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유럽에서 열린 글로벌 미팅에 갔더니, 다양한 영역에서의 ‘성장(growth)’을 얘기했다. 환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자기 커리어와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그중 ‘다양성에 있어서의 성장(Growing in Diversity)’이란 워크숍도 열렸다. 문화라는 관점에서 조직 내 다양성을 얼마나 보듬을지, 다양성을 포용하는 리더십은 어떻게 키울지, 그리고 우리 각자 편견과 선입관을 얼마나 떨쳐버릴 수 있을지 등이 토론 주제였다.

스웨덴에서 온 동료는 “우리나라에서 다양성이라고 하면 수적으로나 역할에 있어서 여성보다는 남성 직원들에 대한 고려가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내가 “처음엔 다양성이라고 하면 국적이나 인종 같은 거창한 개념인 줄 알았는데 의학, 마케팅 등 직원들의 각기 다른 배경과 전문성도 다양성 같다”고 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인 한 동료는 “‘무의식 편견’ 워크숍에 갔다가 내가 얼마나 편견 덩어리인지 깨닫고 깜짝 놀랐다”고도 했다. 워크숍은 “이 다양성이 우리 조직의 성장을 어떻게 견인할 수 있을까”에 대한 토론으로 마무리됐다.

‘다양성’이란 개념은 기업들이 내세우는 가치나 조직문화에 곧잘 등장한다. 한데 글로벌 회사에서 이 개념은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는 핵심 가치로 살아 움직인다. 변동적이고(Volatile), 불확실하고(Uncertain), 복잡하며(Complex), 모호한(Ambiguous), 즉 뷰카(VUCA) 환경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아이디어야말로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의사결정을 도와준다고 본다. 궁극적으론 비즈니스와 조직 성공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글로벌 회사에서의 ‘다양성(Diversity)과 포용성(Inclusion)’ 추진 방식은 아주 구체적이다. 아예 담당 직무를 두거나 지역이나 로컬의 우수한 리더들에게 이 가치를 이끄는 챔피언 역할을 맡긴다. 여성, 아시아,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위한 각각의 위원회가 운영된다. 기업별로 그 다양성을 조직 안에 녹여내는 방식과 강도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날 뿐이다.

글로벌기업 프록터앤드갬블(P&G)은 명확하고 측정할 수 있는 ‘다양성과 포용성(D&I)’이란 목표를 세우고 ‘린 인(Lean In) 서클’ 같은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이 회사 아시아태평양 지역 D&I 리더를 맡았던 P&G 중국 스킨케어 & 퍼스널 케어의 이수경 대표는 “전 세계에 있는 다양한 국적, 문화, 배경의 고객들을 응대해야 하는 우리에게 다양한 사고와 문화를 추진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머스트(Must)’”라며 “이는 사회에 대한 책임일 뿐 아니라 비즈니스를 위해 지극히 당연하고 중요한 결정”이라고 했다.

한때 침체기를 겪었던 마이크로소프트(MS)를 다시 정상에 올려놓은 인도 출신인 사티아 나델라 CEO. 그가 2014년 취임 때부터 강조했던 ‘기업의 영혼’도 바로 ‘다양성’과 ‘공감’ ‘포용성’이다. 그는 책 ‘히트 리프레시(Hit Refresh)’에서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며 “직원들의 다양성이 지속적으로 확대돼야 하며 사고와 판단에는 광범위한 의견과 관점이 수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글로벌 회사에서 ‘다양성’은 ‘포용’과 한 세트로 얘기된다. 얼마나 다양한지보다 그걸 조직이 어떻게 포용하는지가 더 강조된다는 점에서, 방점은 ‘포용’에 찍힌다. 다른 사람, 다른 의견을 얼마나 포용할 수 있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이요 그릇으로 평가된다.

