “경연은 오로지 성현의 학문을 강론하고 구명하여 정치 실시의 근원을 밝히는 곳”이라고 주장하며 “풍수학이란 것은 잡된 술수 중에서도 가장 황당하고 난잡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강론에 참예시키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도 왕이 물러서지 않고 “비록 그러하더라도 그 근원을 캐 보아야 하겠다”라고 하자 안숭선은 “만일 잡된 학문을 강론한다면 오랜 적공(積功)이 한 번 실수로 헛되이 될까 실로 두렵다”는 말로 왕의 호기심을 잘라버렸다. 문종 즉위년(1450) 11월 23일이었다. 대사헌이 “‘근사록’의 강(講)을 끝마친 뒤에 마땅히 육전(六典)을 강해야 한다”고 하자 문종은 “육전은 반드시 강할 필요가 없으나 병서(兵書)는 강하고 싶다”고 뜻을 밝혔다. 그 이유는 “병서는 문장의 뜻을 알기 어려운 것이 많이 있으나, 만약 경연에서 강론한다면 거의 찾아서 연구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스터디그룹’의 효율성을 믿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참찬관 정창손(鄭昌孫)은 “병서는 성경(聖經)이나 현전(賢傳)이 아니므로 경연에서 진강하기에는 마땅하지 않다”고 아뢴 다음 “‘사서오경’과 ‘대학연의’를 돌려가면서 진강”하라고 설득했다. 만약 “‘강목(綱目)’ ‘송감(宋鑑)’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 등의 책이라면 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병서를 스터디하고 싶었던 문종은 “그대의 말이 옳지만 병서도 또한 부정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강하고 싶다”고 물러서지 않았고 급기야는 “다른 동료와 더불어 모여서 가부를 의논하여 아뢰어라”고 주문했다. 신하들은 임금의 교지를 가지고 의논했으나 ‘병서가 기모(奇謀·매우 기묘한 꾀) 비계(秘計·비밀스러운 계획)의 책이므로 경연에서 진강하기에 마땅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고, 결국 교재는 병서 대신 ‘대학연의’로 정해졌다. 두 경우 모두 왕에 비해 신하들의 사고가 매우 경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 때문에 조선은 성리학 일변도로만 흐르게 되었고, 조선 말기에 세계사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해 나라를 잃게 된 원인이 되었다.
   