7~8년 전 한 글로벌 미팅에선 ‘다양성과 포용’이란 주제의 상황극이 소개됐다. 다양한 출신의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사회자가 갑자기 ‘스톱’을 외쳤고 배우들은 동작을 멈췄다. 바로 그 상황에 대해 토론이 시작됐다. “이 장면에서 조직의 다양성을 해하는 장애물이 무엇이었나” “여기에서 발견한 편견들은 무엇이었나” “나는 평소 여기 ○○○처럼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가”….

나라별로 좀 다르겠지만 대개 다양성의 시작점은 성별인 것 같다. 성별 제한 없이 능력을 발휘하고 평가받는 문화를 지향한다. 전체 인원 수에서 남녀 비율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매니저와 임원급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분포해 있는지를 살펴보고 향후 전략을 짠다.

내 경우, 수년 전 본사에서 진행하는 ‘아시아 얼라이언스 그룹’에 참여해봤다. 회사 안에서 아시아 출신이란 이유로 승진이나 기회에서 제약은 없었는지, 아시아 문화가 글로벌 조직문화 간에 간극이 있다면 그걸 어떻게 잘 풀어가야 할지 등에 대해 머리를 맞댔다. 아시아 출신에게 있을 수 있는 조직 내 한계를 표현한 ‘대나무 천장(Bamboo ceiling)’이란 단어도 이때 처음 들어봤다. ‘유리 천장’의 다른 버전이었다.

2년 전 뉴욕 본사에 근무할 땐, 이 다양성이란 개념을 하루하루 온몸으로 체험했다. 가까이 일하던 한 미국인 남성 동료가 승진했다는 조직 발표를 이메일로 접했다. 말미에 “○○○는 이번 조직 이동으로 ‘그의 남편(his husband)’과 함께 ○○○로 옮긴다”고 했다. 이 동료가 동성애자라는 것엔 그다지 놀라지 않았지만, 그런 내용을 거리낌 없이 공지하고 나누는 것은 솔직히 낯설었다.

하긴 2015년 미국이 동성애자 결혼을 합법화했을 때, 회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내 동성애자 동료들의 퍼스널 스토리를 읽은 적이 있다. 내가 속한 부서의 글로벌 부회장이 동성애자로 살았던 자신의 20년 인생을 생생하게 묘사해놓았다. 글로벌 회사들 중엔 실제 성소수자들을 평등하게 채용하고 불이익은 안 줬는지 등을 포함한 ‘LGBT(성적소수자) 평등지수’를 체크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다양성을 꾀하기에 앞서 우리 안의 ‘무의식적인 편견(Unconscious bias)’을 깨라는 대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난해 참석한 ‘다양성과 포용성’ 워크숍에선 한 채용 인터뷰 후, 같이 면접을 봤던 타 부서 동료와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주어졌다. “후보자가 어떤 회사 출신이라서 가진 편견은 없었나.” “혹시 시간에 쫓겨 급하게 의사 결정을 내리진 않았나.”

이어 강사가 질문을 던졌다. “나랑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선호한다거나, 최근 들은 정보에 기반해 의사 결정을 하고, 바라고 기대하는 바에 따라 생각하려고 하진 않으세요? 다 무의식적 편견입니다.”

한 글로벌 회사의 임원은 “초기엔 비슷한 사람들끼리 일하는 조직의 업무 생산성이 높은데 그런 문화는 성장에 한계를 보인다”며 “초반 업무 생산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다른 배경, 다른 사람들이 함께 나누고 일할 때, 퀀텀 점프하는 성장과 조직문화의 깊이를 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것에 대해 한계를 긋는 게 아니라, 다름을 포용해서 오히려 가능성과 기회를 확대하고 펼쳐가는 것. 그것이 글로벌 회사가 필사적으로 강조하는 ‘다양성과 포용’ 가치 아닐까. 국적, 인종, 성별, 출신, 나이, 지금 우리가 사는 기업과 사회는 어느 지점에 와 있을까.

황성혜 한국화이자제약 전무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