   
   국정운영에서 종실의 불법까지 논의의 대상
   
   경연은 왕이 신료들과 더불어 경전이나 사서에 대한 강의와 토론을 하는 자리다. 경전과 사서가 사람의 도리와 제왕의 역할에 대해 언급된 내용이 많은 만큼 도중에 자연스럽게 현실문제와 관련된 크고 작은 사안이 언급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 7년(1425) 7월 19일 경연에서 왕은 ‘성균관 학생들이 습질에 걸리는 일이 많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세종은 실태를 파악하라는 명을 내린 후 기숙사를 수리하여 온돌을 만들어주도록 하고 목욕탕을 만들게 하고 바닥에는 방석을 깔게 했고 항상 의원을 보내 환자가 발생하면 곧 증세를 살펴서 치료하도록 했다. 정종 1년(1399) 1월 7일 경연에서는 지경연사 조박(趙璞)이 ‘논어’를 진강하다가 “이것은 군주에게 백성들을 괴롭히는 토목의 역사를 파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왕은 그 의미를 바로 파악하고, 충청도 감사가 궁성에 띠 덮는 것을 없애자는 청을 받아들여 “토목 일을 이미 파하였다”고 대답했다. 그런가 하면 국방에 관련된 사안도 경연에서 논의되었다. 문종이 즉위하고 7개월쯤 지난 1450년 9월 1일이었다. 문종이 경연에 나아가니, 지경연사 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 “몽골군이 바야흐로 중원(中原)에 뜻을 두고 있으니 언젠가는 우리나라를 침범할 것 같다”고 했다. 이에 문종은 “적이 오고 안 오는 것은 미리 헤아릴 수는 없는데, 비록 국가가 한가할지라도 상시 적이 침범해오는 것처럼 하면서 우리의 기계를 수선하고 우리의 병사를 훈련시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는 일이 진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계책이 될 것”이라고 하답했다. 덧붙여서 문종은 “근래에 조선이 북방의 방비에만 오로지 힘쓰고, 남방은 근심이 없다고 여기면서 왜인(倭人)을 방비하는 계책을 조금 늦추게 되니, 이것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자 김종서는 “각도(各道)에 명령하여 궁시(弓矢)를 많이 제조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계책을 내놓았고, 문종은 “행성(行城)은 쉽게 급히 완성시킬 수가 없으니 잠정적으로 읍성을 견고히 하여 스스로 지키는 것”이 실로 우리의 좋은 계책이라고 말한 다음, “활과 화살을 더 제조하는 것을 서두르라”고 독려했다. 이 사례는 경연과 상참이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종실(宗室)의 불법(不法)도 경연에서 논의의 대상이었다. 문종 1년 신미(1451) 10월 4일이었다. 경연에 나아가 강이 끝나자, 우정언 윤서(尹恕)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불법적인 행동을 언급했다. 수양대군이 사헌부에서 논결한 승려를 탈취하여 칼을 벗기어 데리고 갔으니, 사헌부의 단안이 아직 옳고 그른 것은 알지 못하겠으나, ‘집법관(執法官)이 한 일을 이같이 어지럽게 하였으므로 관청에 명하여 그를 추국’하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윤서는 수양대군의 불법행위를 지적하기 위해 ‘맹자’ 진심 상에 나오는 순(舜)임금과 고요(皐陶)의 재판을 언급하면서 왕이든 촌부든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 피터르 브뤼헐, ‘장님들의 우화’, 1568년, 캔버스에 템페라, 86×154㎝, 나폴리국립미술관

   국민을 위해 공부하는 청와대가 되기를
   
   그렇다면 경연은 왜 필요한가. 그 해답은 16세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피터르 브뤼헐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장님들의 우화’로 알려진 그림 속에는 6명의 장님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길을 걸어가고 있다. 문제는 장님 무리를 이끄는 인솔자도 앞 못 보는 장님이라는 사실이다. 뒤따르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할 인솔자 장님이 돌부리에 걸려 뒤로 나자빠졌다. 넘어질 때의 충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가 들고 있던 악기가 박살이 나버렸다. 첫 번째 사람이 넘어지자 그의 지팡이를 잡고 가던 두 번째 사람도 휘청거린다. 그 뒤를 따르는 네 명의 장님들 또한 줄줄이 넘어질 것이 예상된다. 그들이 필연적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는 불안한 상황을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를 향해 사선으로 배치된 인물구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한 모습을 그린 ‘장님들의 우화’는 무지한 사람들의 우매한 행동을 풍자한 작품임과 동시에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경연을 해야 하는 이유다. 국정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공부를, 집체학습을 해야 하는 이유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를 다 알 수는 없다. 국가 지도자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는 전 분야를 다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단어에는 5115만7935명(2018년 추계)이라는 국민의 목숨이 축약되어 있다. 지도자의 결정에 따라 5000만명이 넘는 국민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최고결정권자라는 점에서 국가의 운명이 대통령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 비서실장, 정책실장, 국가안보실장, 경제수석, 정무수석, 민정수석 및 국무총리와 각 부처의 장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문가의 강의를 들으며 토론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국민들은 안심이 될 것이다. 최고의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이니만큼 정부의 결정에 박수를 보내고 지지할 것이다. 권력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개인의 도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삶도 망가뜨리게 된다. 그래서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새해에는 청와대와 정부 각료들이 국민을 위해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몇십 년 전 대학교 다닐 때 들었던 교양수업 수준의 지식으로 정치하지 말고 한 분야에서 수십 년 동안 연구해온 각 분야 전문가들의 머리를 빌리기 바란다. 그것만이 산업구조가 다르고 경제 환경이 달라진 미래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창간 50주년 영상

주간조선 SNS

  • 페이스북
  • 트위터
  • 인스타그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